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사의 구조』(2010년)에서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의 이행을 주장했다. 본서는 그것을 재고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마르크스주의의 표준적 이론에서는 사회구성체의 역사가 건축적 메타포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생산양식이 경제적인 베이스(토대)에 있고 정치적이고 관념적인 상부구조가 그것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나는 사회구성체의 역사가 경제적 베이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에 반대하지 않지만, 단 그런 베이스는 생산양식이 아니라 오히려 교환양식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교환양식에는 다음 네 가지가 있다.
A 호수(증여와 답례)
B 복종과 보호(약탈과 재분배)
C 상품교환(화폐와 상품)
D A의 고차원적인 회복 (11~12쪽)
본서를 써 가는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만약 '사회주의의 과학'이 가능하다면 사회주의를 교환양식으로 보는 것을 통해 성립한다는 사실이다. 즉 그것을 교환양식 D로 보는 것이다. 나는 이때까지 저작에서 교환양식에 대해 논해왔는데 A B C가 중심이었다. D를 본격적으로 마주하는 것은 사실상 본서가 처음이라고 해도 좋다. D는 엄밀히 말해 교환양식이라기보다 교환양식 A B C 모두를 무화시키는 힘으로 있는 것이다. 또 D는 ' A의 고차원적 회복'으로서 생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우리의 의지나 기획에 의해 실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D가 인간의 의지나 기획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반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관념적인 힘, 바꿔 말해 '신의 힘'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53쪽)
가라타니 고진이 쓴 책을 처음 읽은 것이 『트랜스크리틱』(2001)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된 책이지만, 책이 주는 독특성과 이론적 치밀함에 경탄을 금지 못했다. 일반 독서인이 읽기에는 참으로 쉽지 않지만, 소위 '운동권' 서적을 탐닉한 사람이라면 가라타니 고진의 매력에 빠지지 않기 힘들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와 고진의 독서 인연은 끝이었다.
그리고 20년이 넘은 세월이 흐른 후 내 손에는 『힘과 교환양식』(2022)이 쥐어져 있다. 우연히 송악도서관에 들렀다가 깜짝 놀라며 대출한 책이다. 책 가격은 무려 3만원. 물론 책 두께가 500쪽을 넘는 책이다. (책값을 충분히 한다.) 이 귀한 책을 대출하여 읽으며 계속 밑줄을 긋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지만, 대출한 책이라 그럴 수 없었다.
옮긴이의 후기에 따르면 " 『힘과 교환양식』은 2022년 10월 5일에 나온 최신간으로, 『트랜스크리틱』(2001), 『세계사의 구조』(2010)와 함께 가라타니 고진의 ‘3대 주저’로 간주된다. (.....) 이후 저자는 주목할 만한 책들이 출간되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힘과 교환양식』에 수렴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자부하고 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나는 고진의 저작 중 최고봉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쓰고 얼마 후 고진은 철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베루그루엔상> 제7회 수상자가 되었다. 비서구권에서는 최초라 한다.)
과연 그럴까? 일본의 독보적인 마르크스주의 저술가인 고진은 세상을 읽고 분석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통상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생산양식'(생산력-생산관계) 중심으로 보았던 것을 '교환양식'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같이 살면서 교환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의 양식은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4종류의 교환양식이 있었다. 그것을 고진은 A B C D양식으로 구별하며 이들의 변화와 혼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도대체 어떤 힘이 작동되기에 교환이 이루어지는지 살펴본다.
그에 따라 마르크스 전반이 다시 검토되고, 역사학, 경제학, 신학, 문학 등 전방면의 책들이 논거로 등장한다. 논거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것들을 다시 읽어내는 고진의 통찰력이다. 나는 오랜만에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책을 읽는 기분이다. (올해 읽은 책 중에 현재까지는 최고다.)
책의 요약은 워낙 방대하여 하지 않으려 한다. 책의 주제의식은 앞에 인용구에 옮겨놓았다. 대신 목차를 소개한다. 목차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넓이와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책을 읽기도 전에 목차를 보며 침을 질질(^^) 흘렸다. 너무도 읽고 싶어서.)
서론
1 상부구조의 관념적인 ‘힘’ / 2 ‘힘’에 패한 마르크스주의 / 3 교환양식에서 오는 ‘힘’ / 4 자본제 경제 속의 ‘정신’의 활동 / 5 교환의 ‘힘’과 페티시(물신) / 6 교환의 기원 / 7 페티시즘과 우상숭배 / 8 엥겔스의 『독일농민전쟁』과 사회주의의 과학/ 9 교환과 ‘교통’
제1부 교환에서 오는 ‘힘’
예비적 고찰—힘이란 무엇인가?
1 낯선 사람끼리의 교환 / 2 자연의 원격적인 ‘힘’ / 3 ‘보이지 않는 손’과 진화론 / 4 화폐의 ‘힘’ / 5 정주화와 교환의 문제 / 6 공동체의 확장과 교환양식
제1장 교환양식A와 힘
1 증여의 힘 / 2 모스의 시점 / 3 원시적 유동민과 정주화 / 4 토테미즘과 교환 / 5 후기프로이트 / 6 공동체의 초자아 / 7 반복강박적인 ‘힘’
제2장 교환양식B와 힘
1 홉스의 계약 / 2 상품들의 ‘사회계약’ / 3 수장제사회 / 4 원시사회 단계와 교환양식 / 5 수장이 왕이 될 때 / 6 카리스마적 지배 / 7 역사의 ‘자연실험’ / 8 신민과 관료제 / 9 국가를 초래하는 ‘힘’
제3장 교환양식C와 힘
1 화폐와 국가 / 2 원격지 교역 / 3 제국의 ‘힘’ / 4 제국의 법 / 5 세계제국과 초월적인 신 / 6 교환양식과 신 관념 / 7 세계종교와 보편종교
제4장 교환양식D와 힘
1 원유동성으로의 회귀 / 2 보편종교적인 운동과 예언자 / 3 조로아스터 / 4 모세 / 5 이스라엘의 예언자 / 6 예수 / 7 소크라테스 / 8 중국의 제자백가 / 9 붓다
제2부 세계사의 구조와 ‘힘’
제1장 그리스 로마(고전고대)
1 그리스예술의 모범성과 회귀하는 ‘힘’/ 2 아주변인 그리스의 ‘미개성’ / 3 그리스의 ‘씨족사회의 민주주의’ / 4 기독교의 국교화와 『신의 나라神國』 / 5 비참한 역사과정의 마지막 도래
제2장 봉건제(게르만)
1 아시아적 또는 고대고전적 공동체와의 차이 / 2 게르만사회의 특성 / 3 게르만사회의 도시 / 4 수도원 /
목차만 소개하며 너무 성의 없어 보여 읽다가 마음 속으로 밑줄 친 부분을 인용한다. 에른스트 블로호의 <희망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저자가 한 말이다.
"'희망'이란 인간이 의식적으로 미래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또 실현해야 할 무언가도 아니다. 그것은 좋든싫든 너머에서 온다. 즉 오히려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야말로 '중단되고 제지된 미래의 길'로서의 희망이 도래한다. 즉 공산주의는 오히려 도저히 실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만 도래한다." (48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