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 1일차 - 5
터미널까지 가는 시내버스마저도 매 정거정마다 멈추는 것 같았다. 옆사람은 거슬려 죽겠고 시외버스 출발 시각은 점점 다가오고, 모든 게 짜증이 났다. 엄마의 말을 들어 옆에 친구 하나라도 같이 가는 중이었다면 나는 혹시 모를 상황(버스를 결국 놓치게 되는 상황)에 대비해 해결책을 만들고 친구의 긴장을 풀어주는 농담을 하는 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 내가 갖고 가는 자아의 분량이 오직 1인분이었던 것인지, 짜증을 내면 곧이곧대로 내가 다시 받게 됐다. 나를 달래주는 ‘나’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마 그 자아는 어떻게든 잠이 덜 깬 몸의 부위를 찾아 잔뜩 웅크린 채 여즉 자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터미널에 도착한 게 버스 출발 3분 전이 되어서였다. 허겁지겁 짐을 싣고 땀이 범벅이 된 채로 자리에 앉으려는데 버스 기사가 내 신발끈이 풀렸다고 일러주었다.
하, 어쩌라고. 속으로 말을 삼키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는 순간 신발끈 얘기는 내 머릿속에서 그대로 휘발되었다.
이제 출발. 출발한 버스가 도로로 나가기 직전이었다. 창문 너머로 어떤 사람이 이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한 손에는 티켓을 쥐고 다른 쪽 손에는 초조한 머리카락들을 움켜쥔 채였다. 나는 안됐네, 생각했다. 그리고 손에 쥔 저 티켓을 날리고 다음 버스를 탈 운명인 게 분명한 그 사람을 내 눈동자에 조용히 담고만 있었다.
그런데, 버스 문이 열린 것이다.
그 사람은 곧장 버스에 올라타 티켓을 내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그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고 희한하게도 동시에 내 마음이 “마침내” 차분해졌다.
저 사람은 3분을 늦었고 나는 출발 3분 전에야 겨우 도착했다. 그래도 우리는 이제 같은 버스 안에 있었다. 그래, 그러면 된다. 3분을 늦은 게 나였더라도 나는 일단 뛰고 보면 되는 거였다. 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늦어도 일단 뛰어보고, 막다른 길에도 일단 겁먹지 않고, 길을 잃어도 일단 걸으면 되는 거다.
나는 곧 잠에 들었다.
한숨 자고 나니 얼추 경주 터미널에 다 와가는 중이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였던 것인지, 창밖으로는 머리로 정수리 부분만 가린 채 뛰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중에서도, 한 품에 꽉 차지도 않는 아기의 머리를 감싸고 비를 피해 달리는 사람이 눈에 닿았다. 그 사람의 머리를 감싸주는 손은 어디에도 없었고,
나는 곧장 엄마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마스크 챙겼냐고 묻던 엄마의 아침 걱정에 아주 간신히 짜증을 뱉지 않은 나 자신이 몹시도 얄미워졌다. 감히 ‘간섭’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인 것은, 내 입이 아니었다 뿐이지, 어쨌든 내가 맞았다.
이따 먹는 점심 사진을 엄마에게 제일 먼저 보내리라, 요상한 결론으로 내 마음은 결연했다.
그러나 엄마가 아침의 내 짧은 대답을 듣고 짜증을 읽지 않았을 리가 없다. 모른 척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고 출근하는 그녀의 뒷모습이 분명 내 눈에 닿았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는 옛날부터 모른 척을 잘 했다.
그녀의 38번째 생일 날, 나는 출근하는 그녀의 등에 대고서라도 축하를 하지 못했다. 기억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던 저녁이 되어서야 먼저 퇴근한 아빠의 힌트를 듣고 허겁지겁 생각을 했다. 기껏 내린 결론이 얼마 전 배운 동영상 편집 기술을 이용하자는 것이었고, 그렇게 나는 보라색 기본 배경에 글자들을 넣은 다음 슬픈 노래를 배경음으로 깔아놓은 허접한 영상을 만들게 되었다. 노래는 패닉의 ‘정류장’이었다. ‘오 그대여 그대여서 고마워요’하는 가사를 노린 것이었다. 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문장 하나를 기껏 만들지 못해서 인터넷을 뒤적거리기나 하는 애였다. 그 가사를 제외하고는 동생과 싸우지 않을게요, 엄마 말 더 잘 들을게요, 이런 말이나 끄적였을 것이다. 동생과 싸우지 않는 것과 엄마 말을 더 잘 듣는 것이 엄마가 엄마여서 고마운 것과 무슨 상관이 있었던 걸까. 어차피 다짐만 해놓고 생일이 지나면 동생과 어김없이 싸우고 엄마 말은 또 듣지 않을 것이니 당신이 거기 그대로 있기로 한 다음 내 전부를 참아주는 것에 미리 고맙다는 인사를 했던 것일까. 나는 심지어 엄마의 퇴근 시간에 맞춰 그 영상을 완성하지도 못했다. 추출도 되지 않아 편집 화면이 그대로 보이는 컴퓨터 화면 앞에, 퇴근 후 찬바람을 점퍼에 묻히고 들어온 엄마를 세워두고 급하게 영상을 보여주었다. 내가 까먹지 않고 오늘이 끝나기 전에 축하를 말하고 있다는 걸 빨리 증명하고 싶어서 무작정 그렇게 했다. 엄마는 고마워, 잘 만들었네, 했고 나는 그 인사를 들은 후 영상을 컴퓨터 바탕화면에다 대충 처박아두었다. 사진 한 장 담기지 않고 보라색 투성이인 촌스러운 그 영상이, 급하게 만든 티가 범벅으로 묻어있는 그 영상이, 엄마의 휴대폰에 담겨있는 것을 본 것은 조금 더 뒤의 일이다.
