남서향으로 트인 우리 집은 볕도 바람도 잘 든다. 16년 차 아파트답게 수목도 우거졌다. 여름 수목은 더 무성해져서 수많은 새들이 흔적도 없이 깃들어 산다. 사람들이 깃들어 사는 아파트가 더위에 어쩔 수 없이 창문을 열고 잠이 들면 새들이 깃들어 사는 나무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분주한 소리로 아침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소리는 창문으로 여과 없이 들어온다. 여름엔 알람 따윈 필요 없다. 눈으로 들어온 빛이, 귀로 들어오는 소리가 아침보다 먼저 내 방에 닿아있다.
그중 유난히 큰 소리는 당연히 까마귀 소리다. 다른 모든 새들의 소리를 압도한다. 가장 높은 곳을 날며 그들만의 영역을 확보한다. 대여섯 마리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분주하고 강렬하다. 처음엔 좀 무섭다가 이젠 그러려니 한다. 그러다 9시가 넘으면 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파트 1층에 있는 어린이집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걸어서 등원을 한다. 그러면 새들이 놀러 나간 수목 아래 그늘에서 오전 활동도 하고 놀이도 하다가 12시쯤 점심 먹고 낮잠을 잔다. 대부분 등원을 잘하는데 꼭 한두 명은 정말 가기 싫은 모양이다. 등원을 시켜야 하는 할아버지는 어린이집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지만 손자의 기저귀 찬 엉덩이는 뒤로 빠진 채 도저히 움직일 생각이 없다.
그때쯤 아침 산책을 나온 반려견과 주인은 바람길 명당인 동과 동 사이의 그늘진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잠시 후 분수대가 가동을 시작하고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와 위로 솟아오르는 물줄기 사이에서 바람과 햇살이 방울방울 터진다. 소나무 위에선 까마귀가 간간이 울어대고 할아버지 손잡고 가던 손자가 떼를 쓰면 그걸 보던 포메라니안이 누굴 보고 짖는지 양껏 짖기 시작한다. 간격을 맞춰 분수대 물줄기가 규칙적인 물소리를 내면 남서향으로 창을 낸 우리 집의 창문들은 두 팔 벌려 여름날의 오케스트라를 집안으로 들이기 시작한다.
더워서 꼼짝도 하기 싫은 오늘, 무슨 소리가 더해졌다.
- 우와, 이 더위에 예초라니!
예초기 소리가 사방으로 강력하게 울려 퍼진다. 예초기가 지나간 자리마다 영산홍의 삐죽삐죽 나왔던 잎과 가지들을 가지런히 이발이 된다. 예초기 소리는 모든 소리를 압도한다. 이제까지 들리던 여름 오케스트라는 서막에 불과했다. 진정으로 강력한 여름 소리가 등장했다. 귀를 멍하게 하는 이 강력한 여름 오케스트라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보내왔다.
- 와, 풀향기다!
베어낸 풀 줄기마다 세어 나온 풀 향기가 얼마나 진했던지 몇 층을 지나 우리 집까지 올라왔다. 내 코끝에 닿은 여름 향기는 이제 내 몸의 창문도 다 열어젖힐 참이다. 곧 있을 한낮 더위에 이내 지치고 말지라도 지금 이 순간, 여름 아침은 시끌벅적하고 활기차고 향기롭다. 그래서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