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자라고 자기만의 성벽을 쌓아가고 있다.
추억이란 인간의 진정한 재산이다. 기억 속에서 인간은 가장 부유하면서도 또 가장 빈곤하다. -알랙산더 스미스-
코비드가 나타나기 이전 아이는 나의 여행 짝꿍이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도 좋아했지만 아이와 함께 둘이라 더욱 좋았다. 그 조그만 아이로부터 나오는 파장의 힘은 오로라처럼 아이를 감싸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때때로 그 빛에 의지했다. 혼자 먹는 밥보다 같이 먹어서 좋았고 화장실에서 엄마 가방을 지켜주는 아이가 있어 알게 모르게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 뭐 항상 그랬다면 거짓말이지만 아이의 존재는 여행의 풍성함을 더해 주었다. 길을 잃어서 해메일 때 비록 말문이 다 트이지 않았던 아이에게 주절주절 혼잣말을 하며 무사히 호텔까지 찾아간 추억도 있다. 항상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혼 잣 말의 대화였지만 아이는 말없이 묵묵히 경청해 주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엉뚱하고도 생뚱맞은 질문을 그 상황에서 아주 적절히 던져 나의 헛웃음을 자아 내기도 했다.
한국에서 아무 연고 없이 부모님 집을 잠깐 빌려 한 달 보름 동안 거주했던 적이 있다. (부모님도 해외에 계셔서 빈집이었다.) 아이와 난 서로를 의지하며 많이 울고 웃으며 나날을 보냈다. 너도 자라고 나도 자랐다. 조그만 아이에게서 나오는 그 파장의 힘은 마치 온 우주를 다 감싸 안을 만큼 너그러웠다. 철이 없었던 나를 낳아 주었다는 이유로 엄마라 부르며 자기의 인생을 송두리째 나에게 의지하는 그 어린아이에게 벌컥 화를 내고 가끔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울리기도 했었다. (엄마들 사이에선 소위 미친년 코스프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실 바닥을 닦고 있는 엄마 옆에서 서성이다 함께 거실을 닦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며 옆에 졸졸 따라다녔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집 앞 공원에 있는 어린이 수영장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참치 김밥과 돗자리도 준비해서 가기로 했다. 그토록 아이가 내뿜는 오로라는 방대했고 한 낯 보잘것없는 나란 인간을 엄마로 품어 주었다. 6주 동안 아빠의 빈자리는 제법 크게 와 닿았다. 특히 주말이면 한층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우린 둘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남편은 회사생활이 바빠 5년째 휴가를 못 가고 있는 중이다. 베트남은 위치상 다른 동남아 나라와 가까워 비행기 편도 많고 표값도 저렴한 편이다. 유치원을 5세 때부터 다녔다. 어쩌면 그래서 너와 나 함께한 시간이 더욱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나를 졸래 졸래 쫓아다니던 아이는 여행의 피곤함이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맛을 알게 되었고 또 여행의 과정을 충분히 숙지하고 인식하는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어쩌다가 한 번씩 나가는 호찌민 시내를 거닐다 호텔 앞을 지나가면 아이는
‘음. 호텔 냄새. 여행 가고 싶다.’라고 무의식의 소리를 내뱉었다.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을 가면 호텔이 아닌 텐트에서, 비행기가 아닌 할아버지 자동차로 로드트립을 강행했다.( 베트남에서 살면서 캠핑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태어 나서 부터 선택의 여지없이 아이는 호텔과 비행기를 더 자주 접했다.) 어느덧 연세 60을 훌쩍 넘겨 백발이 된 부모님은 딸의 성화에 못 이겨 텐트에서 주무시고 느닷없는 캠핑장비 구입에 어 떨 떨 해하시지만 나름 즐거워하셨다. 올해도 은근히 우리와의 캠핑을 기대하고 계셨지만 코비드로 한국을 갈 수 없어 결국 두 분 이서 가까운 계곡에 텐트를 치고 된장찌개를 끓여 먹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이번에 우리와 함께 캠핑하기 위해 코펠을 구입하셨다고 한다. 코비드로 한국에 갈 수 없었다.