내가 먹고 자란 사랑은 그런 것이다. 아마 참고 버티는 ‘모른 척’의 날들.
<돌봄사회>라는 전시를 본 적이 있다. 그 중에서도 외국인 신분의 아이돌보미들이 자신들이 돌보던 아이들의 10년 후에다 대고 영상 편지를 보내는 ‘너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작품이 내 안에 박혔다. ‘나는 네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달려나가는 걸 보길 좋아했어. 너는 한 번도 아이스크림 하나를 다 먹지 못했어.’, ‘네가 숫자에 대해서, 색깔에 대해서 말하길 좋아했다는 걸 기억해. 너는 빨강, 하양, 그리고 파랑을 좋아했단다.’, ‘걸음마를 시작하는 일이 어렵다는 걸 알아. 그러나 너는 걷기 시작했고, 잘 해냈어.’, ‘너는 옳고 그름을 이미 알고 있는 아이였어.’, ‘너는 내가 귀엽다고 뽀뽀를 하는 아이였어.’, ‘너는 잠이 올 땐 니니, 배고플 땐 하마, 나를 부를 땐 바바따따라 했어.’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모든 얘기들. 나는 가족들의 돌봄을 받아먹고 자랐다. 특히 엄마와, 특히 할머니의 돌봄을 받아먹고 자랐다. 그들은 가족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기원을 거기 맡겨두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전시에서 내가 본 영상들에서는 돌봄의 출처가 명백히 타인이었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 그게 뭔지 처음 알았다.
돌봄의 출처는 원래 모두 타인인 것이다. 엄마와 할머니여도 타인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빚을 지고 산다는 것이 명백해지고 이 짐이 ‘누구에게’ 가혹한지 역시 명백해진다. 나는 모르는 나의 기원을 맡겨놓는 일, 그리고 맡겨놓고 돌아보지 않아 그걸 혼자 간직하게 하는 일. 힘들 때도 많았는데 너를 사랑했단다, 아가. 그래서 버텼단다-가 돌봄 노동자들의 공통된 진술이다. 고작 아이가 웃는 게 예쁘다는 말로 버텨야 하는 것이 돌봄이다. 아이가 혼자 남겨지는 공백에 이 세상은 누구를 거기 보내고 가두나. 할머니와 반나절 이상을 보내고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면, 내가 할머니의 사투리를 그대로 따라 ‘배긑에 가자(밖에 가자)’고 했다던 엄마의 기억. 그건 나에게는 없고, 나를 키운 무급 돌봄 노동자 둘에게는 있다.
빚이다.
다시, 비를 피해 달리는 사람들이 가둬진 창문에 이마를 대어 본다. 아기의 머리를 손으로 힘껏 감싸고 비를 피해 달리는 그 사람의 머리 위에는 역시나, 여전히, 손이 없다. 빚이다.
내 원래의 가계도에도 그런 것까지는 나오지 않는다.
숙소에 짐을 놔두고 황리단길로 가는 길.
우산을 든 채로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는데, 문득 아래를 봤더니 왼쪽 신발끈이 빗물에 질질 끌려 젖어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 신발끈 풀렸다고 했었지. 나는 우산을 어깨에 얹고 주저앉아 신발끈을 묶었다. 그제서야 버스 기사의 목소리가 생각이 났다. 다정한 목소리였던 것 같다고,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스스로가 얄미워지려는 순간. 그때 등 뒤로 누가누가 장가를 못 갔다고 흉을 보는 억센 말투가 밀려들어왔다.
나는 그냥 무아지경으로 걷자는 결심을 했다. 경주를 걷는 사람, 그것만이 내 자아인 양. 그렇게 ‘혼자’라서 가능한, 아무도 모르는 짜증과 반성의 반복을 두세 번 정도 삼키며 나는 계속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