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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UP주부 Jan 15. 2021

식기세척기 생활자 입문기

# 오늘의 느낌 : 만족스럽고 신나는



사건의 전말을 되짚어보자면, 남편이 설거지를 도와주는 게 아닌 마땅히 해야 할 집안일로 여기고 동참하게 된 지 몇 달 안 된 시점이었다. 얼마 전부터 식기세척기를 알아보더니 사자고 먼저 제안을 하더라. 주변에서 많이 권하던 차에 남편의 생각도 그러하다니 참 순조롭게 여겨졌고, 비로소 당신이 설거지의 고충을 이해하고 나를 위해주는구나 내심 반가웠다. 설치와 관련하여 최선의 공간 활용을 고려하기 위해 내가 12인용과 6인용을 두고 망설이는 사이 며칠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을 차려먹으며 남편이, 이번에도 먼저, 말을 꺼냈다. 6인용보다 설치부담이 없는 3인용을 사는 게 어떠냐는 거다. 뭐? 3인용 식세기가 있다고? 설치를 안 해도 된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제3의 선택지를 듣고 뇌가 잠시 멈췄던 것도 같다. 그런 물건이 정말 상용화되어있는지, 쓸 만은 한 건지 당췌 궁금하지도 않았다. 늦지 않게 재가동된 뇌에 파워 부스터를 창작한 뒤 당차게 쏘아붙였다.      


“3인용은 1인 가구에나 맞는 거지! 하루 종일 나오는 설거지 부담을 덜어주지도 못하는데 그걸 뭣하러 사!”   

   

꽤 잘 받아쳤다며 자족한 것도 잠시, 눈도 깜짝하지 않은 남편은, 내가 야심차게 꺼내든 파워 부스터 비슷한 것도 필요 없다는 듯, 심상히 뱉어낸 한 마디로 나를 KO 시켰다.      


“그럼 3인용 사서 나만 쓰면 안 돼?”     


그 말을 듣고, 이번엔, 마음이 멈췄다. 결혼생활의 지난한 부침으로 이미 굳은살이 장착된 나는, 다행히 오래지 않아, 마음에 난 구멍을 메워 기능을 회복시켰다. 하지만 그렇게 자정능력을 십분 발휘했어도, 여지없이 한동안은, 마음의 온기가 싹 빠진 채 심드렁할 수밖에. 그날의 일기는 ‘15년 가까이 산 세월이 허무해지는 순간을 마주하는 일은 여전히 참 슬프다.’로 끝을 맺고 있다.      




당시의 심상이 정직하게 담긴 문장임에 틀림없지만, 사실, 지금 나는 이 문장을 복기하며 좀 오버였다고 자평하는 중이다.      


말하자면,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쯤, 마음을 추스르고 뇌에 한 번 더 파워 부스터를 장착한 나는, 괘씸죄를 단호히 다스리는 판사라도 된듯 더욱 업그레이드된 당참으로


“나는 12인용으로 결정했으니까 12인용으로 알아보고 얼른 결제해.”    

  

라며 엄포를 놓았고, 그야말로 군소리 없이 12인용으로 방향을 수정한 그는, 금액이 커졌으니 복지포인트가 지급되는 1월에 구매하자는 의견을 더하는 것으로 내 독단을 그저 받아들여 준 것이다. 써본 친구들이 그러는데 어디 브랜드가 좋다더라 슬쩍 흘린 말까지 접수해 1월이 되자마자 지체 없이 주문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사건이 흘러가는 걸 보자니, 나는 남편이 했던 그 말을, 오해를 걷어내고, 다시 들여다봐야했다. 내가 남편의 의도대로만 듣지 않고, 내 감정을 실어서 듣지 않았나? 내가 속으로 고민을 하던 상황이 남편 입장에서는 필요 없어서 결정을 안 내리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필요하니까 나라도 사서 쓰고 싶다’는 본래의 의도가 와전된 것이라면? 감정에 떠밀려 급하게 삼켜지고만 질문들을 찬찬히 내 되새김질 하며, 그것이 우리의 관계에 양분이 될 때까지 곱씹었다.      




너무 좋게만 해석한 거 아니야? 음, 그렇. 하지만 좋게 해석하는 게 나로선 최선의 생존방식이다. 다른 해석이라고 해봐야, 날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는 영양가없는 억측일 니까. 합리적인 판단까지만 에너지를 쓸줄 알지, 말 한마디의 공감과 배려는 자주 놓치는 사람이 내 남편이고, 결혼생활 십년이 넘도록 의 그러함을 깨닫고 받아들이기까지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남편을 충분히 겪어냈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다시금 발이 걸려 넘어지는 나다.


남편과의 더 나은 소통을 위해선 아무래도, 마음의 하드웨어를 뒤늦게 수리하는 것보다 마음의 소프트웨어를 미리 손질해 두는 이 훨씬 유익할 것이다. 그날 내 마음의 근본적인 오류는, 남편의 한마디로 허무하게 뚫려버린 구멍 때문이 아닌, 애초에 잘못 입력된 코딩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결혼생활 동안 쌓인 ‘그의 언어사용 습관’에 대한 빅데이터를 검토하고, 분석 결과에 따라서만 적절히 듣고 반응하도록, 한 번 더 코딩을 수정해본다.       




깨끗해지기를 기다리는 그릇들로 개수대가 봉긋하게 채워질수록, 설레는 순간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상기된 나를 보자니 웃음이 난다. 너를 만나기까지, 남편의 어록이 추가되고 나는 또 걸려 넘어졌으며, ‘기다리고 결제하고 수납장을 리폼하고 정리하고 설치하는’ 과정 역시 수월하진 않았다. 그래서 더, 식세기의 ‘조용하고 강한’ 능력에 기대어 누리는 해방감이 값지다. 모든 스토리를 웃으며 회상할 수 있는 해피엔딩이라 참 다행이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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