가족과 함께 텐트에서 자고 민박을 하며 여행하던 추억이 고스란히 아직도 나의 머릿속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있다. 생각해보니 초등(국민학교라 불렀다) 6년 동안 주말마다 가까운 계곡, 산, 바닷가를 항상 다녔다. 겨울엔 온천을 주로 다녔다. 옥천암과 사리암 절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 사이를 가르며 돌을 뒤집어 민물 가재를 잡았던 기억, 잠자리채로 송사리를 잡았던 기억, 바닷가에서 작은 꽃게를 잡아 다음날 라면과 함께 끓여 먹었던 기억, 큰 바위 아래에 붙어 있는 소라와 홍합을 숟갈로 긁어 가면 채취했던 기억, 비 오는 날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허기진 배를 LA갈비로 채웠던 기억.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오이와 감자를 붙이고 며칠이 지나 얼룩 덜룩한 피부 위로 허물이 벗겨지듯 피부 껍질을 벗겨냈던 기억. 온천 이후 가족과 따뜻한 가락국수와 어묵을 먹었던 기억. 어쩌면 그래서 공부와 거리가 먼 학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울산에서 자랐다. 그래서 바다를 참 좋아한다.)
이렇듯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소중한 추억 하나가 가끔 삶을 지탱해주기도 한다. 어린 나무가 땅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기 위해 태양, 흙, 물과 같은 양분을 필요로 하 듯이 한 인간이 자라고 성인이 되어감에 따라 어릴 적 추억이 인간 됨됨이에 보탬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차곡차곡 시간의 파도에 따라 쌓인 추억이 곧 지금 나의 여러 모습 중 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좋은 추억은 가끔 밑 독이 빠진 듯한 나의 허전한 마음을 온전히 채워 준다. 나쁜 추억도 마찬 가지다. 시간이 요동을 치며 흐른 뒤 좋지 않았던 추억이 결국에는 좋은 추억으로 탈바꿈되기 때문이다. 가끔 극복하기 힘든 기억은 상당한 노력과 시간의 힘을 빌려 극복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의 뇌는 참으로 특이하면서 영원히 파헤칠 수 없는 거대한 비밀을 가지고 있는 블랙홀 같다.
추후 아이가 자기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고뇌하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그 추억이 어느 정도 삶의 길잡이가 되어 아이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추억이 아이 사고에 한계를 긋지 않았으면 한다. 과거의 틀 안에서 쳇바퀴를 도는 듯한 삶을 사는 인간이 되기보단 그 추억을 발판으로 고독을 즐길 줄 아는 한 인간으로 자랐으면 하는 나의 이기적인 바램이다. 나쁜 기억 좋은 기억 모든 것을 한데 아울러 세상을 헤쳐 나가는데 힘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아이와 둘이 다시 여행을 하려 한다.
<엄마 혼자 감성에 흠뻑 젖어 헛다리 짚다.>
이번 주부터 국제학교는 6일 정도의 잠깐 텀 방학을 가진다. 주말을 포함하면 8일 정도 된다. 아이와 난 또다시 무이네를 가기로 했다. 9개월간 집 안에만 갇혀 있던 아이와 난 술렁이는 마음을 풀어헤치며 여행가방을 꾸렸다. 아이는 아침 7시부터 자기 방 한가운데 가방을 펼쳐 놓은 채 종일 이것저것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여행은 다음날 가는데 말이다. 조그만 아이도 터져 나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장난감, 책, 스케치북, 강아지 인형, 스노클링 장비까지 나름 꼼꼼히 차근차근 준비했다. 아이는 온몸으로 설렘임을 티 냈다.
베트남에서 무이네로 가는 방법은 버스, 슬리핑 버스, 자가 차이용, 오토바이, 기차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대중교통은 피하기로 했다. 자동차를 랜트했다. 호찌민에서 4시간가량의 거리이나 도로에 차가 한산했다. 3시간 30분 만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번에 작은 리조트를 선택했다. 쉬고 싶었고 코비드로 아파트 친구들과 슬립 오버까지 함께하는 사이가 되어 버린 아이를 좀 진정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푸른 하늘 위에 구름처럼 둥둥 떠 다니고 있는 아이의 마음을 조금 가라 앉혀 주고 싶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무언가를 하기보단 조용히 바다를 보며 둘이서 우정을 쌓고 싶었다.
아이가 부쩍 컸다는 느낌이 들었고 더불어 아이의 마음도 궁금했다.
뭐 우선 여행 가기 전 나의 바램이 그랬다는 것이다.
단조로운 해바라기 사랑.
밍밍한 일상에 모처럼 소금의 짠맛과 설탕의 단맛을 첨가하고 싶었다. 앞이 뻥 뚫린 바다 지평선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어도 보고 싶었다.
