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지호의 아파트는 쿠르브부아(Courbevoie)에 있다. 파리에서 약 8.2km 떨어져 있는 이 도시는 이웃에 있는 퓌토, 뇌이쉬르센과 함께 라데팡스를 이룬다. La Défense를 다른 말로 하면 '파리의 부도심' 정도로 풀이되는데 지호가 이곳을 택한 이유는 단순하고도 명료하다. 파리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소음은 줄일 수 있는 곳이라야 했으니까. 거기에 몇 가지 보탤 수 있다면, 합리적인 거주비에 그럼에도 공간은 너무 비좁지 않길 바랐다. 바란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발품을 판 보람은 있었다. 과정이 수고스럽긴 했어도 결과적으로 쿠르브부아를 만났으니까. 다소 까다로운 지호의 조건을 충족하기에 쿠르브부아만 한 주거지는 없었다.
"쿠르. 브부. 아.... 쿠르브~~부아~~"
단비가 하나의 고유명사를 다양한 억양으로 발음하고 있다.
"어헛. 저기요, 거기 외부인! 신성한 식탁 위에서 지금 뭐하는 거임?"
부엌에서 냉장고 주위를 서성이던 지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단비를 부른다.
"뭐, 외부인? 지금 나를 불청객 취급하는 거지? 와, 킹받네, 유지호."
방금 전까지 식탁 앞에 구부정히 앉아있던 단비는 보란 듯이 허리를 곧추 세우며 지호에게 눈을 흘긴다.
"이보세요, 진짜 킹받는 건 나라고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들이닥치질 않나. 아니 그보다, 아까부터 그 유지호 소리, 계속 거슬려, 너!"
지호도 지지 않겠다는 듯 자분자분 할 말을 쏟아낸다.
"피... 유지호를 그럼 유지호라 그러지. 뭐라 그런담."
한풀 꺾인 단비의 목소리가 식탁 위를 낮게 맴돈다.
"너는 스물다섯. 나는 스물일곱. 그래도 계산이 안 돼?"
지호가, 자신의 키만 한 냉장고에서 채소 한 움큼과 달걀 세 알, 베이컨과 체다치즈를 꺼내며 묻는다.
"애걔걔. 스물일곱 유지호씨. MZ 맞아? 하고 다니는 건 고딩인데 사상은 영감님처럼 고루하다니까."
단비가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얄미운 표정으로 반격한다.
"큭. 뭐라고? 와, 졌다, 졌어~ 이 몸을 괴롭히고 싶어서 그동안 어떻게 참았냐, 백단비?"
지호가 웃는다. 그리고 말한다. 얄밉도록 해사한 얼굴로 다정하게 물어온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냐고... 이름도 불러주었다. 백단비. 백단비... 늘 부르던 톤으로 그렇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말들을 듣는데, 별안간 단비의 심장이 쿵-하고 떨어진다. 세상 무해한 눈빛과 친밀한 목소리. 장난스럽지만 어딘가 모르게 살가운 화법까지. 너무 다 그대로여서. 정말 다 유지호여서. 하마터면 단비는 그 자리에서 왈칵 울어버릴 뻔했다.
"그래서 왔잖아, 내가..."
단비는 속삭이듯 말했고, 지호는 듣지 못했다.
"응? 방금 뭐라고 그랬어?"
"아냐, 아무것도!! 와~ 쓰러지겠다. 아직 멀었어?"
"어, 다 됐어. 이제 그릇에 담기만 하면 돼."
"그럼 나 손 좀 씻고 올게."
"그럴래? 일어난 김에 거실 창 좀 열어주라. 이 집은 다 좋은데 주방에 창이 없는 게 흠이거든."
지호의 요청이 있기 전부터 단비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열세 평 남짓한 소형 아파트를 소꿉놀이 하듯 세분해 놓은 파리의 건축가는 어떤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었을까, 하고 상상하면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긴다. 미니멀한 침실과 거실. 딱 필요한 것들로만 꾸며진 욕실과 지호가 서 있는 아늑한 주방을 동선 따라 한 바퀴 빙 둘러 눈으로 훑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거실 창 앞으로 바짝 다가선다. 지문 하나 묻어있지 않은 맑고 단단한 유리에는 공룡 이빨처럼 생긴 희고 매끈한 손잡이가 달려있다. 끝이 아래로 쭉 뻗은 그것을 90도 위로 회까닥 젖혀서 단비의 몸 쪽으로 힘껏 잡아당긴다. 그러자 문짝만 한 창의 윗부분이 사선으로 떨어지면서 V자로 입을 쩍 벌린다. 그 순간 터져 나온 "후웁...하... 살 것 같아." 하는 단비의 탄성. 어떤 말로도 대체할 수 없는 기분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밤이다. 열린 문 틈 사이로 청량한 파리의 밤이 불어온다. 그리고 단비의 가슴속에도.
