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유미 Mar 28. 2024

원청

위화 소설



문성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의 차 보닛을 우그러뜨리며 앞 유리창으로 날아들던 둥근 물체였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시야에 잡히는 것이라곤 끝없이 이어진 길 하나뿐이었다. 생명체라고는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어 하늘인지 땅인지 구분이 안 가는 낯선 광야에 혼자였다. 그는 무의식 중에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길 멀리 검은 점 같은 것이 보였다. 문성은 마음이 급해져 걸음을 서둘렀지만 마음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정된 속도의 트레드밀 위에 올라 있는 듯이 걸음이 전혀 빨라지지 않았다. 다행히 검은 점이 움직임을 멈춘 틈에 문성이 따라잡고 보니 검은 점의 정체는 나이 든 남자였다.


“저기, 말씀 좀 여쭐게요. 여기가 어딥니까?”

“얼마나 걸어오셨소?”

“글쎄요, 시간이나 거리를 알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요.”

“오는 동안 이정표를 하나도 못 봤습니까?”

“네.”

“그럼 죽은 지 채 하루가 되지 않았겠구먼. 여기는 저승 가는 길이오.”

“예에! 이런 제기랄.”


문성은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무슨 영문인지 아침 출근길이 잘 뚫린다 싶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찰나, 반대 차선에서 달리던 트럭이 전복되며 순식간에 중앙분리대를 부수고 그가 달리던 차선을 덮쳤다. 트럭에서 튕겨 나온 바퀴 하나가 운석처럼 그의 차에 떨어지는 걸 마지막으로 봤었다.


“이런 젠장! 젠장! 망할 놈의 인생! 끝까지!”


그는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는 너무나 선명하게 그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는 생전에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는데 이렇게 망할 줄은 몰랐을 뿐이다.

돌아보면 아쉬울 게 하나도 없는 삶이었다. 그에게는 가족 한 명 친구 한 명 없었고 밥벌이를 위해 쳇바퀴 돌리는 일상은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는 정도의 변화조차 없었다.

5평짜리 자신의 보금자리를 벗어나는 경우는 그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돈을 벌러 갈 때뿐이었다. 가구라고 매트리스 달랑 하나 놓인 그 방이 세상에서 그가 유일하게 정을 붙인 곳이다. 어젯밤만 해도 등을 붙이고 책을 읽던 곳이었는데 죽어서 기억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 순간 잠들기 전 머리맡에 던져놓았던 책이 떠올랐다. 위화의 소설 원청이었다. 문성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럴 거면 책이나 마저 읽을걸. 이렇게 죽을 줄 모르고. 내일 읽겠다고 내일이 어딨어?등신! 억울해! 결말도 모르고 죽다니! 이대로 죽을 수 없어!”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찾아 떠나기로 결심하는 부분에서 책을 덮은 자신을 원망했다. 더 읽었어야지, 끝까지 읽었어야지.

연기처럼 사라진 들 이상하지 않은 삶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야기의 결말을 알지 못하고 죽은 지금 너무나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노인은 이제껏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부르짖는 인간을 여럿 보아왔지만 책때문에 억울해하는 인간은 처음 보았다.


“거,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오. 혹 가능하다면 이 길을 거꾸로 걸어가 보시오.”

“왜요?”

“이 길은 원래 북쪽으로만 걸을 수 있소. 그런데 간혹 억울함이 사무친 사람들이 발걸음을 돌려 남쪽으로 가는 경우도 있소. 그 마음이 간절하다면 말이오.”

“그래서요? 남으로 가면요?”

“북쪽으로 가는 동안 이승의 기억을 잃는 거요. 반대로 가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이승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문성은 몸을 돌려 조심스레 한 발을 옮겼다. 그리고 한 발, 또 한 발, 어느새 그는 남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무엇에의 간절함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바람대로 망해버린 삶에의 미련인지, 소설의 결말을 향한 간절함인지.


노인의 말대로 남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계속 사람들을 마주쳤다. 원청이 워낙 유명했던 소설이라 그 책을 아는 사람들을 제법 만났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끝까지 읽어 결말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성은 계속 남으로 내려가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짜깁기해 이어나갔다.


아기를 포대기에 싸안고 등에 집을 통째로 매단 듯한 봇짐을 지고 원청을 찾아 헤매던 린샹푸가 마침내 시진에 도착했다고 누군가 알려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떼로 얼어 죽어 나가던 엄동설한에 천융량과 리메이롄이 린샹푸를 받아주고 자신들의 몫의 죽을 내주는 장면에서 마음이 따뜻해졌다고 누군가 말했다.

톈다가 집문서와 금괴 두 개를 가슴에 품고 그 먼 길을 린샹푸를 찾아온 장면에서 감동받았다는 누군가가 있었다.

갓난쟁이였던 린바이자가 열두 살이 되어 구이민의 망나니 큰아들 구퉁녠과 약혼식을 하는 장면에서 분통이 터졌다는 누구도 있었다.

토비에게 납치된 린바이자를 대신해 자신의 친아들 천야오우를 보내는 리메이롄이 이해가 안 되었다고 누군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북양군이나 토비나 백성들을 괴롭히기는 매한가지라며 침을 튀기던 누군가가 전해주는, 토비가 인질들을 고문하는 장면은 차마 귀로 듣기에 참혹했다.

‘저는 봤습니다. 머리 위의 그릇이 깨진 다음에 날아왔습니다. 총알이 어떻게 나중에 올 수 있죠?’라는 구절을 외우며 위화의 유머에 깔깔 웃었다는 이도 있었다.

토비 별명이 스님이 가당키나 하냐며 천야오우의 귀를 잘랐다가 목숨을 살렸다가 하는 스님의 이중성이 가증스럽다며 어떤 이는 혀를 찼다.

린샹푸가 인질이 된 구이민의 몸값을 들고 갔다가 결국 죽음을 맞는 장면에서 안타까웠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이를 만났다.

천융량이 장도끼를 죽여 원수를 갚는 장면에서 갑자기 삼국지 분위기가 났다며 좀 생뚱맞지 않냐고 의견을 피력하는 누구를 지나쳤다.

톈씨 형제가 린샹푸의 관을 수레에 싣고 샤오메이의 무덤을 지나치는 장면에서 슬펐다고 말한 누군가를 끝으로 문성은 발걸음을 멈췄다.


린샹푸는 원청을 찾아 헤맸지만 끝내 거기에 도착하지 못했다. 원청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없는 곳에 있을 샤오메이를 찾았기 때문에 둘이 살아서 만나지 못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문성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어디에 두고 왔는지 모를 미련을 찾아 린샹푸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오는 동안 그가 깨달은 것은 세상 어디에도 미련 둘 곳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문성 자신이 이 세상에서 원청이었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는 몸을 돌려 다시 북쪽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그때 문성은 자신이 이야기의 절반 밖에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샤오메이의 ‘또 하나의 이야기’가 남아있는 줄은.





매거진의 이전글 정의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