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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o Hwang Feb 15. 2020

2주년

어느 게이 커플의 연애담

 월요일 저녁 퇴근하고 집에 오니 화장실 불이 켜져있다. K가 아침에 켜놓고 간 모양이다. K는 휴지를 종이 아이스크림 통에 넣어놓고, 화장실 불을 잘 끄지 않으며, 소변도 앉아서 보는 법이 없다. 분리수거를 위해 아이스크림 통에 말라붙은 휴지를 떼다 말고 소파에 걸터앉아 맥북에 일기를 몇 자 썼더랬다.



 고감독님의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라이브톡을 보았다. 이번엔 이동진씨와 고감독님이 함께 진행했다. 감독님이 말을 끝내면 통역사가 통역을 해주고, 그 말을 듣고 다시 이동진씨가 질문을 하는 식. 중간에 통역의 과정이 들어가다보니 질문과 대답이 한 번 오갈 때마다 꽤 시간이 걸렸다.


 잘 알지 못하는 일본어가 계속 될 때마다,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에 내 생각들이 자꾸 끼어든다. 귀에 익은 단어가 들리면 이런 이야기일까 지레 짐작을 하기도 하고. K가 왔으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겠구나 하고 생각도 하고.


 문득 k와 처음 만났던 날 밤이 생각났다. 종로 포차에서 술을 마시기로 했었는데 우연히 옆자리에서 일본어가 들렸다. K는 자기가 일본어를 잘 하니 통역을 해주겠다며 합석하자고 말했다. 본인의 어학능력 어필의 일환이었으리라.


 K의 전략은 유효했다. 난 외국어를 잘 하는 사람을 멋있다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나를 빼곤 다들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일본어로만 대화가 이어졌더랬다. 간단한 단어정도밖에 모르는 나는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듣기만 할 수밖에.


 미처 번역되지 못한 문장들에는 어떤 힘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앙굴렘에서 프랑스어로 된 책을 샀을 때도, 종로 포차에서 K의 첫 일본어를 들었을 때도. 그 순간이 계속 기억에 남아있다. 일본어와 한국어 통역의 사이, 혹은 낯선 일본어와 낯익은 일본어 사이, 난 그 날 어쩌면 가장 멋진 문장들을 상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역시나 소파에 걸터앉아 맥북에 일기를 또 몇 자 썼다.



 넷플릭스에서 <결혼이야기>를 보았다. 오프닝에서 찰리가 편지를(?) 읽는다.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10분만에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거라 짐작했다.


 스포일러라 말할 순 없지만,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며 잠깐동안 내가 어쩌다 K를 좋아하게 됐을까 생각했다. 또 다시 소파에 걸터앉아, 나는 맥북에 일기를 몇 자 썼다. “K는 휴지를 종이 분리수거함에 버리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면 열댓병은 마시고, 화장실 불은 절대 끄고 나오는 법이 없고, 소변도 앉아서 보는 법이 없다” 예전의 일기가 보였다. 그 뒤에 몇 자 덧붙였다. 항상 말을 재밌게 해서 날 웃겨주고, 트위터에서 웃긴게 있으면 디엠으로 보내주고, 카페에 가면 내 빨대부터 까서 주고, 브런치를 먹으면 소세지를 잘라서 나를 먼저 준다. 갑자기 K가 너무 보고싶어졌다.



 함께 2년을 지내다보니 이젠 멋진 오해보다도, 번역된 문장들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종이박스 속에서 K가 버린 휴지들을 골라내는게 궁상스럽지만, 웃긴 이야기들을 들려줄 때 같이 웃는게 즐겁다. 다시 1년간 K의 기갈과 나의 허허실실이 반복되며 흘러가겠지만, 음양의 조화려니 생각하며 2020년도 잘 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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