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는 몰라도 뭘 좀 먹기는 먹어야 할 텐데 일단 라멘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미리 검색으로 알아 둔 집도 있지만 이곳에 와 보니 그 집을 찾는 것보단 눈앞에 줄 서 있는 집으로 가는 게 나을 거 같았다.
- 이랏샤이마세!
누군가 크게 외칠 것 같았던 상상과는 다르게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또 다른 줄을 서 있다. 키오스크 전 단계에 해당될 것 같은 식권발권기라는 것이 두둥! 뭔지 모를 땐 가장 위에 있거나 맨 앞에 있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라 용감하게 맨 첫 번째 버튼을 누른 후 그림으로 알아본 대파 토핑을 고른다.
호기롭게 지폐를 넣으니 촤라라라!! 잊고 있었던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가득하다. 식권을 들고 동전을 주워 담고 테이블에 앉아서 라멘을 기다린다. 호불호가 없는 맛이라 일단 성공이다. 라면을 먹는 동안 나의 고민은 동전! 1엔에서 500엔까지의 다섯 종류의 동전이 주머니에서 달그락거린다.
- 이걸 어쩐다? 동전 지갑을 살까?
특히나 10엔 동전은 무겁기도 무겁고 크기도 커서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 그냥 살자. 최대한 동전을 줄이지 뭐.
하나도 대책이 되지 않는 대책이었고 한 달 후 결국 동전 지갑을 사고 말았다. 진즉 사서 쓸걸. 버티고 버티다 택시 앱 깔고서야 알게 되었던 때의 편리함이랄까. 한 달 이상 생활하실 분들은 무조건 동전 지갑 하나 사시길. 귀여운 아키타의 개 모형의 동전 지갑을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면 더 망설일 필요는 없다.
라멘 한 그릇을 8000원 정도에 먹고 나니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점심 식사가 떠올랐다. 일본 식당에서 제공하는 양 자체가 적어서 그럴 수도 있으려니 했는데 실제 식사량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살짝 많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다른 메뉴에서도 한 끼 식사로 제공되는 양이 결코 적은 편이 아니었다. 물론 주어진 식사 외에 수많은 반찬이 제공되는 우리 식당에 비하면 반찬 종류는 거의 제공이 안 되는 게 맞긴 하다.
우리나라의 하나로마트 정도에 해당하는 COOP에서 시장을 볼 때도 일본의 물가는 체감상 우리나라와 비슷하거나 살짝 낮게 느껴진다. 달걀 10개가 3500원 정도, 우유 900ml는 2000원 정도, 무엇보다 과일이나 채소가 다양하고 조금 싸다.
25년 전 일본에 살았을 때는 모든 게 우리나라보다 한참 비쌌던 일본의 물가를 돌이켜 보니 그동안 두 나라에는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 경제학적으로야 여러 분석이 있을 수 있지만 먹고사는 일은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나 소중하고 중요한 일인 건 변함이 없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꼼꼼히 물건을 살피고 싱싱하고 좋은 물건을 고른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혹은 함께 먹을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하고, 웃고 쉬며 또다시 힘을 얻기 위한 다양한 살림살이에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디든 비슷하다.
채소나 과일의 종류가 비슷한 건 일본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이다. 무엇보다 반가웠던 건 숙주와 콩나물이 한가득 쟁여져 있는 코너를 발견했을 때였다. 콩나물을 다듬어 냄비에 소금 간하고 끓여본다. 대파도 있으니 슥슥 썰어두고 액젓이나 간 마늘이 없는 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뭐 아쉬운 대로 보글보글. 숙주는 살짝 데쳐서 참기름, 소금, 통깨로 무쳐 본다.
3년간 살게 될 집으로 이사 아닌 이사를 하고 몸만 들어온 첫날, COOP에서 시장을 보고 식탁에 마주 앉았다. 없는 양념이지만 얼추 비슷한 그 맛들에 웃음이 난다. 밖에서 먹던 라멘도 돈가스도 맛있었지만 하얀 밥에 콩나물국, 숙주나물, 김으로 차린 이 저녁 밥상은 배도 부르지만 세상 부러울 것 없을 것 같은 만족감도 함께 불러왔다.
- 집 밖은 일본이지만 집 안은 계속 한국일 것 같은 이 예감은 뭐지?
일본 음식을 질리도록 먹으리라 했던 다짐은 아직 유효하지만 벌써부터 까나리 액젓이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삿짐을 기다리는 건 미리 챙겨두었던 각종 식자재 때문일지도.
결국 우리는 여기서도 거기서도 그때나 지금이나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오롯이 오롯하게 잘 먹고 잘 살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