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사람들은 건조한 사실의 나열보다 혼신의 드립을 원할 때가 더 많다. 사람들은 사실의 파편이 아니라 파편을 넘어선 우주를 원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벌거벗은 현실을 살지 않고, 언어를 통해 구성한 우주에 산다. 언어에는 주술적 성격이 있어서 어떤 언어를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 순간 주변 분위기뿐 아니라 이 우주 전체가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드립은 작은 변혁이자, 사소한 혁명이자, 진지환 행위예술이자, 제도화되지 않은 문학이다.
미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진실. 광인의 입으로만 말해지는 진실이 있듯, 드립을 통해서만 비로소 표현되는 삶의 진실이 있다. 사실은 충분하지만 진실은 빠져있다고 느낄 때, 드립이 방언처럼 터진다. 좋은 말은 넘치지만 현실은 여전히 진창일 때, 드립이 방언처럼 터진다. 오랫동안 기대한 목표를 달성했지만, 아무도 기쁘지 않을 때 드립이 방언처럼 터진다. 세상이 여전히 불완전한 이상, 오늘도 인간은 드립을 반려동물 삼아 살아갈 것이다. (15~16쪽)
내가 아는 김영민은 두 명이다. 하나는 철학적 신조어를 끊임 없이 만들며 사고의 폭을 넓히는 철학자 김영민과 위트와 유머를 내장하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하는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이 둘 중에 최근에 읽은 책들은 후자의 김영민이다. 그의 산문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2018),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2019), 《공부란 무엇인가》(2020), 《인생의 허무를 보다》(2022)를 읽으며 얼마나 즐거워했던지, 이번에 나온 책 아포리즘집 《가벼운 고백》(2024)을 덜컥 주문해 버렸다.
이책은 2007년부터 2024년까지 17년간 써내려간 아포리즘 중 365편을 골라 담았다. 김영민 교수는 아포리즘을 일종의 드립으로 보는데, 그의 드립론이 재밌다. 그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드립은 "핸드드립처럼 수줍고 섬세하"며 "이분법을 강요하는 상대질문을 파훼하며", "상대의 전두엽을 새삼 자극하"고, "펀치보다는 카운터펀치"에 가깝고, "저항자의 무기"로 적합하다. 드립은 "일상의 순간을 만우절로 만"들고, "삶은 종종 부조리와 경이를 간직한 모호한 현상이므로, 때로는 구름을 술잔에 담듯 삶을 담아야" 하는데 "드립은 바로 언어로 된 술잔"이다. 드립은 "인간 고유의 자유가 깃"들고, "분노에 떠는 순간에도 유연하게 몸을 돌려 상대 정신의 빈 곳을 가격"할 수 있다. 따라서 "드립은 작은 변혁이자, 사소한 혁명이자, 진지한 행위예술이자, 제도화되지 않는 문학이"라고 드립을 펼친다.
나는 이 드립론을 읽는 것만으로도 책값을 벌충했다고 생각한다. 좋은 책은 다 읽지 않아도 만족도가 높다. 그럼에도 365개의 짧은 아포리즘 중에서 내가 손꼽는 드립을 몇 개 소개해본다.
인간은 필멸자다. 따라서 인생의 목표는 승리가 아니다. 우아한 패배다. (22쪽)
하중은 있되 통증은 없는 삶을 원한다. (24쪽)
인생은 뜬금없고 예측 불허다. 마치 백허그처럼. (33쪽)
누구나 인생행로에서 많은 산을 넘어야 한다. 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산 그리고 산 넘어 산. (36쪽)
늙은 어머니가 말씀하시네. 너무 열심히 살지 말라고. (37쪽)
실수의 깨달음은 부고처럼 언제나 늦게 온다. 인생의 오타는 왜 나중에 보이는 걸까. (39쪽)
세상에는 직시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내심 알고 있는 진실, 늙어가는 부모의 얼굴, 헐벗은 자기 몸, 헐벗은 자기 마음 그리고 헐벗은 계좌 잔고.... (41쪽)
(.....)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 계약보다, 혹은 교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상호 돌봄의 관계가 아닐까.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 돌봄을 잘 받을 수 있는가. 각자의 방식대로 귀여워야 한다.(170쪽)
다들 강해지고 싶어 하지 않나. 강해지는 좋은 방법은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다. 강해진 다음에 상대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용서함으로써 강해진다. (182쪽)
최고의 사치는 비싼 법 먹으며 헛소리하는 거다. 그 사치를 누리려면 평소에 열심히 일하고 조리 있는 말을 많이 해두어야 한다. (185쪽)
어디 혁명뿐이겠는가. 잔소리도 세상을 바꾼다. (198쪽)
인간은 문화적 양서류다. 문화에 질리면 야생을 꿈꾸지만, 야생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다. 다시 문화라는 물에 몸을 적셔야 한다. (201쪽)
왜 과일은 썩기 직전에 가장 달콤한가. 달콤한 것은 왜 다 썩기 직전의 상태인가. (216쪽)
뭐,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이다. 그러니 아포리즘을 좋아하면 구입하시고, 종이의 효용성을 생각하면 구입 안 해도 된다. 빈 칸이 너무도 많다. (나는 구입했다. 원래 전작주의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