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 괴는 여자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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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가 ‘이상한’ 나라라는 걸 알았는데도 ‘이상하게’ 나는 계속 외로웠다. 그래서 정확하게 외롭기 위해 고군분투를 좀 해야 했다.
처음엔 연애를 못해서, 모솔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고군분투의 결과, 그 외로움은 내 옆에 연애 상대가 없다는 데에서 오는 상실감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니, 평생 없던 상대가 이번에도 없다고 그게 빈자리인 줄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느낀 빈자리는 친구들의 몫이었다. 공교롭게도 가까운 친구들이 대부분 연애를 시작했고, 그래서 나는 다들 연애하러 떠난 땅에 혼자 남아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외로웠고, 연애하지 않으면 외로워야 한다고 배운 탓에 이 외로움의 근원이 연애라고 믿는 데에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느라 더 외로웠다.
이건 그냥 쿨한 척이고, 나는 사실은 친구들이 연애하느라 나에게 신경 써주지 않았다고 징징거리고 있는 것인가? 두 가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1. 스무 살 때 친구들이 모두 연애를 하지 않았다 해도 나는 외로웠을 것이다. 나는 성인이 되고 서로로부터 조금씩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에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세상은 연인 또는 타인으로 정리되고 있을 때 나의 세상은 여전히 그들로 움직이는 그 엇갈림. 나는 외롭기만 해도 됐을 시기를 괴롭게도 보냈다. 스무 살이 되고 각자의 삶이 조금씩이라도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그 모양에 나는 무척 당황했었다. 그리고나서는 이제 모두가 각자의 트랙을 달리고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게 되었음을 인정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만 연애하지 못하는 나를 탓해버리고 말았다. 연애공화국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겠지만 내 마음은 처음 겪는 일이었고, 때문에 나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말았다.
2. 스무 살 때 내가 연애를 했어도 나는 같은 상실을 느꼈을 거고 외로웠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 연애를 했다면 이런저런 새로운 감정들에 대해서도 알게 됐을 거고 연애 상대가 주는 기쁨이 인생에 첨가되면서 한편으로는 무척 풍요로웠을 것이다. 내 삶에 새로운 챕터가 쓰이는 그런 재미. 하지만 기존에 내 삶을 이루고 있던 챕터가 닫히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쓸쓸했을 것이다. 성인이 되기 이전의 시절은 이미 끝났다는 걸, 그때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순간이었다는 걸 깨닫는 것은 시작되는 연애들과 무관하진 않더라도,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니.
스무 살 그 여름이 다 지났을 때. 연애를 이어가는 친구들도 있었고, 그 안에서 사랑을 찾은 친구들도 있었고, 게임 종료를 선언한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여전했다.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다시 모든 걸 공유하는 사이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거든. 나는 여름 내내, 우리가 부둥켜 살았던 시간은 전부 지나갔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각자 가꾸어나가는 삶과 가끔 마주치거나 기대는 교차점들이 앞으로의 우리라는 걸, 그리고 그걸로도 충분하다는 걸 피부로 안 이후였다. 그래서 괜찮았다. 이제 외롭지 않았다. '연애'를 걷어내고도 외롭고 괴로웠던 마음이, 연애가 아니라도 우리 모습이 옛날과 똑같을 순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환해진 거다. 이리저리 헤매던 앨리스는 결국 답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굴 밖으로 나가는 통로를 찾진 못했다. 이 세계의 '연애'란 누구나 해야 하고 아무도 피해 갈 수 없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연애하지 않는 자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냥 추방시키면 되지 않나 싶기도 한데, 이 세계는 그것 역시도 용납을 못한다. 그냥 모두가 연애를 해야 하고, 그 선택지밖엔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냥 나간다고요. 안돼, 나가진 못해. 그럼 어쩌라고요. 그냥 연애를 하라고. 싫다고요. 하라고. 아 쫌!!!
