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말을 안 걸면 좋겠다
부쩍 "버겁다"는 말을 많이 한다.
실제로 그렇게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임신으로 인한 체력 저하 (임신 13주. 아직 입덧 중)
+ 10개월 아기 케어
+ 남편 케어 및 집안일 (한 달간 남편이 원인 모를 기침을 하고 있다)
+ 길이 보이지 않는 연구 1 (도무지 앞으로 가지 않는 이 큰 배를 어찌한단 말이냐.)
+ 안될 것 같은 연구 2 (가능성이 있단 말이냐. 왜 이 사태를 돌파할 아이디어는 생각 안 나냐.)
+ 리비전 해야 하는 연구 3 (리뷰도 아직 잘 이해가 안 가는데. 늦게 전에 리비전 시작해야 하는데.)
+ 잡서치와 불안감 (한국이건 미국이건 지원을 해야 할텐데. 얼마나 더 많은 과정을 거쳐야 자리를 잡게 될까)
+ 실적을 뽑아내야 한다는 압박 (대체 포닥 동안 논문 한편 없이 뭘 한 것이냐)
= 버겁다
사람들과 만나면 말이 자꾸 세게 그리고 짧게 나온다. 예를 들면,
"여행 오신 건데 귀국 전까지 재밌게 놀러 다니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주말인데 일하지 말고 재밌게 보내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걸 "다음엔 주말 라이팅 모임에 절대 오지 마세요. 노세요."라고 말한다.
"아기 돌잔치는 어떻게 할 예정이에요? 돌잡이는 하실 거예요?"란 아이 없는 누군가의 악의 없는 질문에
'제발 아무것도 물어보지 마'라는 표정을 하고 "딱히 안 할 거에요"라고 답한다. 사실 가족끼리 간단하게 할 생각이 있는데 구구절절 이야기하기가 힘들다.
같은 말이여도 좀 더 예쁘게 친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한다.
리액션하기가 힘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도 질문하지 않는다.
체력이 부족하고 에너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하다.
생각해보니 첫째와 18개월 터울로 둘째를 임신한 언니가 만삭이었을 때 놀러 갔었는데, 그 언니 말투가 딱 이랬다. 유난히 엄마에게서 안 떨어지고 예민한 아기를 키우던 아는 아기 엄마의 말투도 딱 이랬다.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되는데, 나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해야 하는데, 자책감이 든다.
남편은 나보다 배로 집안일을 하고 아이도 나보다 많이 보고 박사 마지막년차 졸업과 취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도 계속 기침이 안 낫고 있다). 우리 둘 다 힘들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베어 문 것 같다. 소화불량.
그냥 내려놓으면, 좀 나을까. 그렇다면 내려놓고 싶다.
운동을 꾸준히 하면 좀 나을까. 그렇다면 운동을 해야겠다.
누가 나 좀 케어해주면 좋겠다.
아무도 말을 안 걸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