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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가계도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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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삼 Mar 01. 2024

울프, 고모

<가계도> 1일차 - 6

 점심 식사를 하기로 정한 식당 앞에서 기웃대고 있었을 때였다. 옆의 다른 손님이 “30분부터래요” 하고 일러주었다. 나는 감사합니다, 했고, 우리는 웃음을 주고받았으며, 나는 알고 있었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은 채였다. 

 11시 30분이 되어 문을 연 식당에서 나는 밥과 된장국과 고기와 김치와 깻잎과 쌈무와 샐러드를 한상으로 주는 메뉴를 먹는다. 딱 1인분의 식사를 하며, 나는 책을 꺼내 읽는다. 제목은 <런던 거리 헤매기>. 

 작가는 연필을 사야겠다는 명목으로 런던 거리로 나선다. ‘자기만의 방’을 남겨두고 우선은 멀어진다. 친구들이 아는 자아를 떨친 채로 거리를 걸으며, 건물과 불빛을 관찰한다. 그녀는 지나치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와 소망을 마음껏 상상할 줄 아는 사람이고, 우연히 들려오는 구절에 어떤 생애를 지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아가 1월 도보 위에 서 있는 이것인지 6월 발코니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저것인지 헷갈려하고, 우연히 만난 타인에게 자신이 짓고 무너뜨리는 방 안의 따뜻한 난롯가 자리를 내어준다. 

 그리고 런던 거리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내 입은 계속 밥을 씹고 국을 마신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 신체와 정신은 함께가 아니다. 내 마음은 런던에 가 있고 내 몸은 경주에 앉아 식사를 하는 중이다. 


  분명 연인들 사이에 서서는 하나도 외롭지 않았는데 친구들 무리가 혼자 밥을 먹는 내 옆을 지나갈 때는 내가 자그매지는 기분이 들었다. 연인인지 친구인지 그 구별은 서로의 호칭 정도를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냥 동네도 아니고 관광지에서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은 이상해 보일까? 혼자 밥을 먹으며 책을 읽는 사람은 더 이상해 보일까? 하지만 그들은 나보다 식당에서 키우는 고양이에 더 관심이 있었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책과 고양이를 번갈아 힐끗대며 식사를 마쳤다. 우리는 다 조용하다는 점에서 같았다. 나는 혼자 밥을 먹으며 책을 읽었고 그들은 마주 본 채 각자의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달랐지만. (그러나 무엇이 다른가?)


 사실 내게도 일행이 있다. 지금도 내 앞에 앉아있다. “1월 보도” 위의 것인지 “6월 발코니”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내 가까이의 자아와, ‘그래요. 나도 그래요. 당신도 그랬나요’하며 밑줄을 그어두는 것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버지니아 울프가 바로 내 동행이다. 


 언젠가의 그녀처럼 오늘의 나 역시, 내 방에서 멀어져 다른 방을 상상해 짓고 무너뜨리며 길을 걸었다.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의 생애를 멋대로 지어냈다 망가뜨리길 반복하며 걸었고, 난롯가 자리에는, 이미 출발한 버스를 향해 최선을 다해 뛰어오던 사람과 그 사람을 보고 문을 열어준 버스 기사의 몫이 있음을 정해두며 걸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푹신한 소파에는 식당이 30분부터 시작임을 알려주던 그 사람이 앉아있었다. 이 책을 여기 오기 전에 읽었으면 경주를 왜 혼자 가려는 거냐는 물음에 나는 분명 ‘연필’을 이용해 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여기 와 읽었고, 식사를 하며 읽었고, 카페에 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읽었다. 거대한 왕릉을 마주 본 채 읽었다. 그리 두꺼워보이지도 않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와 무덤은 조용히 마주 앉아 있었다. 나는 런던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울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문득 앞을 보면 거대한 무덤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이야기는 이제 그녀가 키우던 강아지로, 음악으로, 여행 중 묵은 여관으로, 웃음에 대한 고찰로, 질병으로, 계급으로, 전쟁으로 향했다. 


 나는 내 가계도에 그녀의 자리가 있었으면 싶어진다. 그리고 백 년 전의 사람에게는 내 고모가 되어달라는 편지를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한스러워진다. 


울프에게. 

 당신이 하는 말들은 재밌고 슬퍼요. 

