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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필 Oct 25. 2022

어느 날, 목에 바늘이 들어왔다

"예약하셨나요?"

"네..."

"오늘 생검 검사 있으시네요"

"네..."


베이지색 면바지 위에 검은색 니트. 입고 온 일상복을 주섬주섬 벗어서 탈의실 서랍장에 개어 넣는다. 분홍실로 병원 로고를 새긴 흰 가운 하나를 집어 든다. 조용히 환복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선다. 이상한 일이다.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인데 통증이 더 심해진 기분이다.


"여기 누우시고요. 네, 조금 더 위로요”

"....."

"아후. 많이 부었네요. 어떻게 참으셨어요?"

"…… 얼마나 걸리나요?"

"수술이 아니니까요. 오래 안 걸립니다"


무심한 듯 분명한 어조였다. 의사의 눈은 초음파 모니터에 가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내 목덜미를 살피느라 분주했다. 왼쪽 목선 위에 달처럼 불룩하게 솟아오른 자리. 내 몸이지만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알만 한 이의 손을 빌렸다. 잠시 후. 그 손에 기다란 바늘 하나가 들렸다. 본 중에 가장 긴 바늘이었다. 눈대중으로 보기엔 카페에서 주는 빨대 길이와 흡사했다.


"지금부터 말씀하시면 안 되고요. 좀 아픕니다"


 





갑상선 중심바늘 생검 검사. 그날 병원에서 받은 검사의 이름이다. 의심되는 결절 부위에 조직검사용 바늘을 찔러서 양성인지 악성인지 진단하는 거라고 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갑상선 문제일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어리석었고 오만했다. 그런 병은 남의 일이라는 근거 없는 자만이 폐부 깊숙이 깔려 있었다. 어느 날인가 자고 일어나 보니 말을 하기 힘들 정도로 목이 심하게 아파왔다. 환절기마다 의례 겪는 목감기인 줄로만 믿었다. 자주 가는 동네 가정의학과의원에서 처방전을 받았다. 약국에서 타 온 색색의 감기약을 단숨에 털어 넣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번 감기는 왜 이렇게 지독한 거야"


그렇게 일주일. 그 후로 또 일주일. 아무리 약을 성실히 챙겨 먹어도 통증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날로 더 고약해지는 형국이었다. 그 지경이 되도록 부단히 외면했다.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히 지나쳐버렸다. 아이는 이제 겨우 두 돌이 지났고, 남편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새 일터로 날아가고 없었다. 적도를 지나 서너 달 뱃길 위에 띄워 보내야 하는 이삿짐. 컨테이너 해외 이사 준비로 반쯤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살던 집도 정리해야 하고 새로 장만해야 할 것도 태산인데. 목 좀 아픈 게 뭐 대수라고.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꽤 되신 것 같은데요?"

"아픈 지는 좀 됐는데요. 감기인 줄만 알았거든요"

"저희 병원 말고 좀 더 큰 병원으로

가보시는 게 좋겠네요"


그제서야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암이면 어쩌지. 평생 호르몬제를 달고 살아야 하면 어떡하나. 온갖 근심이 먹구름처럼 뇌리를 덮쳤다. 다른 건 몰라도 건강 하나는 자신했었는데. 모든 걸 다 잃어도 몸뚱이만 성하다면 뭐든 헤쳐나갈 수 있다고 다짐했었는데. 고작 서른 후반에 이런 시련이 오다니.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어때요? 약은 좀 듣던가요?"

"네, 선생님"

"처음엔 결절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걱정을 좀 했는데요.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급성 갑상선염. 다행히 암은 아니었다. 한 며칠.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밥 잘 먹고 약도 잘 챙겨 먹었더니 언제 아팠냐는 듯이 거짓말처럼 통증이 가셨다. 굵은 알사탕 하나 목에 박힌 것처럼 보기 싫게 튀어나왔던 부위도 차츰 가라앉았다.  


"초음파 결과도 지난번보다 많이 좋아졌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멀리 나가신다 하니,

해외에서 상비하실 수 있게 약은 넉넉히 드릴게요.

한국 들어오실 때마다 정기 검진 꼭 받으시고요"



그런 일이 있고 얼마 후. 서점에 들러 책을 몇 권 데려왔다. 그때 집어 든 책 중에는 마르타 자라스카가 지은 <건강하게 나이 든다는 것>도 있다. 건강에 관한 저서를 내 손으로 골라보긴 난생 처음이다. 새로운 병을 얻지 않았다면 여전히 관심 두지 않았을 것이다. 시금치를 연상케 하는 연초록빛 표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두툼한 책장을 열어 목차부터 주욱 훑었다. '그래 이거지. 호르몬' 1부에 들어있는 '오래 사는 사람들의 호르몬'이라는 소주제가 눈길을 끌었다.


옥시토신이나 세로토닌 같은 사회성 호르몬을 늘려 건강을 개선하려면 다른 사람들과 신체 접촉을 많이 하라. 자주 파트너에게 입을 맞추고, 아이의 손을 잡으며, 친구들을 껴안아라. 서로의 등을 안마하라. 상대의 눈을 마주 보는 일을 잊지 마라. 그러면 두 사람 모두의 옥시토신 수치를 높일 수 있다. 게다가 ‘상대’가 개라도 효과가 있다.     



어느덧 그런 때가 되었나 보다. 건강하게 나이 드는 것을 고민해봐야 할 때. 강 건너 옆 마을의 불구경 같던 일을 온몸으로 껴안아야 할 때. 내게도 그런 때가 찾아온 것이다. 진정 믿어지지 않지만 내년이면 불혹이 된다. 40여년을 쓰다보니 구석구석 손 봐야 할 곳이 생기지만. 여전히 젊음에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순간순간 겁이 날 때가 있다.


두해 전 그 겨울날. 내가 갑상선 문제로 몸이 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던 어떤 이는 "그 병은 열심히 살아낸 자들의 훈장"이라는 웃픈 위로를 주었다. 사는 동안 내 육신은 어디에 또 어떤 훈장을 달게 될 것인가. 조금 두렵고.. 생각보다는 담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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