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 괴는 여자 20. 쉬어가는 장
2019년 10월 12일의 일기
'우린 성격이 똑같아서 오래 붙어있으면 안 돼. 간만에 만나야 애틋하고 피차 좋아.'
엄마랑 내가 즐겨하던 농담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게 될 줄 모르고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었다. 초등학생 때 4주나 되는 캠프를 씩씩하게 다녀오고 고등학교 3년을 기숙사에서 생활했지만, 마산에서 서울까지 훌쩍 뛴 거리감은 아무래도 적응이 어렵다. 뭐든 알아서 잘 해내는 딸내미로 19년을 살아왔는데, 외로움이 탈이 될 줄이야.
개강을 3일 정도 앞둔 날, 엄마와 아빠는 먼 거리를 운전해 나를 기숙사에 데려다주셨다. 나는 가는 길 내내 실없는 농담이나 했고 방에 짐을 넣어주고 떠나는 두 사람을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엄마가 ‘우리 가고 나서 읽어’하고 주고 간 편지봉투를 받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도 편지를 받았으니까. 그때는 울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혼자 짐을 다 풀고 난 뒤 편지 봉투를 집 어 들자마자 눈물이 터져버렸다.
중학생 때, 영어학원이 밤늦게 끝나면 학원 차가 서는 곳에 아빠가 늘 마중을 나왔던 게 생각난다. 그때 나는 사춘기를 통과하는 중이었고, 그래서 순하고 다정한 분위기를 못 견뎌했었다. 그래서 괜히 아빠한테 이상한 컨셉으로 시비를 거는 게 일상이었는데, 예를 들어, 아빠에게 돈 좀 있냐고 묻고 아빠가 없다고 대답하면 헤드락을 거는 식. 도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되는 흑역산데, 아무튼 대화를 잃기 직전이었던 우리 둘 사이에 그런 밤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빠는 돈을 가지고 나와놓고도 '없으면 어쩔 건 데’하면서 한술 더 뜨기도 했었다. 그러면 나는 모른 척 가짜 화를 냈다. 아빠가 가짜 항복선언을 하며 이천 원을 꺼내면 우리 둘은 슈퍼로 가서 소시지와 주스를 샀다. 소시지는 대부분 그 자리에서 바로 까먹었고 주스는 집에 도착해서 마셨던 기억이 난다. 아 빠는 밤에 뭘 먹는 타입이 아닌데도 굳이 한 입만 달라는 말을 얹곤 하셨다. 나는 아빠의 말을 끝까지 모른 체하는 장난을 하기를 좋아했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나무와 풀이 그렇게 많았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검은 초록들 사이에서도 나는 하나도 쓸쓸하지 않았다.
아빠와 내 사이는 내가 사춘기를 무사히 통과한 뒤에도 여전히 이런 식이다. 이제 몸으로 부닥치며 노는 건 자주 하지 않지만 말로는 늘 시비를 걸고 투닥거린다. 이렇게 아빠가 편한 덕분에 나는 고민들을 종종 아빠에게 털어놓게 되고, 그러면 아빠는 내게 맞춰주느라 일부러 바꾼 목소리를 내려놓고 본래의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이제야 내신다.
그리고 아빠가 그 밤마중을 나보다도 더 즐거워했었다는 걸 편지를 받고 나서야 알게 됐다. '아빤 그때가 행복했어. 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정하게 길을 걷고, 함께 이야기하며 친해질 수 있었으니까.’
어렸을 적 사진을 모아놓은 앨범을 펼치면 맨 앞장에 초음파 사진이랑 아빠를 축소시켜 놓은 것처럼 생긴 갓 태어난 내 얼굴이 있다. 한 장을 넘기면 방 하나에 풍선을 가득 채워놓은 사진들이 있다. 풍선들 아래로는 한 주먹도 안 되어 보이는 나를 안고 있는 할머니가 있다. 엄마, 아빠, 할아버지, 이모들도 있다. 그 방은 할머니 댁에서 보일러가 가장 뜨끈하게 돌아가는 곳.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곳. 그래서 나는 앞으로 그 방을 가장 사랑하게 된다. 풍선 위에는 나를 '아가'라고 부르는 편지들이 있다.
-아가야! 네가 생활할 이 공간에 온 걸 모두가 축하하고 있단다. 건강하고 무럭무럭 자 라거라.
-우리 애기 정말 너무 귀엽다.
-아가 네가 태어나던 날 이모는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널, 이 세상에 태어난 널 환영하는 거란다.
-이 세상에 나온 걸 진심으로 축하해.
