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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o Hwang Apr 12. 2020

2018년 여름

무더웠던 퀴어 퍼레이드와 책 제작기

 2018년 6월. 남부 일부 지역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다. 그리고 얼마 안가 분당에도. 혹시나 싶어 에어컨을 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미지근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10년도 넘은 에어컨인지라 매년 비슷한 고생이다. 한 몇 주간 미지근한 바람이 나오다 갑자기 찬바람이 나오기 시작한다. 올 해엔 고쳐야할까 싶었지만 6개월 뒤엔 집 계약이 끝나니 그냥 있기로 했다.

 인스타그램을 보니 올 해 퀴어퍼레이드의 날짜가 보였다. 7월 15일. 올해는 비가 올까. 처음 퀴어퍼레이드를 참가했던 2016년에도, 그리고 그 다음 해인 2017년에도 퍼레이드날 비가 내렸다. 힘껏 스프레이로 세운 내 앞머리에도, 내 그림 엽서를 팔았던 학교 동아리 부스에도 비는 그리 달갑진 않은데. 올 해엔 잔뜩 인쇄할 내 책을 들고 가야했다. 제발 비가 안오길 바랐다.

 6월 한 달 동안 나는 퍼레이드에 가지고 갈 내 책을 편집했다. 약 4년간의 기록이 담긴 책이었다. 부산에서 상경해서 1.5평의 고시원에 틀어박히고, 혜화동에서 정자동으로 이사를 하고, 벽장에서 나와 처음으로 남자와 만나고 헤어졌던 이야기들. 낯뜨겁거나 별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일상의 문장들을 떼어놓았다가 때로는 붙여놓았다가 하다보니 어느새 내 인생이 퍽 마음에 들어버렸다. 그래서 그걸 하드커버로 포장해버리고 말았지만. 하드커버로 제본된 내 지난 4년이 악성재고로 쌓이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에어컨이 고장난 방에서 책 편집을 했다.

 한 달에 한 번, 다 같이 모여 맛있는 것을 먹는 <먹는모임> 친구들도 여름나기를 시작했다. 코알라는 얼마 남지 않은 노무사 시험 준비를 위해 하루종일 공부를 했고, 도요는 과수원의 자두 농사를 위해 김천으로 내려갔다. 너구리는 ‘초밥 만드는 고양이 게임’ 제작이 거의 끝나가 막바지 개발작업에 들어갔다. 호랑이와 팬더는 둘이 맨날 모여 포켓몬고를 하는 듯했다.

 일식당을 운영하는 애인은 퍼레이드가 끝나고 같이 갈 도쿄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인 가마쿠라에 가고싶다고 말했다. 아마 푹푹 찌는 여름이겠지만, 바닷가니까 기분은 시원하겠지. 영화에 나왔던 바다고양이 식당에서 잔멸치 덮밥도 먹어야겠다.


 마지막 에필로그를 다 쓰고나니 태풍이 불며 장마가 시작되었다. 비오는날 만들어진 책은 잘 팔릴까. 문득 이 집에 이사왔던 제작년 크리스마스쯤이 생각났다. 정릉에 사는 친구에게 두 번째로 차이고 나서 이삿짐을 실어 날랐던 비오는 이삿날. 손가락 두 개가 없으셨던 운전기사 아저씨는 비오는날 이사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했다. 난 근거없는 기대와 함께 책 파일을 들고 충무로 인쇄소에 책을 맡겼다.


 7월 초엔 도요가 자두 수확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자두를 양손 가득 들고서. 오는 길에 신사역 앞에서 봉지가 터져 자두가 사방 팔방으로 굴러다녔다고 했다. 지나가던 행인분들이 “아이고 맛있겠다~”라며 다들 주워주셨긴 했지만 우리 나눠주기에도 부족해 나눠드릴 순 없었다고. 그래서인지 자두 몇 개는 터진 상태였지만 달달한 자두 향이 카페 안에 가득 찼다.

 도요와 코알라는 바빠서 퀴어퍼레이드에 올 순 없다고 했지만, 호랑이와 너구리가 퍼레이드날 부스 설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안그래도 책이 무거워 혼자 시청 광장으로 들고갈 수 없었는데. 운전병 출신 호랑이가 쏘카를 빌려 실어 날라주기로 했다.

 8월엔 다 같이 강원도 홍천에 놀러가자고 팬더가 말했다. 내가 ‘이 책을 다 팔아재끼지 못하면 빚쟁이가 될텐데?’ 라고 말했더니 다들 남은 재고는 자기들도 같이 열심히 팔아주겠단다. 약간의 안도를 했다. 난 장맛비를 바라보며 <콜미바이유어네임>처럼 자두를 깨물어 먹었다. 그리고 퍼레이드 날엔 비가 그치길 기도했다.

 하지만 얼마 뒤 거짓말처럼 장마가 끝이났다. 1973년 이후로 두 번째로 짧았던 장마라고 했다. 그 날 바로 서울에 두 번째 폭염주의보가 내려졌고, 밤이 되자 서울의 첫 열대야가 발생했다. 에어컨은 여전히 먹통이었다. 속옷만 입고 누워있어도 땀이 나자, 한동안 집 앞 24시간 카페로 가서 시간을 때우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퍼레이드를 하루 앞두고, 드디어 내 책이 나왔다. 같이 충무로에 간 너구리에게 그 자리에서 책 한 권을 줬다. 자, 니가 첫 독자야. 그리고 축하의 의미로 인쇄소 근처 허름한 맥주집에서 치맥을 했다. 손님은 우리 둘 뿐이었고 치킨도 맥주도 평범한 맛이었지만 왜인지 계속 그 때가 기억이 난다.

