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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Mar 31. 2024

책 : 아즈마 히로키

2024. 3. 31.

아즈마의 모든 작업은 현실을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마땅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비평이 “어떤 특정 작품이나 특정 사건을 문화적·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대상처럼 각색하는 것, 다시 말해 특수성이 전체성과 관계있는 듯한 환상을 제공하는 것”이고, 철학이 여기에 무한한 자원을 제공하는 ‘사유의 보고(寶庫)’라면, 양자가 사적 이해를 위한 도구로 쓰이거나 온라인 쇼핑몰에 게시된 상품 이미지처럼 존재한다고 한들 문제 될 것은 전혀 없다. 도리어 문제는 “모든 담론이 수다 거리가 되는” 것을 “사상이나 비평의 장소가 없어”지는 것과 동일시하는 경직된 사고이고, 그와 같은 사고가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수다 거리’와 ‘수다 거리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감각, 즉 ‘경박함’과 ‘진지함’을 분리하는 감각이다.


이런 깨달음은 아즈마가 계속해서 ‘삐딱선’을 타게 한 동인으로 작용했다. 아즈마는 점차 철학자‘답지 않게’ 문장을 쉽게 쓰거나 일상 용어로 가득한 글을 썼고, 필요에 따라 부정적 함의가 다분한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아즈마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의 풍토를 되돌리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국면에서 유의미한 가치를 발굴하고 이를 다시 보편과 공통의 사유 계기로 전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0~11쪽)



가파도에 와서 발굴한 작가 중에 첫째가 고양이 철학을 쓴 존 그레이이고, 둘째가 관광객의 철학을 쓴 아즈마 히로키이다. 존 그레이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 나는 그레이의 철학에서 노자를 읽었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제 막 읽기 시작한 철학자다. 아즈마의 철학에서는 장자가 읽힌다. 장자의 '쓸모없음의 쓸모'는 아즈마의 '잘못 배달된 편지(오배)'와 중첩된다. 모두 '우연성의 철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 이야기하면 길어지니  여기서 일단은 끊자.

어쨌든 아즈마 히로키는 모순된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도전적인 철학자다. 진지함과 가벼움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진지함' 또는 '진지한 가벼움'을 선택하여 아이러니를 견디면서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고 돌파구를 찾는다. 나는 아즈마를 장자와 연결시켰지만, 아즈마의 사상적 뿌리는 데리다, 에드워드 사이드, 루소, 펠릭스 가타리, 아도르노, 푸코, 프로이트, 로티 등 서양의 쟁쟁한 철학자들이다. 그래서 그의 책은 혼종적이면서 중층적이다. 그가 쓴 문장은 가볍고 쉽되,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그리 가볍지 않다. 이렇게 두툼한 철학자를 읽으려면 괜찮은 가이드가 필요하다.

국내 연구자 중에서 한송희는 아즈마 히로키라는 얇은 책을 통해 아즈마 철학을 핵심 키워드 10개로 정리한다. 10개의 주제는 01 동물(화), 02 2층 구조,  03 오타쿠, 04 데이터베이스 소비, 05 우편과 오배, 06 관광, 07 다크 투어리즘, 08 관광객(a. k. a. 우편적 다중) 09 검색어 10 일반의지 2.0 등이다. 철학개념으로는 다 생소하겠지만, 소개서에 알맞은 문체와 친철함을 가지고 있어 읽다 보면 맥락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읽다가 밑줄 친 몇 구절을 소개한다.


"아즈마는 흔히 말하는 '사상가' 또는 '철학자'와 조금 다르다. 논리적 정합성과 엄밀성을 내세우는 대신 엉성하더라도 '현실에 발붙인 이론'을 고집한다. 실제로 아즈마의 글은 이론이라기에 너무 성글게 쓰인 면이 있고, 사상이라기엔 너무 가볍다는 느낌을 자아낸다."(6~7쪽)


"아즈마는 '진지한' 주제 대신 '진지하지 않은' 주체를 '진지한' 태도가 아닌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다루기를 택한다."(8쪽)


"그의 모든 시도는 결국 앞으로 들어가 뒤로 나오는 것이 아닌 '뒷문으로 들어가' 앞으로 나오는 전략이다. '어긋남'은 아즈마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든 반드시 되돌아오는 궁극의 토대다."(12쪽)


"오타쿠 문화는 지구화와 동물화라는 거센 풍랑 속에서 닻을 내릴 곳 없는 헐벗은 주체가 바위 틈새에 겨우 발을 디디며 만들어낸 삶의 양태와 다름없다."(32쪽)


"아즈마는 확실성과 안정성 대신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토대로 공적인 것에 대한 사유를 새롭게 쌓아올리기 시작한다. 그 핵심에는 '우연'이라는 공통 속성이 자리한다."(53쪽)


"'오배'란 의도와 결과의 어긋남, 어긋남이 보이지 않게 하는 착각, 착각을 말미암아 지속되는 노력, 노력의 축적으로 이뤄지는 연대를 모두 포괄하는 철학적 개념이라 볼 수 있다."(56~7쪽)


"관광객론은 여행과 관광, 진짜와 가짜, 진지함과 경박함, 원작과 2차 창작 등을 구분 짓는 모든 이항 대립적 사고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지적 담론을 구축한다."(62쪽)


"관광의 핵심은 이 문화적 실천이 '오배', 즉 배달의 실패에서 비롯하는 예기치 못한 소통의 가능성을 함축한다는 데 있다. 낯선 곳, 낯선 사람, 낯선 언어, 낯선 풍경, 낯선 소리 등을 몸으로 감각함으로써 고작 한 뼘에 불과했던 자신의 인식과 이해와 사고의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일, 그리하여 나를 넘어서는 타자, 집단, 사회, 세계 곳곳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일, 바로 이것이 관광을 통해 이룩되는 연대다."(65쪽)


일단 여기까지! 다음에 내가 읽을 아즈마 히로키의 책은 느슨하게 철학하기이다. 저자가 여기저기에 연재한 글들을 모은 에세이 모음집이다. 가장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400쪽이 넘는 책이지만, 짧은 글 모음이라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제목처럼 느슨하게 야금야금 읽어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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