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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 Feb 27. 2024

내려놓음

니덕에 성장하는 애미

나: "이제 2년밖에 안된 거야? 그래? 햐~~~ 근데 난 한국에 한 5년은 거주한 거 같아."

돈 버는 기계처럼 느껴지는 애절한 웬 수 같은 남편:

  " 팍팍하게 바쁘게 한국인사회 적응 완료한 거지."

                                      "호찌민, 느린 도시 속에 오랫동안 익숙해져서 세상 돌아가는 걸 몰랐던 거야."

나: "그때 부동산 투기를 좀 했어야 했는데. 아~~~~~~~~ 먹고살기 고달프네 참~. 그래도 이 정도면 우린 감사해야 해. 그치?"


고작 2년밖에 머물지 않았다. 고작 2년...

우수수 쏟아진 소나기를 시원하게 맞은 기분이다. 옷이 흠뻑 젖었지만 후련하고 시원한 느낌. 우산도 우비도 없이 맨몸으로 매차게 맞은 소낙비 때문에 살갗이 아려올 만큼 아팠지만 어느덧 익숙해졌다. 이젠 알록달록 우산도 있고 우비도 있고 비를 피할 처마밑도 있다. 하루하루 버텨내는 단단한 마음가짐이다. 감사함!!!


우리 두 부부가 합심해서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에 우린 서로 묵묵히 견디고 버틴다. 국제학교를 평범한 월급쟁이가 보낸다는 현실은 소위 딱 까놓고 말해 진정 미친 짓이라 할 수 있다. 미쳐도 대단히 미친 짓임이 틀림없다. 정신 나간 짓은 분명 하나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 정말 미친 짓이다!!!!!  왜 하냐고 묻는다면 그냥 전 이렇게 키우고 싶어서요. 그래서 스스로 감당중입니다.


우리 두 부부는 그 미친 짓을 여전히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질질 구질구질하게 끌고 묵묵히 나아갈 생각이다.


종종 너무 힘에 붙일 때는 스스로 엉엉 목 놓아 울고 싶기도 하다. 남들은 나를 이상하게 본다. 뭐가 그리 바쁜지. 아이 하나인데 뭐가 그리 힘든지. 아이 하나인데 뭘 그리 신경을 쓰는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엄마인 나 스스로가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인 아이한테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에너지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들어간다는 사실을. 구차하게 이리저리 말하기 귀찮아하는 성격 탓에 더욱더 홀로 아이를 키운 듯하다. 내가 말하는 홀로라는 뜻은 또래 엄마들과 교류 없이 키웠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아이는 괜찮냐고요? 넵. 학년 대표 입니다.(아이 내세워 자랑하는 거 좋아하지 않아서요. 하지만 아이는 정상적으로 잘 자라고 있습니다. 제 기준에서는요.)



하지만 난 엄마다. 그리고 꿈이 있다. 소박한 꿈이지만 나에겐 중요한 꿈이다. 현실 속 내가 가질 수는 없지만 항상 그리워하는 엄마상이기도 하다. 내가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친정엄마와는 다른 엄마가 되기 위해 마음 챙김을 시작한 내가 아니던가. 난 따뜻한 엄마 같은 엄마. 지켜볼 수 있는 엄마. 편견 없는 엄마. 비교하지 않는 엄마. 기다리는 엄마. 나의 생각과 세계관을 아이에게 주입시키고 싶지 않은 엄마. 아이가 커서도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엄마가 되는 게 나의 꿈이다. 아이의 파장과 세계관을 존중하고 픈 엄마. 온전히 그 아이가 품고 있는 색으로 자랐으면 하는 엄마. 적고 보니 너무 꿈이 거대하고 크다. 못 지킬 것 같지만 항상 노력 중인 건 확실하다.


엄마로서 실천력은 떨어지고 가끔 침대밑에서 양말한쪽과 하리보 젤리 껍질이 뒹구는 아이방을 보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미친년 코스프레를  하기도 한다. 앞으로 4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 사이 이 집안에서 한 청년으로 자라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생활습관이라도 잡아 줘야 한다는 사명감아래에 엄마로서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하는 중이다.


매번 아이에게 하는 말이 있다.

"절대로 엄마를 믿지 말라고. 엄마도 잘 모른다고. 엄마보단 너 자신을 믿으라고"

그렇게 자라줬으면 좋겠지만 안되면 어쩔 수 없고!


추억인데...


서두가 이리 긴 이유는.. 사실 나도 아이도 마음 아픈 결정을 최근에 했기 때문이다.