 하드커버로 포장된 내 지난 4년은 생각보다 엄청 무거웠다. 박스 하나를 먼저 집에 들고 가려다 땡볕에 몇 번을 길에서 잠시 쉬어야했다. 친구들이 없다면 절대 혼자 광장에 들고갈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인은 식당을 쉴 수 없어 내일 점심에 잠깐 부스에 들러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잔돈과 돈통을 미리 준비하라고 일러줬다. 헉 잔돈이라니. 생각도 못했는데. 역시 장사 짬은 코로 먹는게 아니었다. 난 내일 도시락은 뭐로 싸줄거냐고 장난쳤다. 애인은 생각지 못한 도시락 이야기에 당황한 듯 했다.


 그리고 2018년 7월 15일 아침이 되었다. 호랑이와 함께 충무로 인쇄소 창고에 가서 책을 차에 실었다. 인쇄소 옆 식당 아주머니께서 식당 문을 열자 고양이가 걸어나와 기지개를 했다.

“얘는 아침마다 스트레칭 해”

내가 고양이를 빤히 보자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시청 광장이 막히진 않았다. 너구리는 시청 입구에 와있었다. 차에서 내려 반갑게 인사한 뒤, 너구리와 함께 책을 내리자 갑자기 한복 입은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다들 퀴어퍼레이드는 처음일텐데 고작 이것이 첫 인상이라니. 화났지만 애써 무시하고 부스 준비를 했다.

 너구리는 퍼레이드 진행표를 보더니 “레즈비언 밴드도 공연한대! 완전 궁금하다” 라고 말했다. 너구리는 지금은 1인 독립게임 개발자지만 고등학교때까지 교내 밴드 베이시스트였다. 어느날 레드핫칠리페퍼스 티셔츠를 입고 와 물어봤더니 가장 좋아하는 밴드라고 했다.

 호랑이는 상자에 쌓인 내 포스터들을 보더니, 미리 포장을 해둬야 나중에 덜 힘들 것 같다며 포장을 시작했다. 역시 꼼꼼하고 야무진 호랑이. 대충 책을 꺼내고 쉬고 있던 나와 너구리는 호랑이를 따라 포장했다.


“정호야, 여기 서 봐. 사진 찍어줄게”


 준비를 하다 말고 갑자기 너구리가 퍼레이드 배너 앞에서 불렀다. 난 호랑이가 사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어색하게 웃었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남아있는 이 사진은 내가 땀에 절기 전 찍힌 유일한 사진이 되었다. 그 사진을 찍고난 뒤부터, 퍼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사진같은 걸 찍을 생각도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으니까.

 부스를 열기 전에 퍼레이드 기획단 몇 분이 오셔서 책을 가장 처음 후원해주셨다. 사람들이 몰려 오기 시작하고, 날이 끔찍하게 더워지기 시작했고, 애인이 왔고, 도시락을 꺼냈다. 내가 괜한 장난을 쳤나!

 부스 안이 너무 비좁고 더워 호랑이와 너구리는 행사가 끝날 때 쯤 부스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는 놀러갔다. 점심이 지나고 팬더가 가족들을 데리고 부스를 찾아왔다. 난 팬더에게 책을 한 권 주고, 팬더의 가족분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회사 동료 직원들도, 친한 게이 형들도, 인스타그램 이웃들도, 학교 같은 과 후배들도, 정말 다 적지 못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부스에 들렀다. 정말 정신은 하나도 없었고, 땀은 비오듯 쏟아졌고, 오후엔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 날부터 열돔현상이 본격화되어 동아시아 전체가 엄청난 폭염에 시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애인의 도시락은 몇 입 먹지 못하고 쉬어버렸다. 그리고 애인은 이 일을 두고두고 말하며 앞으로 너에게 다시는 도시락은 없다고 선언했다.


 정말 어떻게 버텼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행사가 끝나고 처음으로 부스 밖으로 나왔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그리고 저 멀리서 호랑이와 너구리가 짐정리를 도와주러 달려왔다. 이번엔 눈물이 핑 돌았다. 태어나서 본 성소수자라고는 나 하나뿐이었을텐데. 아무렇지 않게 아침부터 나와서 책도 나르고 포스터도 포장해주고 너무 고마워. 우리 셋은 함께 택시를 타고 정자동으로 가서 저녁밥과 술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가장 뜨거웠던 퀴어퍼레이드는 그렇게 끝이 났고, 2018년의 폭염은 9월이 되어서야 가라앉았다. 내 에어컨은 왜인지 퍼레이드 다음주부터 정상 작동이 되기 시작했다. 뒤늦게 오신 수리기사 아저씨께서 실외기의 문제였다며 수리를 해주셨다. 비록 이 집에서 다시 여름을 맞이할 일은 없겠지만.

 도요의 과수원 나무들은 2018년 여름이 지나고 모두 수명을 다했다고 했다. 우리가 먹었던 자두가 그 나무들의 마지막 자두였다. 지금은 새로운 나무들로 바뀌어 다시 잘 자라고 있다. 코알라는 결국 노무사 시험에 합격해 우리에게 명함을 나눠줬다.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면 무조건 핸드폰으로 녹음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너구리의 ‘고양이가 초밥을 만드는 게임’도 무사히 출시되었고, 호랑이도 극장 영사기사 시험준비를 하고 있다. 나와 애인은 가마쿠라로 여행을 다녀왔고, 잔멸치 덮밥을 먹었고, 먹는모임은 홍천에서 하계 엠티를 했다. 우리 모두 여름을 지나 가을로, 또 내년 여름나기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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