생각해 볼 것. 이 세계는 끊임없이 '연애'를 조장하고 있다. 여기 사는 모두가 연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거의 매일 이용하는 SNS에는 '연애 잘하는 꿀팁', '썸에서 연애로 넘어가는 과정', '여자들이 남친 에게 바라는 것 Top 10', ' 남자들에게 인기 많은 여자 특징' 등의 제목을 한 게시물들 이 쏟아지곤 한다.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만을 전제로 하는 것은 물론, 세상 수많은 사람들의 개성과 특징은 거세된 채 그 게시물들엔 오직 '여자를 설레게 하는 남자'와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만이 존재한다. 특이한 점은 연애에 관한 이야기는 연애를 하는 중인 사람들보다 연애를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필수로 취급된다는 것일 테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연애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고 어떤 말투를 장착해야 하는지가 '꿀팁'이라는 이름으로 나동그라진다다. 왜? 이들은 현재 연애를 하지 않을 뿐 언젠가 연애를 할 거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연애를 하지 않으면 분명히 외로워서 당장 어떻게든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일 거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 전제는 아무리 새로고침을 해도 질기게 화면에 붙어있다. 한바탕의 아연한 목도가 끝나면 나는 그 언젠가의 내 결론과는 상관없이 이 세계가 멀쩡히 살아있는 게 느껴져 아주 멋쩍어지곤 한다.
사실 앨리스가 이 지긋지긋한 연애 공화국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꿈에서 깨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붉은 여왕이 나를 계속 붙잡는 거다. 정말로 혼자여도 괜찮니? 물어온다. 사실은 연애가 필요한 게 아니니? 속삭여온다. 머물기 위해서 힘껏 달려야 하고 다른 곳을 원한다면 그보다 두곱은 더 빨리 달려야 한다는 이상한 규칙은 이제 나를 향해 온다. 모두가 연애하는 세계, 그것도 모두가 비슷한 매뉴얼로 연애하는 세계에 떨어진 앨리스는 이 상황을 자신의 선택으로 어떻게든 타파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 어떤 선택도 완벽할 수 없다는 현실에 부딪히고 만다.
1. 앨리스가 솔로여도 상관없다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길 택한다면, 그는 연애하는 모두를 힘껏 놓아주어야 한다. 모두가 연애하는 세계에서 혹은 모두가 연애하려 하는 세계에서 앨리스가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없다. 그러니 앨리스는 그 세계에서 정말로 '타인'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이상한 세계의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가 어쩌면 이상하다는 걸 모른 채 오직 앨리스만을 연애하지 않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테니까.
2. 앨리스가 연애를 택한다면, 무대에 올라가 연기를 하는 것과 다름없는 연애는 피하고자 노력할 거다. 그렇다면 그는 다름 아닌 사랑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각본 없는 연애를 피하자고 연 애 전부를 등진 채 사랑을 찾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잖아. 무엇보다 이 세계는 ‘사랑을 찾으려면 일단 연애를 해야 되나' 하는 생각을 '아, 연애해야 되는데. 어쩌지?' 하는 조급함으로 번지게 만드는 괴이한 힘을 가지고 있는 만만찮은 세계. 나는 각본 없는 연애를, 무대 없는 역할을 원해. 그렇지만 이 이상하고 화려한 세계에서는 영영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아 슬프다.
내가 재난 같은 사랑을 만나게 될지, 받아놓은 욕조 물 같은 사랑을 만나게 될지, 각본에 충실하길 설득하는 세상을 반대로 걸으려다 끝내 충돌을 겪게 될 것인지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찾아오는 사랑 없이도 충만했다고 삶을 회고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든 나는 뚜벅뚜벅 어색하게나마 걸어가야 할 테다. 언제나 6 시인 모자장수의 시간처럼, 몸이 사라지고도 한참 남아있는 체셔 고양이의 웃음처럼, 나는 그렇게 부단히 살아가야 할 테다. 그것 말고는 이 이상한 나라의 줏대 있는 앨리스가 달리 웃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