"얼른 와, 식기 전에 먹자."
이제 막 식탁 위에 접시를 내려놓은 지호가 거실에 서 있는 단비를 향해 손짓한다.
"응, 알았어."
대답은 했지만 단비의 발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이 불현듯 낯설어져서 단비는 자꾸만 확인하고 싶다. 저기 저렇게 서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몇 달 전 말도 없이 사라진 그 유지호가 맞는지. 혹시 지금도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왜 그러고 섰어?"
지호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온다.
"그냥. 신기해서."
단비가 알 수 없는 말을 건네며 천천히 다가간다.
"싱겁긴. 밥 두 번 해줬다간 아주 기절하겠다?"
지호가 먼저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칫. 누굴 먹보로 아나... 그래서 그런 거 아니거든."
어느샌가 다가와 식탁 의자를 빼는 단비 앞에, 지호가 수저를 가지런히 놓아준다.
"알았으니까 일단 드세요. 배 많이 고프다며. 오므라이스 했는데 괜찮지?"
음식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먹어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는 맛이었지만 뻔한 요리도 뻔하지 않게 하는 유지호니까. 오므라이스에 곁들인 루꼴라 샐러드에는 무슨 드레싱을 썼는지 한입 넣을 때마다 초록의 향미가 입안 그득하게 퍼졌고, 유부를 넣고 끓인 장국도 보기엔 별 거 없어 보이는데 뒷맛이 달짝지근한 게 감칠맛이 돌았다.
"요리는 언제 배웠어?"
마지막 한입까지 깨끗하게 비운 단비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묻는다.
"내가 누구냐. 나 마민카식당 고문인 거 잊었어? 국이 형한테 어깨너머로 배운 게 얼만데."
지호는 서슴없이 농담을 뱉다가 아차, 하는 얼굴로 쓴웃음을 짓는다.
"아~ 배부르다. 후식은 뭐 줄 거야?"
단비도 식어가는 지호의 표정을 읽었지만 애써 모른 체 넘긴다. 꼬투리를 잡은 김에 냅다 따져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게 왜 말도 없이 사라졌냐고. 해국 사장님도 수빈 언니도 모두들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지난 일들을 낱장으로 들춰가며 추궁할 수도 있지만 단비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 먹는다. 막상 눈앞에서 복잡하게 굳어가는 그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그런 마음이 싹 가신다.
"야, 너 여기를 무슨 식당으로 착각하고 온 거 아니지?"
"오! 그거 좋다! 영화 찍어보고 안 되면 홈키친 오픈하는 건 어때?"
"아주 안되라고 고사를 지내지 그러세요. 근데 숙소는 어디야? 체크인은 했어?"
"했잖아, 체크인. 두 시간 전에 한 것 같은데?! 나 짐 어디다 풀면 돼?"
오늘 지호는 한 마디로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발가벗겨졌다는 표현이 설핏 과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이 그렇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지호에게도 집은 아주 사적인 장소일 수밖에 없다. 그런 곳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단비에게 내보였으니 맨몸을 보여준 것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낯 뜨거운 경험이었을지 모른다. 일단 팩트는 그러한데, 그렇다고 마냥 불쾌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지호를 찾아온 단비의 마음이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를 마주한 지호의 마음도 하나의 결은 아니라는 것. 오늘의 해프닝으로 지호가 대면한 감정은 우선 여기까지다.
"자?"
본의 아니게 지호의 침대를 독차지 한 단비가 짧은 물음으로 어둠을 밀어낸다.
"아니."
거실 바닥에 이부자리를 펴고 누운 지호가 보이지도 않는 천장에 대고 답을 건넨다.
"오늘 진짜 이상한 날이다."
단비가 오늘의 소회를 한 문장에 담았다.