 내가 처음 밑줄을 그은 당신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한 유명한 도서관이 한 여성에게 저주받았다는 사실쯤은 그 유명한 도서관에게는 전혀 괘념치 않을 일이겠지요. 모든 보물을 안전하게 가슴속에 간직한 채 그 장엄하고 고요한 도서관은 평온하게 잠자고 있었으며, 나와 관련해서 그것은 영원히 그렇게 잠잘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이것이었습니다.

 ‘또 카운터 뒤에 한 소녀가 있습니다. 나는 나폴레옹의 생애를 백쉰 번째로 쓴다든가 키츠에 대한 연구를 칠십 번째로 한다든가, 늙은 Z 교수와 그 부류들이 지금 쓰고 있는, 밀턴의 어순 도치를 키츠가 이용했다는 등의 글을 쓰느니 차라리 그녀의 진정한 역사를 쓸 것입니다.’ 


 내 최초의 저주는 제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남동생은 제사를 치르는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 옆으로 서 있을 수 있었지만 제삿상을 차린 나와 다른 여자들은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 저주는 질긴 생명력으로 오늘의 내 손에도 쥐어져 있습니다. 내가 새 가계도를 찾아나서는 이유의 4할은 아마도 그것이겠지요. 

 그러나 세상은 내 저주를 평온히 씹어 삼키고는 잘만 돌아갑니다. 당신의 출입을 거부한 그 도서관처럼이요. 그래서 나는 시시한 이야기들을 쓰고 있습니다. 몇 번이고 내 시시한 저주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장 이 세상의 더럽고 냄새 나는 입 속으로 날아들어가, 구역질 나는 이빨과 이빨 사이로 짓이겨지겠지만 말입니다. 그 이빨들에는 지금까지 세상에 태어난 모든 저주들의 찌꺼기가 끼어있을 것입니다. 아마 당신의 몫도 거기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저주야말로 나의 ‘진정한 역사’이기에, 나는 계속 쓸 것입니다. 내 저주는 계속 태어날 것입니다. 내 역사는 내 손에서 결정될 것입니다. 


 당신은 전쟁을 막을 수 있는 3기니의 용도에 대한 긴 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의 시대에 사는 당신이었다면, ’우리가 희생한 돈으로 대학을 가놓고 전쟁 막는 방법을 우리에게 물으니 우습군요. 아, 그리고 대학은 정말 처참히 실패했군요, 우리를 그렇게 밟아놓고요’라는 답을 보내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우아하게 창피를 주는 방법을 압니다. 무척이나 정성들인 긴 답을 보내는 것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그 말을 기어코 해내니까요. 나는 그래서 당신을 고모라 부르고, 언제든 찾아가 곧장 썩을 저주라도 우아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고모, 당신이 틀린 것이 하나 있더군요. 고모의 바람대로 페미니스트는 전위대가 된 지 오래인 세상, 페미니스트라는 글자가 불 타 없어지고 남은 세상, 그 글자가 폐어가 된 세상은 온 적이 없습니다. 그런 세상은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습니다. 잠시라도 왔다 간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3046년 경의 누군가에게 묻고 싶습니다. 네가 보기에 지금 여기는 어떤지. 내 말들이 너도 이해가 되는 끔찍한 시절이 아직 거기 있는지. 나는 당신이 있는 그곳이 아직 여기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내가 왜 백 년 전의 당신을 내 가계도에 끌어들일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까요. 진창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백 년 후를 묻기에는 겁이 나서, 천 년과 조금을 더 보태어 물음을 땅 속에 묻어둡니다. 천 이십 사년 후의 누군가가 길을 걷다 돌처럼 자라난 이 물음을 두드려 보고 답을 보내주었으면 하고요. 나를 고모라 부를 것은 기대도 않습니다. 다만 여긴 다 괜찮다는, 거짓이 아닌 답장이 필요할 뿐이지요. 


 아이스크림의 마지막 숟갈을 퍼 올렸을 때, 울프는 하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바닥에 누워 똑바로 올려다보는 하늘을 본 적이 있느냐고 말문을 연 그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늘은 푸른 광선과 금색 광선의 실험을 계속하고 있노라고,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타임즈>에 대서특필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도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땅에 붙어 사는 사람들은 시간을 내 고개를 들지 않으면 하늘의 장면 대부분을 놓치게 될 수밖에 없다. 누워 있다면 계속 그 영화를 보고 있을 것인데…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누구보다 하늘을 제일 잘 알고 있을 사람들이 바로 앞에 잠들어 있었다. 천년이 넘는 시간을 누워 있는 그들이야말로 하늘을 제일 잘 알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어 졌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직접 고개를 들어보는 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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