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와 화분과 복권
도요가 급하게 집들이를 열었다.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맛있는 것을 먹는 <먹는모임> 단톡방에. 성북동 새 집으로 이사한 뒤로 새 집에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었다. 아쉽게도 나와 코알라만 시간이 맞았다. 너구리와 호랑이는 전라도 고향에, 팬더는 주말출근을 했다.
도요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겠다고 하니, 갑자기 코알라가 자기도 끝내주는 음식 만드는 법을 알게됐단다. 아직 방 가스렌지도 연결하지 않은 요리와 담 쌓은 나는 곧 맛볼 2가지 맛있는 음식에 입맛을 다시며 나갈 채비를 했다.
코로나로 인해 두 달이 넘는 재택근무중이라, 오랜만의 외출에 신이 났다. 아침부터 나갈 때 입을 옷을 건조기에 돌려 먼지를 털어냈다. 그러고는 성북동 근처 꽃집을 검색했다. 그래도 분당으로 오기 전 1년을 살았던 곳인데 기억나는 꽃집이 없다. 집 뒷편에 있었던 약간 사치스러웠던 나폴레옹 빵집과 그 맞은편의 3천원짜리 단골 닭강정 포장마차, 곰팡이가 부끄러워서 애인에게 차마 들어오라 할 수 없었던 내 자취방과 언덕 위 고급 주택들은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데. 화분은 먹어치우기엔 너무 딱딱하고, 꿈꾸기엔 너무 사소했다.
작년즈음부터 집들이에는 항상 식물을 선물한다. 작년에 이사를 오고 처음 식물을 선물받은 후로, 식물이 주는 사소한 감동을 알게된 탓이다. 성북동 근처 꽃집에 들어가니 입구 바로 맞은편의 화분이 가장 눈에 들어왔다. 갈색 예쁜 토분에 한쪽으로 흘러내리는 듯한 줄기의 식물.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학 자스민이라고 하신다. 얼마 전까지 꽃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지고 한 송이만 남아있다고. 자세히 보니 아래쪽에 흰색 예쁜 꽃이 한 송이 피어있다. 큰 고민 없이 그 화분을 사서는 도요를 만나러 갔다.
나폴레옹 빵집 앞에서 도요와 코알라를 만났다. 화분을 도요에게 건내주자 빈손이었던 코알라가 당황했다. 우리 셋은 요리 재료를 사러 근처 슈퍼마켓으로 갔다. 스칼렛요한슨 파스타를 해준다던 도요는 깐 마늘과 파스타 면 등을 샀고, 투움바 파스타를 해준다던 코알라는 왜인지 신라면을 샀다. 재료를 계산대에 올리는데 갑자기 코알라가 나가서 두루마리 휴지 한 상자를 들고 온다. 집들이 선물이라고 한다. 그러자 슈퍼마켓 아주머니가 말한다.
“이 아가씨 집들이 선물이야~? 그럼 이거 말고 저걸로 사드려. 여자는 젤 좋은 휴지 써야해. 아가씨도 알겠죠? 다음에 살 때도 제일 좋은 휴지로 사요. 남자는 뭐 아무거나 써도 상관 없지만 우린 그래야돼. 어차피 이거나 저거나 나한테 떨어지는 건 똑같다구”
코알라는 아주머니 말에 따라 슈퍼에서 가장 좋은 휴지를 선택했다. 도요가 빙그레 웃으면서 휴지를 받았다.
도요의 집은 도요의 깔끔한 성격 덕분인지 내가 본 자취방 중에서 가장 깨끗했다. 사온 화분을 거실 테이블에 올려 놓으니 이미 주위에 화분이 여럿 보였다. 뒷편엔 턴테이블과 LP판, 발뮤다 스타일의 보다 저렴한 토스트 오븐, 그리고 예쁜 액자가 있었다.
“내가 본 자취방 중에서 젤 멋지다 도요야”
나와 코알라가 감탄하자 도요는 활짝 웃으며 LP를 틀고는 스칼렛 요한슨 파스타를 만들었다. 코알라는 아니나 다를까 정말 신라면과 우유로 투움바 파스타를. 도요의 파스타는 정말 맛있었고, 코알라의 파스타도 억울할 정도로 맛있었다. 우린 부른 배를 만지며 코알라의 소개팅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다들 봤어? 거기에 보면, 기초수급 자금으로 주는 것중에 화분이 있거든. 난 그게 좀 인상깊었어.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에 화분을 넣었다는게. 근데 이렇게 식물을 키워보니까 그게 이해가 되더라구. 화분은 사는데 꼭 필요한 것 같아”
도요가 내가 사온 학자스민 줄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코알라는 마지막 남은 피자 한 조각을 집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먹는모임>이 같이 살 집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성북동 주택은 얼마나 할까. 10년 후쯤엔 6명이 돈을 모아 같이 살 집을 마련할 수 있을까. 너구리가 만드는 게임이 대박이 난다면 한 번에 해결이 될텐데.
작년 시월쯤, 내 꿈을 꾸셨다는 이웃 분에게 꿈을 사고는 호기롭게 복권을 샀다. 기분이다 싶어서 애인 줄 다쿠아즈도 한 상자 샀더랬다. 1등이 14억쯤 되려나. 그 돈이면 <먹는모임> 집도 살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주 토요일, 어머니 항암치료가 일단락 되고 오랜만에 호랑이가 상경했다. <먹는모임> 친구들이 모두 혜화에 모였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명거리엔 마라탕집이 하나 건너 하나씩 생겼다. 좋아했던 타코집은 사라졌고, 1년에 한 번 꼴로 바뀌는 식당 자리엔 이번엔 짬뽕집이 들어와있었다. 10년 전이나 그 때나 혜화는 밥먹을 곳을 고르는 것이 힘들었지만, 도요가 사장님이 잘생긴 이자카야를 발견했다고 해서 간단히 식사를 했다.
생각보다 맛있는 음식과 생각보다 맛없는 하이볼을 먹고 마신 뒤, 학림카페에 가서 8시 마감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수다를 떨었다. 그 때에도 나는 8시에 곧 받게 될 14억으로 어디쯤의 집을 살 수 있을지 이야기했다. 그 때 너구리가 갑자기 오늘 잠실 불꽃놀이를 하는 날이라고 말했다.
“낙산공원에 올라가면 불꽃놀이 보일까?”
“당연히 보이지! 올라가자 우리! 올라가서 내 복권 맞춰보면 되겠다”
혜화에서 몇 년을 학교를 다녔으면서 한 번도 낙산공원에 안올라가봤다는 너구리를 데리고, 다들 정상에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꽤 올라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와. 얼마 전에 본 체르노빌 드라마같아”
너구리의 말에 다들 피식 웃었다. 8시가 되자 나는 주머니에서 복권을 꺼냈다. 팬더가 카메라 후레쉬를 켜줬다. 2와 6. 복권은 번호 두 개를 제외하곤 죄다 빗나갔다. 아쉬웠다는게 코미디라면 코미디. 복권에 대한 기대도 불꽃놀이도 금새 시들하게 꺼졌다. 그리고 마지막, 누가봐도 가장 화려한 불꽃이 쏘아올려졌다. 팬더가 외쳤다.
“한화 공채 많이 지원해주세요~”
팬더의 농담을 마지막으로 우린 낙산공원을 내려왔다. 그렇게 거대한 허무와 위트 사이에서 그 날의 먹는모임은 끝이 났다. 그 후 팬더는 정규직이 되었고, 가을에서 봄이 되었다. <먹는모임>도 이제 어느덧 햇수로 6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