수영을 호찌민에서 어린 나이에 시작을 했다. 7살 만 6세 때 학교에서 형아들이 트로피를 받고 오는 어셈블리를 보고 혀 짧은 말로 "엄마, oo이도 수영 하고 싶어"라는 말을 처음으로 했고 실행력, 실천력, 무조건 경험을 우선으로 두는 난 바로 실행에 옮겼다. 처음 AIS(호찌민 AIS 안푸에 위치) 학교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수영교실에서 시작을 했다. 체격이 또래보다 컸던 아이는 억척같은 엄마와 호찌민에서 추후 학교대표단에 들어가 또다시 동남아를 넘나들면서 좀 화려한 선수 생활을 했다. 아~~~ 진짜 그거 할 짓이 못된다. 추억에는 남는다. 여하튼 아이가 좀 수영을 했다.


그 수영을 2년 전 다시 한국에서 이어서 했다. 아이도 나도 그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엘리트 선수처럼 수영을 시킨다는 행위는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짓이었다. 호찌민은 집 앞이 수영장, 일 년 12달이 여름. 수영은 언제 어디서나 그냥 할 수 있는 종목 그 쉬운 수영이 한국에서는 최고로 어려운 운동이었다.


한국에서 선수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클럽에 들어가야 했다. 이야.. 정보공유가 안 되는 곳이 대한민국. 어렵게 어렵게 한 곳을 찾아 2년 동안 2시간 왕복 거리를 오가며 우리 세 가족은 말 그대로 죽을 뻔했다. 운전을 못하는 남편 대신 아이 라이딩도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오른쪽 고관절은 요가를 하면서 장시간 잦은 운전탓에 고장이 나서 치료를 받았다.


정말 거짓말 아니고 소위 미련한 짓이었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자기를 수영선수라며 소개하고, 취미가 수영이고, 잘하는 게 수영이고, 좋아하는 게 수영이고, 잘하고 싶은 게 수영이고, 수영캡틴이 하고 싶고, 앞으로 계속 쭉 하고 싶은 게 수영이었다. 아이를 존중했고 난 적극적으로 수영클럽을 찾아다녔다. 이게 부모맴인거지? 나도 참 징하다. 징해. 그리고 2년이란 시간 동안 아이를 존중했다. 아니 어쩌면 아이보다 나 스스로도 내려놓을수 없었는지 모른다. 아이와 함께한 수영 세월만 몇년이지? 매일은 못 가더라도 갈 수 있는 만큼 함께 했다. 종종 짜증도 냈다. 미안 아들아!~


그리고 올해 그 멍청한 짓을 마무리 지었다. 장거리를 오가며 차 안에서 아이도 지쳐갔다. 매일매일 365일 하던 훈련을 일주일에 몇 번으로는 초를 단축시킬 수 없었고 학업도 동시에 이어가기에 벅차했다. 드디어 아이가 말을 꺼냈다.


"엄마, 이제 그만할까 봐.
그냥 동네 수영장에서 우선 생활운동으로 유지만 해볼게."


꺄~~~~~~~~~ 북도치고 장구도 치고 머리에 꽃도 달고 휘리리릭 몇 바퀴 동네를 돌고 싶은 심정이다. 그토록 바라던 소박한 소망이었다. 갑자기 숨통이 튀었다.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듯했다. 목구멍에 막혀있던 찰떡이 꿀꺽하고 위장아래로 쑥 내려가는 기분!!!!


아이를 기다렸다. 2년. 꼬박 2년이 걸렸다. 한국에서 처음 살아보는 아이. 아이도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고 드디어 아이가 내려놓았다. 수영캡틴자리 욕심을 내려놓은 듯했다. 부처님 하느님 하늘에 계신 모든 신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진심으로 두 손 모아, 이마를 땅에 내려놓고 두 손과 두발을 싹싹 빌었다. 그토록 감사했다.


눈물이 뚝 뚝 흘렀다. 나도 아이도 흘렀다. 하지만 선택과 집중. 스스로 배워야 할 때. 나도 함께 내려놓음.


남편과 나는 이제 수영하는 그 2~3시간, 왕복시간까지 통합 5시간!!!! 그동안 커피숍을 전전하며 배회하지 않아도 되고 밥값 싼 곳을 찾아 분식을 먹지 않아도 되고 추운 겨울 오들오들 떨며 아이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래!!!!

2년!!!!


고맙다!!!!!


눈물 나게 고맙다. 이자식아!~~~~~~~~~~~~~!!!!!!!!!


씨익 웃고 있는 나~!


요가 가야지~~~ 호호호호



by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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