짐을 풀고 수영장 쪽에 있는 아이를 찾아 나섰다. 가볍게 선크림과 모자 하나를 들고선 슬리퍼를 신고 따박 따박 걸었다. 리조트 길 옆 정원에 다람쥐가 이 나무 저 나무를 타며 내는 소리에 움찔했지만 곧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분수대 안에는 작은 갈대들이 덤 성 덤 성 심어져 있었고 맑은 물 저 아래에는 제법 큰 자라 한 마리가 어그 정 어그 정 물밑을 거닐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저만치에서부터 들려왔다. 리조트가 아늑하고 조그마하다 보니 수영장의 위치와 해변가가 꽤 가까웠다. 아이를 찾기 위해 수영장 이곳저곳을 살피는 도중 눈앞에 펼쳐진 수영장 모습에 난 나의 눈을 의심했다.
넓게 펼쳐진 바다와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기준으로 은빛 파도가 출렁이는 모습에 감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아이는 비슷한 또래 누군가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하며 환한 미소를 얼굴에 한가득 내 짓고 있었다. 순간 나의 머릿속에 담겨 있던 나만의 망상과 환상이 동시에 짱 그랑 소리를 울리며 산산이 부서졌다.
수영장과 해변가에 학교 친구들로 붐비었다. 동생과 누나 그리고 형들도 있었다. 마치 호치민 집을 해변으로 순간이동시킨 느낌이었다. 같은 학교 친구들. 같은 아파트 사람들 그리고 국제학교 선생님들까지. 평상시에 학교 생활을 홀로 그럭저럭 잘 다니고 있고 또 아이 개인 활동에 크게 관여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라 나만의 의도적인 분리는 가능했으나 친구를 좋아하는 아이는 불가능했다. 한적하고 잔잔한 여행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아침 6시부터 수영복을 입고 해변가로 향하는 아이는 언제나 처 럼 조식 후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바닷가와 수영장을 넘나들며 흥분과 들끈 기운을 꽉 채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도착한 Sa*** 리조트에는 유달리 외국 사람이 많이 붐볐다. 국제학교 방학 기간 동안 답답했던 호치민 하노이 거주자들이 집에 머물기보단 국내 여행을 택한 듯했다. 나와 우리 아이처럼. 최근에 코비드로 상황이 어수선 해지면서 다낭 보다 무이네 쪽을 많이 선호했나 보다.
둘이 가는 여행에 주말은 항상 피하는 편이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무이네 해변은 한산한 듯하면서 분주했다. 친구 하나가 오늘 체크 아웃을 하면 연이어 아파트 친구가 체크인을 했다. 아이는 먹는 것을 마다 할 정도로 영혼을 어디엔가 맡겨 놓고 노는 듯했다. 베트남 국내 여행 중 냐짱이나 푸쿽에서 한두 명의 친구들과 같은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만난 경험은 왕왕 있지만 이번처럼 학교 선생님들의 단체 여행까지 겹친 리조트에 머물게 된 경험은 처음이다.
망상과 환상의 헛다리를 짚은 난 아이로부터 처참히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게다가 샌드 플라이에게 다리 한쪽까지 헌혈당했다. 리조트에서 연고를 받아 간신히 간지러움증은 해결되었다. 체크 아웃 하루 전날은 유도를 함께 하는 친구가 체크 인을 했다. 다음날 오전까지 격렬하게 놀아준 탓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는 마치 전사를 한 듯했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다리, 제법 길어진 손가락과 발가락을 보며 다시 한번 헛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짝짝이 양말과 보색 관계의 양말을 신고 학교 가기를 좋아하는 아이. 화려한 하우스 티(팀 별 티셔츠)를 입고 학교에 가고 싶어 목요일과 금요일을 기다리는 아이. 함께 살고 있지만 어떤 아이 인지 잘 몰라서 상담 때마다 잘 모르 겠다고 답변하고 오는 나를 엄마라 불러 주고 있는 아이. 난 그런 아이와 함께 동거 동락하며 한집에 거주 중이다.
매일 하루에 수천번씩 나로부터 아이를 내려놓기 위해 온갖 애를 쓰고 있다. 무심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가지고 태어난 그 힘을 그대로 존중해 주고 싶어서. 그 방법을 몰라 매번 깊고 깊은 우물 바닥 아래에 홀로 가라 앉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의 삶을 위한 나의 길을 찾아 하루하루 새롭게 살고 있으면 아이도 옆에서 자기 삶을 찾아 가리라 믿고 있다. 막연한 믿음이긴 하지만 믿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로 했다.
어느덧 친구를 더 좋아하게 된 아이. 1년 혹은 12달이나 남아 있는 생일을 걱정하고 파티를 계획하는 아이(12월 생이다). 할 것을 해야 하지만 하기 싫어 책을 집어 드는 아이. 함께 같이 커가고 있는 상황이기에 엄마가 되고 난 후 엄마라는 사람의 나이와 아이의 나이가 어쩌면 동년배 같은 친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문 드문 든다.
무사히 호치민에 귀가했다. 계속해서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