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공동체에서의 소모임이 하나둘 늘면서, 속하게 된 단톡방 역시 불어났다. 외로운 코로나 시절을 견디는 와중에 핸드폰을 잠시만 내려놨다 다시 열어도 카톡이 금세 쌓여있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잘 아는 것도, 그렇다고 잘 모르는 것도 아닌’ 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절한 타이밍에 적당한 답톡을 남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웠다. 진심을 눌러 담은 카톡일수록 괜한 소릴 하는 게 아닐까 망설여졌다. 용기 내어 전송을 누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용기 낼 필요 없는 의례적 인사였다. 그러니 소통을 해도 한 것 같지 않았고, 그렇게 가끔 드러내는 존재감조차 수많은 카톡에 묻히지 일쑤였다. 속해 있지만 속해 있지 않은 찜찜함이 마음 저변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오프라인 모임은 가로막혔고, 언니공동체와 함께하는 애정이 커질수록 온라인 모임은 선택의 여지없이 내 삶의 일부가 됐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친구 세 명과 오래도록 이어온 단톡방이 폭발하는 일이 발생했다. 오프라인 만남이 자주 불발되는 동안 서로 다른 관심사는 다양성의 즐거움보다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 상태였다. 영혼 없는 대꾸를 하느니 침묵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고, 뒤늦게 진심을 털어놓았을 때는 이미 서로의 마음이 많이 닫힌 채였다. ‘가깝다고 하는 친구끼리도 이렇다면, 온라인상에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야 할까.’ 한차례 큰 혼란이 왔다. 온라인에서 그것도 다수와 한 번에 만나야 하는 단톡방에서, 때때로 ‘본래의 나’가 아닌 ‘기대되는 나’로 존재해야 했던 딜레마도 머리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
나는 마음이 통하는 소수와 있을 때 한껏 수다스럽지만, 다수와 있을 때는 본의 아니게 경청하는 쪽이 된다.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탐색하는 것이 내가 주도해 대화를 이어가는 것보다 더 흥미로웠다. 한마디로 굉장히 소극적이 된다. 자신 있게 치고 나가는 스타일도 못되니, 그저 흐름을 지켜볼 때가 많다. 오프라인 모임에서는 눈을 맞추든 고개를 끄덕이든 추임새를 넣든 말을 대신해 얼마든지 마음을 나눌 수 있겠지만, 온라인 모임에서는 그 모든 것을 말로, 글로 꾸역꾸역 표현하기 위해 마음과 시간을 몇 배로 써야 했기에 버겁기도 했다.
있는 그대로의 심정을 다독이면서
낙오자가 된 듯 불안했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한편,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공통의 관심사를 매개로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며 활동을 지속하고 싶은 건 분명한 내 욕구였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이상, 온라인이라는 제한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해야만 한다. 고로 내가 단톡방에 속해 있으려면 '멤버로서 소통하려는 최소한의 의지'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렇지 않을 경우 상대가 느낄 거절감과 내가 느낄 외로움은 마땅히 감내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그러니 내가 기꺼이 책임을 감당하고 싶은 단톡방에만 남아서,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의 최선으로, 진심을 담아 소통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받아들여야 할 부분을 인정하면서
방향성을 한줌 움켜쥐었다.
이즈음 언니공동체 내에서도 ‘단톡방 피로도’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선택과 집중을 위해 단톡방 다이어트를 하는 분위기가 전도되었다. 힘에 부치던 활동 몇 개를 정리하며 나역시 그 과정을 한 차례 치렀다. 바이러스만큼 갑작스레 퍼져버린 비대면 열풍 속에서, 나 자신을 지키는 것과 마땅히 변화해야 할 것 사이에서 맞닥뜨린 마흔 한 살의 성장통은 이렇게 일단락됐다.
앞으로 더 무엇이 변할까? 그 변화의 흐름에 내가 걸음을 맞출 수 있을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걱정과 두려움이 달려들지만, 그때마다 오늘처럼 나의 나됨을 더욱 들여다볼 수 있기를,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직시함으로써 내 목소리에 가장 먼저 귀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란다.
* 언니공동체 : 온라인 커뮤니티 이름, "나를 먼저 키우고, 그 힘으로 우리를 키우는 여성들의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