"어째서?"
지호도 같은 마음이지만, 구태여 물음표를 던진 이유는 단비의 다음 말이 궁금해서다.
"음... 말하자면 조금 긴데."
단비가 뜸을 들인다.
"너 말 많은 거 하루 이틀이냐. 어차피 일찍 자긴 틀린 것 같으니까 무슨 말이든 해 봐. 어디 얼마나 이상한지 들어나 보게."
이제까지 정자세로 꼼짝없이 누워있던 지호가 부스럭거리며 뒤척이는 소리를 낸다. 베개 대신 받치고 있던 쿠션을 옆으로 치우더니, 팔 하나로 머리를 괴며 최대한 편한 자세를 찾고 있다.
"그렇잖아. 겨울 프라하에서 만난 우리가 지금은 파리의 봄에 들어와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단비는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을 느끼며 목소리에 힘을 준다.
"난 또."
지호가 추임새를 넣듯 가볍게 받는다.
"에? 반응이 별로네. 그럼... 이 얘기는 어때?! 내가 말야. 몇 달 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거든? 처음은 우연이었어. 우연히 식당에서 한 번. 우연히 거리에서 또 한 번. 그렇게 한 번, 두 번 마주치다 보니까 세 번, 네 번도 보게 되더라고."
단비가 어려운 얘기를 꺼냈다. 지호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왜인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그러다 보니까 친해진 거야.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시답지 않은 장난도 쳤지. 늘 들어주고 항상 웃어줬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 같아. 그렇게 계속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여기서 반전! 겨울이 끝나가던 어느 날, 그 사람도 사라진 거야. 진짜야! 쌓인 눈이 녹듯이 스르륵... 아, 맞다. 더 대박인 건 뭔 줄 알아? 그 사람이 하루아침에 없어졌는데도 별로 밉지가 않은 거야. 왜냐하면... 왜냐면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거든. 정말 아무 사이도... 그래서 안 오려고 했거든? 정말 안 올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파리행 비행기 안이더라고. 그렇게 공항. 그렇게 여기... 어때? 오늘 진짜 이상한 날 맞지?"
장황한 고백이 끝났다. 어색함을 피하려 단비는 애써 더 태연한 척을 한다. 그런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서 지호는 난색을 표하는데,
"저기, 음... 단비야."
"뭐야, 왜 그렇게 불러? 하던 대로 해, 그냥."
"미안. 미안해. 그리고... 사과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
"그래? 그럼... 나 여기서 한 달만 있게 해 줘, 알았지?"
"야, 뭐?!! 잠깐만."
지호가 이불을 발로 차고 일어나 거실등 스위치를 켰다.
"앗, 눈부셔! 뭐야 갑자기!"
단비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며 소리친다.
"너야말로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한 달이라니!"
방금 전까지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모르던 지호였는데, 대책 없는 단비의 발언이 온몸에 낙수처럼 떨어지는 통에 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워워~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쫄지 마시고요. 하암... 나 이제 졸려. 자세한 얘긴 내일 합시다, 유지호씨?"
단비는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온 걸까. 앞으로 뭘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 지호는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지만 시간을 보니 벌써 자정을 지나 새벽 한 시에 가까워져 간다. 하는 수없이 다시 불을 끄고 자리로 돌아가 몸을 누이는 지호. 눕긴 누웠는데 머릿속은 어지러이 허공을 날고 있다. 애써 이성을 부여잡고 공중에 붕 뜬 상념들을 하나씩 끌어당겨 본다. 먼저, 단비의 말처럼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다. 대전제는 그러한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좀 꼬였다. 아무 사이도 아닌 두 남녀가 한 식탁에서 오붓하게 저녁밥을 먹었다. 밀린 대화를 주고받느라 식사 시간은 세 시간이나 걸렸다. 여기까지는 얼떨결이었다 손 치더라도, 지금은 또 어떠한가. 여전히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밤을 보내고 있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가 이렇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밤안개처럼 부옇게 피어오른 기시감이 지호의 속을 이리저리 헤집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밤은 너무도 고요하고, 그 사이 단비는 소록소록 잠이 들었는데 쉽게 잠들지 못하는 지호는 깊은 한숨 끝에 눈만 끔뻑이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오늘은, 이상한 날이 맞는 것 같다고 되뇌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