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댄스곡 보다는 발라드가, 발라드 중에서도 슬픈 가사의 노래가 내 구미를 당긴다. 좀 더 말해보자면, 애처롭거나 고독하거나 씁쓸하거나 회의적인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가사에 심취하는 걸 즐긴다.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간다든지, 어렴풋이 인지하는 내면의 심해를 유영하든지, 혹은 상상 속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식으로 가사와 멜로디에 푸욱 빠진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를 들으면 특히 그렇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바람에 흩어져버린, 허무한 내 소원들은
애타게 사라져간다
어릴 적, 이뤄질 것이라 믿었던 ‘허무한 내 소원들’을 헤아려본다. 사랑은 변하지 않을 거야. 부모님은 지금처럼 늘 건장하실 거야. 나는 언제까지나 젊고 예쁠 거야. 꿈을 꾸면 이뤄질 거야.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펼쳐질 거야. 나에게는 아름다운 일들만 일어날 거야. 꽃길만 걸을 테야..... 나이가 들면서, 이미 여러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짐을 목도했다. 허무한 소원들은 바람에 흩어져야 마땅함을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할 줄 알았던 것들이 때가 되면 사라지고 흩어진다는 섭리는 참 씁쓸하다. 그 씁쓸함에 취하는 것은 나에게 꽤 낭만적인 일이어서 나는 이 부분을 꼭 같이 부른다. 이소라의 목소리에 얹히는 순간 허무함과 쓸쓸함이 배가된다.
내게는 소중했던, 잠 못 이루던 날들이
너에겐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설레고 벅찬 날들이 내 것이듯, 당연히 너의 것이기도 할 거라 믿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적 없었다고 뒤통수 제대로 치는 연인에게,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아, 우리의 추억은 다르게 적혔구나, 인정하고 놓는 수밖에. 냉정과 열정 사이 어디쯤에서 사랑이 끝났다는 걸 인정할 용기가 없었던 나를 떠올리며 어김없이 회한에 젖는 구간이다. ‘사랑이 비극이라는 걸 안다는 건 꽤 어른스러운 일이야. 희극의 주인공도, 비극의 주인공도 되어봤으니 사랑에 대해 한 수 읊을 수 있는 거지.’ 사랑의 비극에 대하여 이런저런 사유에 빠져드는 것 또한 나에게 꽤 낭만적인 일이어서 인생의 단맛 쓴맛 다본 노련한 여배우처럼 굴어도 본다.
이 노래가 시인들이 뽑은 제일 시적이고 아름다운 노랫말 1위로 뽑혔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후로 가수 이소라가 아닌 작사가 이소라를 다시 보게 됐다. 언젠간 이런 노랫말을 혹은 시를 써보고 싶다는 바람도 가져본다. 어쨌든, 무엇이든, 자꾸 쓸 궁리에 빠져있는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