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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Apr 03. 2024

어머니와 금고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일촉즉발이었다. 그는 전화기가 자신의 마지막 이성의 끈 인양 꼭 움켜쥐고 있었다. 저 전화기가 언젠가 그의 손에 나자빠진 선풍기나 발길질에 나가떨어진 청소기 신세가 되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런 꼴값도 젊을 때나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 몇 분째 어머니에게 집에 있는 금고 여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사투 중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처음부터 말할게. 아니 아니, 비밀번호를 먼저 누르면 안 된다니까.”

‘......’

“엔터를 누르고, 화살표 모양이 있는 키. 그래, 그걸 먼저 눌러.”

‘......’

“그다음 7890을 누르고. 7890이라니까. 아니 아니, 엔터키, 엔터를 누른 다음에.”

‘......’

“그리고 한 번 더 엔터. 안 돼?”

‘......’

“아니 아니, 내 말을 들어봐. 처음에 엔터!”

‘......’

“계속 틀려서 잠긴 걸 거야. 아니 아니, 내일 다시 시도해 봐야지 뭐, 어쩔 수 없네.”


아니 아니를 남발하며 통화를 끝낸 남편에게 물 잔을 건넸다.

중간에 내가 바꿔 받을까도 싶었지만 금고를 만져본 적도 없는 나보다는 열어본 경험이 있는 남편이 낫겠다 싶었는데 물을 벌컥거리며 마시는 걸 보니 차라리 서울 안 가본 놈이 길을 알려주는 편이 나았겠다 싶기도 하다.


“당신, 정말 설명하는 거 하나는 끝내준다.”

“뭐? 왜?”

“끝내주게 못한다고.”

“와, 정말 복장 터지겠다.”

“어머니 복장도 터졌겠지.”

“어휴, 몰라.”


젊었을 때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졌던 터라 말귀도 다 알아듣는 어른을 상대로 매번 열을 받는 남편을 처음 봤을 때 정신이 좀 나간 사람 같았다.

지금이야 저런 사람도 있더라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책에 다 썼던데 뭐 하며 함께 산 의리로 무시하지만.


“당신처럼 금방 이해하고 일머리 좋은 사람들이 문제야.”

“그건 왜?”

“1,3,5,7,9 이렇게 건너뛰며 설명해도 남들도 자기처럼 알아듣는 줄 아니까.”

“그럼 어떡해야 하는데?”

“1,2,3,4,5,6,7,8,9 차례차례 얘기해야지.”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여보, 소수 몰라? 1, 1.5, 2, 2.5 더 쪼개서 설명하면 되잖아.”

“아아, 속 터져.”

“근데 금고 안에 뭐가 있는데?”

“아무것도 없어. 옛날에 장사하실 적에 썼던 건데 지금은 그냥 고철이야.”


다음번에 가면 금고를 치워야겠다고 말하며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홀로서기를 하고 계시는 중이다. 그간 아버지께서 바깥일을 일절 맡아서 하신 연유로 어머니는 여든이 다 되신 나이에 사회 초년생이 되셨다. 은행가는 일, 공과금 납부하는 일, AS신청하는 일, 물건 사는 일등 일일이 물으신다.


그중 어머니에게 가장 곤란한 일은 전화로 업무를 봐야 하는 경우이다. 전화를 걸면 사람이 받는 게 당연하던 옛날 사람에게 요즘 ARS시스템은 너무나 어렵다.

사람을 만나려면 구중궁궐 관문을 하나하나 통과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신속정확하게 번호를 누르지 않으면 제한시간에 걸려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도르마무의 굴레에 영원히 갇히고 만다.

그렇게라도 해서 상담사랑 연결을 할 수 있다면 나은 경우다. 실제 AI상담사가 사람보다 흔한 세상이 되었다.


그나마 대리로 전화해서 해결이 가능한 일은 낮은 레벨에 속한다. 끝판왕은 은행이나 관공서다. 이놈들이랑 엮이면 답이 없다. 개인정보 보호니 어쩌니 하며 본인이 아니고는 도통 일을 봐주지 않는 데다 가족임을 증명할 서류를 종류별로 요구해 약을 올려 남편 속을 새까맣게 태워먹었다.


날마다 새롭게 복장이 터지는 남편과는 별개로 나는 어머니를 번거롭게 하고 신경 쓰이게 하는 일들이 매일 생겨서 한시름 놓인다. 어머니와 일상을 늘 함께 할 수 없는 우리를 대신해 그런 작은 일거리들이 자꾸 어머니의 마음을 쓰이게 하고 몸을 움직이게 해서 다행이다.


다음 날 어머니는 금고를 열었다며 나에게 당당히 소식을 전하셨다.

뭣도 모르는 남편에게 금고는 가만히 두라고 일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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