나는 다 부푼 풍선 위에다 대고 빼곡한 글자들을 쓰느라 조마조마한 마음이 되었을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큰언니의 첫 딸을, 언니를 닮은 구석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는 그 얼굴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그려본다. 아직은 어리고 아직은 젊었던 그 사람들을 상상해본다. 분명 내 눈동자에 닿았던 얼굴들일 텐데. 하나도 선명하지가 않아서 서러워진 다.
그때의 이모들은 지금의 나보다 고작 한 두 살이 많았다. 아직도 내 기저귀 갈아주던 이야기를 하는 큰이모와 내가 삐지기라도 하면 어쩔 줄을 몰랐다는 막내이모. 두 사람의 첫 조카인 나는 이모들에게 아주 특별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런 특별함이 묻은 세월이 나를 키웠다.
나를 환영하던 그 방은 세 생명을 더 맞이한다. 나와 내 동생 그리고 큰이모네 두 동생들. 우리는 서로 나이차가 크지 않아서 유치하고 시끄럽게 잘 놀았었다. 할머니댁에 모이기만 하면 누가 마당의 낙엽을 빨리 쓰는지 대결을 하기도 했고 바깥 부엌 쪽으로 이어지는 모퉁이를 돌며 잡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나한테 사춘기가 오면서 대결이든 놀이든 시시해진 탓에 내가 다락방 안에만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머지 셋은 그걸 서운해하지도 않고 나를 빼놓고 또 다른 한 덩어리가 되어서 잘 놀곤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 막내 이모네 두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이 4인 체제는 개편되었다. 막내 이모가 첫 아이를 낳고 병원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자고 있는 걸 넷이서 지켜보던 때가 있었다. 그래도 제일 큰 애라고 그랬는지, 그 순간 나는 어떤 시절이 끝이 났음을 알아챘다. 이모의 작고 작은 아기를, 이제는 우리가 끝도 없이 사랑해 줄 차례라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할머니 댁에서 다 같이 식사를 할 때면 사람이 너무 많아 어른들 밥상과 애들 밥상을 따로 차린다. 스무 살이 되고 맞은 설날에 나는 어른 밥상에서 맥주를 마셨었다. 애들은 어느새 저기로 가 술을 벌컥벌컥 마시는 나를 보면서 '언니 신기하다', '누나 잘 마신다 '하며 다 들리게 속닥거렸다. 눈이 마주치자 딴청을 피우는 게 너무 귀여워 뽀뽀를 좀 했더니 애들이 술냄새난다고 저리 가라며 깔깔거렸다.
서울로 오기 전의 설날은 여러 가지로 어수선했던 것 같다. 막내이모네 아기 동생들은 몸으로 치받아 놀아주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아 했고 그렇게 거실 한편은 난장판이 됐었다. 내 주특기는 말놀이였다. 아가들이 교대로 내 등에 올라타면 내가 기어가며 거실을 돌다가 마지막에는 애들을 푹신한 이불에 던지다시피 안착시키면 된다. 애들은 내가 정말로 '에잇' 소리를 내면서 자기들을 던져버리는 줄 알았겠지만 나는 작은 머리통들을 감싸 받치느라 손이 벌겠다. 둘 중 하나가 거실을 다 돌고도 이불로 가지 않겠다 떼를 쓰면 내가 기는 내내 같이 걷던 다른 하나가 바로 비키라고 화를 내는 식으로 싸움이 터졌다. 그래서 내가 순서를 기억하고 다독이는 게 아주 중요했다. 열 번 정도를 하고 나니 다른 동생들이 다락방으로 아가들을 데리고 가줬다. 그 틈에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 어수선함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소파로 가 그 사이에 축 처져 앉았다. 애교를 피울 요량으로 두 사람의 손을 하나씩 잡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할아버지는 손을 더 꽉 잡아왔다. 저편에서 왁자지껄 난리가 난 와중에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다른 어른들에게 괜히 소리쳤다. “이것 좀 봐봐. 이 둘이 내 너무 사랑한다. 우짜면 좋노!” 내가 손을 놓는 시늉을 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을 다시 잡아왔다. 이걸 몇 번 반복하는 상황극을 보고는 어른들은 크게 웃었는데 나는 서글퍼졌다. 오래도록 손을 놓지 못하는 마음을 장난스레 지나쳐야 하는 게. 모든 장난은 내가 시작한 것인데도.
