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는 일이 하고 싶어 인생에서 23년을 학생으로 살았다. 긴 시간 공부를 한다는 것은 내면의 고독과 외로움을 대면해야 하고 자신을 깎는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일이었다. 특히 몸을 무겁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 대학원생의 삶은 이것들을 진하게 농축한 것이라 쉽게 추천하고 싶지 않을 만큼 고행의 길이었다.
도제식 교육방식과 상명하복을 고수하던 지도 교수와 함께 7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대학원을 나왔다. 졸업식이 끝나고 사진을 찍은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한 장의 졸업장, 시간과 감정이 뒤섞인 박사논문,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숙제가 남아 있었다. ‘이거 받으려고 그렇게 살았구나.’ 허탈감, 청춘에 대가치고는 손에 들려있는 무게가 가벼워 웃음이 나왔다.
막상 졸업을 하고 난 후에는 기쁨보다는 감당해야 할 일들로 앞이 깜깜했다. 상환이 언제 끝날지 모를 학자금 대출금과 다달이 납입할 이자, 몸과 마음의 피폐 따위가 전국을 보따리장수처럼 돌게 될 시간강사에게 짐이 되어 매달려 있었다. 부지런히 흐르는 시간에 올라타 늦장 한번 부리지 않고 살았다. 덕분에 짐의 무게는 전보다 훨씬 가벼워져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교수는 하늘이 내리는 업이다.
지도 교수는 원하지도 않는 식사 자리에 번번이 대학원생들을 꼬리처럼 붙여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는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를 조언을 하곤 했다.
“교수라는 직업은 하늘의 선택을 받아야 돼. 돈이 없거나 인맥이 없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
결론은 ‘노오오오력’을 해야 한다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의 말하는 방식은 적잖이 폭력적이었고 상처였다. 영혼 없이 끄덕이는 박자에 맞춰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밥숟가락을 쑤셔 넣기 바빴던 시간 속에서 ‘기필코 교수가 되어야지.’하고 수없이 되뇌었다. 누구라도 노력하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빛을 품은 청년의 꿈이 아니었다. 수많은 대상을 향해 표출하는 분노에 가까웠다. 나의 분노는 그렇게 꿈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분노를 완성하는 과정을 꿈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이루는 시간을 사는 것은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일상에서 마음이 편한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던 것 같다. 지도 교수는 주말을 포함해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출근했다. 그와 함께 반강제로 같은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어야 할 풀타임 대학원생의 삶은 위로마저 여유 없는 인스턴트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를 하얗게 태우고 자정이 다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와 인스턴트 음식이 포상처럼 손에 들려있었고 몸은 쓰레기통이 되어가는 날이 잦았다.
‘꿈이라는 것, 목표라는 것은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면서 성장시키는 것인가?’
‘어쩌면 내가 모난 돌이어서 이렇게 정을 맞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이렇게도 힘든데, 여길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수많은 날들이 스스로에게 화살을 겨누어야 견딜 수 있었던 날의 연속이었다. 내가 힘들었던 이유가 꿈의 바탕이 분노와 열등감 때문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항상 이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재미가 아닌 증명을 위한 공부였으니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소속돼 있던 랩은 통증 기전을 연구했고 살아있는 동물실험이 필수적이었다. 유난히 동물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 늘 동물을 곁에 두고 살았다. 털이 있는 동물이라면 어떤 동물이든 정도에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다 귀여워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동물에 대한 애정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의학기술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의식 따위에 밀려 있었다. 그러니까 동물실험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해야 하는 선택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석사를 마치고 이제 막 박사과정을 시작한 어느 밤늦은 시간 전까지는, 그랬다.
실험에 희생될 생후 2주 된, 눈도 채 뜨지 않은 Rat을 잠시 손에 쥐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어미의 품으로 파고들 듯, 쥐고 있던 손 안의 체온에 감싸여 평온한 표정으로 녀석이 새근거린다. 평소답지 않게 그날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보호본능이 깨어나 버린 순간, 동물실험에 대한 감각이, 죄책감으로 몰려왔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바꿀 수는 없었기에 수많은 날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살았다. 동물실험을 대체할 수 없는 기술의 한계를 탓하면서 성실하게 하루에 서너 마리씩 생후 2주 된 Rat의 뇌와 척수를 조각냈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존재에게 고통을 가하면 스스로 더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박사학위에 눈이 멀어 있었다. 그렇게 연구라는 이름의 잔혹한 행위는 용서받을 대상을 잃어버린 채 마음의 짐으로 남게 됐다.
반복되는 자아도취와 죄책감 속에서 멈춘 것 같았던 시간은 꽤나 믿음직하고 성실하게 흘러 가 주었다. 그리고 졸업 3년 후, 나는 하늘의 선택을 받아 대학 교수에 임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