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라산 관음사지구 화장실에서
4일 이상 제주에 머무르다 왔다. 엄마 칠순 기념, 아버님 칠순 기념으로 제주에 다녀온 게 마지막이었으니 세어보니 거의 20년 만이었다. 외국도 아닌데 이렇게나 오래 가지 않았다니 제주에 괜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방학과 휴가철을 코앞에 두고 있는 제주는 고요하면서 분주했다. 그사이 새로 생겨난 뮤지엄들의 개수가 내가 방문하지 못했던 햇수만큼 많아져 있었다.
제주는 그곳이 어디든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과 감동과 행복이 현무암의 구멍처럼 송송 숨어있었다. 그 수많은 곳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바로 관음사지구 주차장에 있던 화장실이었다. 새벽 일찍 성판악 쪽 등산로에서 한라산 입장을 허가받은 남편이 하산을 하면서 만나기로 한 곳이 관음사지구 주차장이었다. 지난겨울, 한라산을 도전했다가 입구에서 입산 금지를 당한 전력이 있던 터라 남편은 제발 입장만 하게 해달라고 선문대할망께 기도를 드렸다. 다행히 무사히 입산을 허가받고 7시간의 긴 등산 끝에 관음사 쪽으로 내려 올 예정이었다. 그사이 나는 이니스프리 제주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내다 관음사 쪽으로 차를 가지고 왔다. 캠핑과 야영을 할 수 있게 넓게 조성된 주차장이 한라산 허리에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차를 세우고 근처 화장실을 들어간 순간,
- 와, 이런 곳에 이런 곳이!
마침 아무도 없던 화장실 안에서 마음껏 탄성을 질렀다. 어리목에 살고 있을 것 같은 노루 한 마리가 화장실에서 고요히 내 눈을 맞추어 주었다. 도대체 어떤 마음이면, 어떤 생각이면 꽃피는 한라산을 그려놓고 노루를 데려다 놓을 생각을 했을까? 저 그림을 그린 이는 누구이며 그림을 이어가며 저 문짝을 이어서 달았던 사람들은 또 누구일까?
우리나라 화장실 아름다운거야 이젠 당연한 일이라 그리 놀랍지도 않지만 한라산 중턱, 생각지도 못한 산어귀에서 미술관의 작품 같은 화장실을 만날 줄은 정말 몰랐었다.
손을 씻으려고 세면대로 돌아서니 다시 한번 전면 거울에 노루가 비친다. 그냥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냥 흥얼거림이 터져 나온다. 화장실 사용료를 내면서 들어가던 유럽의 화장실도 이런 곳을 만날 수는 없었다. 진짜 화장실 사용료를 내어야 할 곳은 이곳이다. 밖에 나와 외관을 보니 이끼 올린 둥근 지붕이 오름의 형상이기도 하다. 난 한라산을 오른 것도 아닌데 노루도 만나고 봄날에 한라산도 다 본 느낌이다.
무사히 등반을 마치고 내려온 남편은 온몸으로 한라산을 안고 왔으니 사슴 따위가 눈에 들어 올리가 없었는지 남자 화장실에는 그런 그림은 없더라 했다. 그런들 어떠하리! 이미 난 봐 버렸으니.
다시 제주를 온다면, 관음사지구 화장실에 다시 와 볼 예정이다. 아직도 노루는 거기 있는지, 한라산의 철쭉은 여전한지. 선문대할망이 구름으로 꼭꼭 숨겨두었던 한라산 정상을 멀리서라도 볼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제주에서 허락되었던 것들을 가득 안고 돌아오는 길, 또 다른 제주를 벌써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