할머니는 4년 잘하고 다시 오그라이, 하셨고 나는 고집을 피울 수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옆에서 '에이, 할머니. 누나 큰물에서 살게 해 주라.' 하며 너스레를 떠는 걸 급하게 말리기도 했다. 밤이 되고 나는 거실에 누워 잠을 청했다. 오른쪽에는 할아버지가, 왼쪽에는 할머니가 누웠다. 불을 끄기 전 여러 사람이 씻고 나오느라 산만한 분위기 속에서 이모들과 동생들이 한 번씩 내 옆을 다녀갔다. 나는 그들에게 팔베개를 해주면서 이런저런 응원들을 새겼다. 불이 꺼지고 나는 할아버지의 품 속으로 들어가 잤다. 할아버지가 내 등을 도닥거리는 리듬을 오래 기억하려고 애쓰던 밤이었다. 서로 다른 마음들은 사실은 전부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할매가 해준 장어국에 계란후라이 딱 해서 먹으면 진짜 맛있는데.'
짧은 전화에 아무 의미 없이 뱉은 말 때문에 할머니는 내가 서울에서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나는 아주 나중에 엄마에게 이 얘기를 전해 듣고는 펑펑 울었다.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너무 멀었다.
나는 다섯 살 때 창원에서 마산으로 넘어왔다. 창원, 마산을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 둘을 구분하는 게 의아하겠지. 마산, 창원, 진해가 '통합 창원시'라는 이름으로 합쳐진 게 내가 열한 살 때다. 갑자기 사는 곳의 명칭이 바뀌어 어리둥절했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왠지 자존심이 상했었다. 태어난 곳은 창원이었고 양으로 따져도 창원에서 산 시간이나 마산에서 산 시간이나 비등비등했는데도 나는 통합시의 이름이 마산이 아닌 게 분했다. '우리 동네'라는 감각이 마산에 온 뒤로 완성된 까닭이다.
유치원 종일반에 나밖에 남지 않아 심심했던 시간도, 학교가 끝나고 경찰서를 지나 집까지 오던 길도 전부 마산에서 쌓은 기억이다. 우산을 들고 오지 않아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달리던 하굣길, 엄마가 미리 돈을 내서 들어가 인사를 하고 먹기만 하면 됐던 김밥집, 어쩌다 같이 하교한 친구의 집으로 가 얻어먹은 토스트, 메뉴가 자주 바뀌던 식당, 지금은 없어진 그 옆의 단골고깃집. 빨리 적응한 두발자전거를 까불면서 타다가 결국엔 넘어진 날,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다가 옆집 강아지한테 물릴 뻔한 날, 처음 산 mp3를 들고는 무작정 혼자 걸어본 집 앞 놀이터, 새 피아노 교재를 받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마구 뛰던 길, 흰색이 없어서 보라색으로 산 폴더폰을 가리려고 돌아다닌 케이스 가게들, 용돈 받는 날에 무조건 향하던 닭꼬치 집. 동생과 엘리베이터에 갇혀서 엉엉 울던 일, 이후로 한동안 엘리베이터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계단으로만 다니던 것, 유치원 버스에서 내린 동생이 자고 있어서 그대로 애를 업고 계단을 오르던 날. 태권도장에서 합숙하며 본 영화가 자꾸 생각이 나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밤들과 다니다 그만둔 미술 학원 원장 선생님을 길에서 마주치고 눈물이 날 것 같던 날, 글짓기 학원 선생님이 아무 때나 와도 된다고 해서 정말로 매일 가 책을 읽었던 것, 자주 가던 비디오 가게가 문을 닫는 걸 지켜보던 날, 집으로 가는 길과 이어진 폐철로에 괜히 올라타 걸어보는 마음. 이 모든 게 '우리 동네'니까.
나는 고등학교에 가고 나서도 마산이나 진해나 이제 창원시 아니냐는 친구들의 말에 발끈하곤 했다. 새로 지어질 야구장의 이름을 두고 앞에 '마산'을 붙일지 '창원'을 붙일지를 결정하는 어른들의 세계가 뉴스 기사로 흘러나올 때마다 그게 유치하다 생각하면서도 '마산 구장'이 되기를 내심 바랐다. 그건 그냥 괜한 말다툼, 괜한 치기는 아니었다. 분명히.
