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의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클로이 자오 감독 덕분에 알게 된 시다. 그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영화 <이터널스>의 비전을 보았다고 한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본다” 너무나도 작은 크기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서사를 담고 있다. 처음에는 아주 커다란 암석이었을지도 모른다. 암석은 오랜 시간 동안 바람과 비를 맞고 천천히 스러져 지금의 모래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에는 바다에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 알의 모래에도 서사가 담겨 있고, 한 송이 들꽃도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지금 내 옆을 지나간 저 사람에게도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을 테다. 나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이야기를 향한 감독의 애정을 보았다. 한 편의 재밌는 이야기부터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까지. 감독은 그 이야기들을 모두 꺼내 보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헌사가 된다. <프렌치 디스패치>가 다뤘던 4개의 기사에는 기사의 주인공을 향한 애정이 서려있다. 새저랙 기자는 프랑스의 조그만 마을 앙뉘 쉬르 블라제의 면면을 들여다본다. 이 조그만 마을에는 작은 악동들이 지나가는 노인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시체가 강물에 떠내려오기도 하며, 과거나 지금이나 소매치기 골목은 사람만 바뀔 뿐 달라진 게 없다. 비록 꽃집 같은 건 없지만 새저랙은 매력적인 이야기라고 자부한다. J. K. L. 베렌슨 기자는 예술 분야를 담당한다. 그는 천재적인 예술가 모시스 로젠탈러의 작품 ‘콘크리트 걸작’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살인을 저지른 이 예술가는 감옥에서 걸작을 완성시킨다. 그의 뮤즈가 된 교도관 시몬과 로젠탈러의 예술성을 알아본 대담한 미술상 카다지오, 그리고 정신이상으로 고통받는 예술가 로젠탈러는 하나의 멋진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베렌슨 기자는 끝에 가서 자신이 로젠탈러의 20년 전 연인이었다고, 잠시 그와의 추억을 회상하러 여행을 다녀왔노라고 밝힌다. 담담히 창가 커튼을 들추며 말하는 베렌슨 기자는 끝까지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처음 맛본 죽음의 맛은 매혹적이었습니다
열렬한 젊음을 담아낸 기사도 있다. 정치와 시 분야를 담당하는 기자 루신다 크레멘츠는 학생 운동 현장을 취재한다. 크레멘츠는 글쓰기에 방해가 된다며 고독을 자처하지만, 학생운동을 취재하던 중 학생운동의 리더 제피렐리와 가까워진다. 권위에 반항하고 자유로운 성을 외치며 활동하던 제피렐리는 불의의 사고를 겪고, 그렇게 크레멘츠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끝이 난다. 기자는 ‘너무 젊어서 죽은’ 제피렐리의 마지막 낙서를 읽은 후 기사를 마감한다. 로벅 라이트 기자는 어느 토크쇼 패널로 등장해 자신이 작성했던 기사를 들려준다. 뛰어난 동양인 셰프 네스카피에 경위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날, 경찰서장의 아들은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경찰서장에게 최고의 요리를 대접해왔던 네스카피에 경위는 괴한들의 은신처로 독이 든 음식을 전달하는 의무를 맡게 된다. 네스카피에 경위는 괴한들이 음식을 먹게 하기 위해 직접 그 음식을 먹는다. 후에 셰프는 자신은 이방인으로서 남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처음 맛본 죽음의 맛은 매혹적이었다고. 로벅 라이트는 이 문장을 넣을지 말지 고민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편집장 아서 하위처 주니어는 그 문장을 넣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한다.
말하자면 이야기는 곧 헌사다. 각 이야기에는 주인공을 향한 애정 그리고 짙은 그리움 같은 것이 뒤섞여 있다. 편집장의 죽음과 함께 부고 기사는 시작된다. 부고 기사는 편집장이 어떻게 해서 모두의 애정을 담은 이 잡지를 창간하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 애인이자 천재적인 예술가를 추억하고, 열렬한 젊음을 가졌던 누군가를 기억하며, 외로운 요리사의 고독에 공감하면서, 그리고 누구보다도 잡지와 글을 사랑했던 편집장을 추모하면서 이야기는 남게 된다. 액자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이야기들은 화자이기도 한 기자들이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나 이야기에 담긴 죽음과 상실과 그리움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웨스 앤더슨 감독이 가진 특유의 유머 덕이다. 강박적인 대칭, 마치 용의자를 경찰서에 세워놓고 찍은 것 같은 기하학적 인물 배치(데이비드 보드웰)와 배우들이 선보이는 연극적 연기는 웨스 앤더슨 감독만이 지닌 하나의 스타일이다. 그의 스타일은 영화를 형식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유머러스하게 만든다. 이는 버스터 키튼이 만들어 낸 유머와도 같다.(데이비드 보드웰) 버스터 키튼은 늘 딱딱한 얼굴로 능청스럽게 슬랩스틱을 구사한다. 시종일관 굳어 있는 그의 표정은 상황을 한층 더 재밌게 만들어주는 셈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이 선보이는 유머도 이와 같다. (유독 이번 영화에서 감독이 자신의 스타일을 강하게 밀어붙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좋다. 만세!!) 감독이 만들어낸 형식은 죽음과 상실과 그리움을 슬그머니 뒤로 가게 만든다. 하지만 여전히 이야기 안에 존재하는 그 어둠을 우리는 계속 반추하게 된다.
닥쳐
영화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로 향한 감독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야기와 글이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모든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다. 평범하고 작은 마을, 미치광이, 길거리의 사람들, 반항하는 이들, 예술가들, 글 쓰는 이들의 이야기. 영화에는 숨겨진 이야기들도 있다. 베렌슨 기자는 후에 가서 예술가 로젠탈러와 과거 연인 사이였다는 걸 밝힌다. 그와 있었던 일화는 베렌슨 기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중에 툭 튀어나왔다가 다시 사라진다. 어쩔 수 없이 쇼걸이 되지 않았냐는 경찰서장 아들의 질문에 닥치라며 차갑게 대답하지만, 어떤 색의 눈을 가졌는지 궁금하다고 하자 자신의 눈을 보여주는 쇼걸(시얼샤 로넌)의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편집장이 세상을 떠나도 그는 이야기로서 남고 프렌치 디스패치가 폐간되어도 이야기는 끝없이 전달될 것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그 모든 이야기에 애정을 드러내며 헌사를 바친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글을 향한 애정도 드러낸다. 어떤 문장들은 삼켜진다. 너무 어둡다는 이유로 보는 이를 심란시킬까 두려워하며 삼켜진다. 하지만 감독은 그런 문장들마저도 꺼내 보라며 독려한다. 이 영화가 글을 위한 헌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모두의 이야기를 위한 헌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