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직으로 입사해서 전임자 없이 엉망인 일을 바로잡았다. 현재 상황을 파악해서 시스템을 이해하는데만 꼬박 두 달이 걸렸다. 시스템 관리, 보안관리라는 중책이었음에도 매번 단기간 계약직원에게 맡겨졌던 업무라 엉망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내 전임자는 6개월 계약직이었고, 그 전 전임자는 1년 계약직, 그 전전 전임자도 1년 계약직이었다. 매년 상부기관에 직속으로 정보관리를 받는 번잡스러운 업무였기 때문이었을까.
6개월 계약직으로 입사한 내가 중간부터 그 일을 떠맡게 되었다. 중간에 사직으로 인해 담당자가 바뀌는 게 아니라, 원래 전임자의 계약기간이 6개월이었다. 이번 연도에는 3개년 종합정보감사가 있다는 게 특이사항이었다. 전임자는 정규직원의 휴직대체로 근무했었는데, 정규직원은 다른 업무로 복직했다. 완전히 다른 이유로 채용된 내가 뜬금없이 시스템 관리자의 공석을 채우게 되었다. 잘 모르는 타 부서 사람들은 나를 복직하는 정규직원으로 알기도 했었다. 정규-비정규직원의 구분이 딱 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채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가장 만만한 계약직원이라 그런지, 중간 입사자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너무 자잘해서 딱히 담당자가 없었던 일들이 전부 나에게 떠밀려왔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도 누군가는 전화를 받았을 텐데, 내 입사 후에는 아무도 외부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업무분장에는 없던 일들이 담당자를 찾아 표류하다가 어느 순간 내 앞으로 와있곤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부장에게 명확한 업무 정리를 요청했다. 시스템 관리라는 본연의 업무도 버거운데 외부일까지는 권한 밖이라는 주장을 강조했다. 그다지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경력직으로 여러 회사를 겪어봤기에, 어찌어찌 업무를 해 나갔다. 그래도 과중한 업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회사 일은 잘하는 사람에게 몰리기 마련이었다. 내년도 업무분장이 슬슬 물망에 오르고, 6개월 계약으로 입사한 나의 연장 계약이 은근히 논의되고 있었다. 부장은 나를 계속 데려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연말에 3개년 종합정보감사가 있었다. 3개년 치 자료를 전부 확인하고, 보고라인의 누락이 있었는지, 미비한 근거자료가 있었는지, 허술한 정보관리가 있었는지 집중적인 감사가 진행되었다. 3개년 업무에 아무 책임이 없는 나를 앞세워 일을 떠맡기는 관리자들의 속내가 뻔했다. 여차하면 꼬리 자르기를 하려는 것이었다. 계약직에게 과중하다 싶을 만큼의 책임이 따르는 업무를 몰아넣고, 혹시나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전부 몰아주려는 게 너무 눈에 보였다. 도망가야겠다고 결심했다. 3년 동안의 일처리는 그만큼 엉망으로 겨우겨우 땜질하는 식으로 운영되어왔다. 사고 없이 버텨온 게 신기할 정도라 언젠가는 크게 난리가 나겠다 싶었다.
조용히 이직을 준비했다. 연말연초에 워낙 수요가 많은 직업이라 경력을 살려 어렵지 않게 이직을 하게 되었다. 현 직장의 채용 일정과 재계약 시점이 상대적으로 타 회사에 비해 느리게 진행되어 자연스럽게 퇴사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연장 자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는 관리자 덕분에 망설임 없이 이직을 했다. 내정자니 뭐니 하는 논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채용 관련 문제에는 함구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당장 업무를 진행하는 입장으로는 두렵고 답답하기만 했다.
새 연도의 업무가 발표되었다. 인사발령이 났고, 퇴직자가 정해졌다. 올해도 역시나 정규직원은 아무도 시스템 관리에 지원하지 않았다. 또 계약직원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내 후임은 이번에도 6개월 계약직이었다. 아무리 순환보직을 맡는 직장이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할 지경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가 없다지만 참 너무했다. 인사 발표가 나서 새 계약직원이 후임으로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업무 인수인계를 할 수가 없었다. 보안관리의 영역이라 후임자의 입사일 이전에는 시스템 권한을 부여할 수 없었다. 딱 새 업무 연도의 시작일이 후임자의 입사일이었다. 후임자는 또 제로베이스에서 업무를 해나가야 한다.
새로 업무를 떠맡게 될 후임자를 위해 인수인계 자료를 성의껏 만들었다. 그리고 잡무에 더 표류하지 않도록 업무 가이드를 첨부해 주었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후임으로 오시기를 기원한다. 욕먹지 않는 전임자가 되고 싶지만 장담할 수가 없어 아쉽다. 그건 퍽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