서울은 부딪혀 보기 전부터 막연히 두려웠다. 서울로 수학여행을 온 적도 있고 가족여행이나 대입면접을 위해서 와보기도 했지만 그건 전부 혼자 겪은 것들이 아니었다. OT에 참석하겠다고 홀로 서울을 향하던 KTX 기차 안에서 나는 ‘일단 해보자, 그냥 해보자.’ 하며 자꾸 마음을 다그쳤다. 떨지 좀 말라고. 남들도 다 하는 거라고. 도착도 전에 벌써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빨리 내가 아는 길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니까, 너무 익숙해서 아무런 마음도 태어나지 않는 길. 가야 할 곳으로 걷기만 하는 길. 바람이 불든 말든 코트를 여미기만 하면 되고 쓸쓸하다는 상념이 끼어들 틈은 전혀 없는 길. 하도 자주 다녀서 그 길 말고는 다른 길은 상상이 안될 지경에 얼른 이르고 싶었다. 어쩌다가 다른 길을 발견하게 되어 가끔 그 다른 길로 둘러가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날들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우르르 다가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자꾸만 땅을 보고 걷게 됐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저 수많은 사람들처럼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바쁘게 걷기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지하철에서 잠들었다가 텅 빈 칸 안에서 혼자 눈을 떴다. 지하철이 고장 문제로 정차했는데 그 안내방송을 못 듣고 사람들이 다 나갈 때까지 자고 있던 거다. 너무 당황해서 사람을 찾아보려고 다른 칸을 돌아다녀봤는데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예전에 어떤 만화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람들이 전부 사라지길 원한다는 소원을 빌었다가 그게 실현되어 되려 외로워지는 에피소드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갑자기 떠올랐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이 도시에서 사라지길 바란 거지, 나만이 남길 원한 게 아니었다. 깨워주지 않은 사람들을 차마 원망도 못하고 누구든 찾고만 있던 건 나인데. 나는 그래서 외로운 건데. 곧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내가 있던 칸으로 들어와 고장 때문에 다음 차를 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그 사람은 곧장 다음칸으로 떠났다. 나처럼 혼자 눈을 뜬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길이었겠지. 마음이 침잠하는 과정은 차분하게 이루어지는구나.
매사에 나대고 깔깔거리던 내가 인생 처음 고요를 맞이한다. 좋아하는 것들과 싫어하는 것들이 완전히 뒤바뀌는 불확실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만큼 고집부리는 일이 잦아지고, 그럴수록 내 안의 선은 자꾸 짙어지고 자주 부러진다. 어떻게든 쳐낸 발버둥이 하나도 멋스럽지가 않아서 슬프다.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 그리고 그 자체로 나는 격동을 지나고 있다. 견딘다는 감각이 무언지를 이렇게 알게 된다.
2020년 2월 12일의 일기
작년 스무 살 끝무렵, 별 기대 않은 학교의 홈커밍 프로그램에서 뜻밖의 인물을 봤었다. 나중에 스무 살이 되면 살 옷들을 골라 놓겠다고 중학생 때 자주 쓰던 어플의 대표 이사.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뭐가 그렇게 재밌기만 했던 마산에 살던 여자애가 생각나서 아득한 기분이 되었다. 같은 행사에서 본,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다던 동문 선배는 스물여덟이라고 했다. 나도 그 나이에 닿으면 나중에 내가 뭘 하고 살지 괜히 심각한 척했던, 마산에 다시 가고 싶어서 자주 울던 스무 살 여자애를 떠올리게 될까.
나는 이제 내가 아는 길들을 걷는다. 그렇다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바쁘게 걷기만 하지는 않는다. 바람이 불어오면 마산은 춥지 않은지 묻는 전화를 건다. 지하철에서는 절대 졸지 않게 됐지만 나는 이제 안내방송이 없어도 눈치껏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나는 더 이상 땅만 보고 걷지 않고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우르르 다가오는 사람들 중 아는 얼굴을 마주쳐 반갑게 인사하기도 한다.
나는 가라앉은 마음이 다시 햇빛을 찾는 과정 역시 차분하게 이루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 수많은 타인들과 낄낄거리다가 돌아온 방 안에 앉아 내 안의 고요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완벽히 좋아하는 것과 완벽히 싫어하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나의 발버둥을 어설프게라도 안아주는 사람들을 찾았다.
엄마가 편지에 썼던, 우리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멀어도 마음의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깝다는 말을 붙들고 살지 않아도 언젠가 저절로 깨닫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떠나온 곳을 붙잡아두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주 연약한 뿌리로라도, 나는 이 땅에 발 붙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앞으로도 나에게 주어질 낯선 동네들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을 거라고 믿게 됐다.
아주 오랜만에 집에 갔던 어느 날. 밤늦게 도착한 나를 가운데 두고 엄마 아빠는 이것저것을 계속 물었었다. 내일 출근이니까 빨리 주무시라고 하는 내 말을 듣고서야 둘은 잘 자라는 인사를 해왔다.
3일 정도를 머무르고 다시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창가에 바짝 붙어 이름을 잃어가는 나의 오랜 동네를 내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전에 공원으로 변신한 집 앞의 폐철로가 온통 푸른빛인 걸 보고는 눈물이 났다. 저 길에는 나의 유년기와, 나와 내 동생 몫의 어린 날들을 지키려 애썼던 엄마와 아빠의 한 시절이, 누군가의 젊은 날들과 언젠가 뜨거웠던 어느 시대가, 이제는 멀어져 사라지는 것들이 늘어져 있을 것이었다.
그 모두에 안녕을. 사랑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