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마민카 09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수필 Jul 24. 2024

09_별을 쫓는 마음

#소설 연재

소란스런 거리를 둘이서 걷는다.

곁눈으로 본 누나의 얼굴은 여전히 앳되다. 실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맑은 피부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오른쪽 귓바퀴에 가려진 까만 점 하나. 잇몸이 훤히 드러날 때까지 까르르 숨넘어가게 웃는 버릇까지, 틀림없는 누나의 것이다. 지호는 누나의 손을 놓칠 세라 꿈에서도 바들바들한다.   


'안 돼! 내 손을 놓치면 안 된다고!! 같이 가~ 같이...'


그렇게 안간힘을 썼는데도 결국 또 놓쳐버린 손. 지호는 움켜쥔 주먹으로 가슴을 친다. 꿈인 걸 알지만 쉽게 단념할 수가 없다. 꿈에서라도. 한 번만이라도. 완벽히 붙잡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도리없이 놓치고 말았다. 지호는 아직 꿈속에 있다. 어디선가 몰려든 인파에 꼼짝없이 발이 묶인 나머지, 저만치 멀어져 가는 한 소녀의 뒷모습을 그렁한 눈으로 애타게 쫓다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는다. 그러다 서럽게 운다. 엉엉 소리를 내며 목놓아 울부짖는다.





잠에서 깨어나보니 베개천이 축축이 젖어있다. 익숙한 현상이다. 한동안 뜸하다 했던 꿈이 다시 나타났다. 반가울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쾌할 것도 없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눈가의 눈물을 맨손으로 훔치며 남은 잠을 몰아내는 지호. 도도록하게 부은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꾸욱 꾹 눌러 덮으며 의식의 꽁무니를 쫓다 보니 간신히 빠져나온 꿈이 부지불식간에 되살아난다. 무의식 중에 일어난 시각적 심상들은 도무지 꿈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해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지호는 오소소한 감촉이 어느 정도 사라질 때까지 침대 위에서 잠자코 기다릴 참이다.

그렇게 또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정신은 차츰 돌아오는데 창밖은 어스름하게 해가 기운다. 침대 헤드보드 위에 올려둔 네모 반듯한 소형 디지털시계 속에는 '20:37' 이라는 숫자가 가지런히 떠 있다. 이 무렵 파리의 일몰은 등장이 좀 늦되다. 3월 말에 썸머타임이 시작되고부터는 대놓고 늦장을 부린다. 지호는 밤 아홉 시가 다 돼서야 뉘엿거리는 해를 물끄러미 보다가, 가까스로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다.


"잠을 어떻게 잔 건지 당최 안 쑤신 데가 없네... 휴푸푸. 일단 좀 씻자, 씻어."


낮에 외출하고 돌아와 잠깐 눈 좀 붙이자, 하고 누웠던 것인데 그대로 네 시간이나 자 버렸다. 사실상 방전되었던 것. 덕분에 하루의 리듬은 예상치 못한 엇박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지호는 이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파리에 온 뒤로 잠다운 잠을 자본 적이 있었던가. 오래간만에 가져보는 개운한 기분이 마치 아침은 아니지만 꼭 아침을 만난 것처럼 가볍다. 그 꿈만 아니었다면. 그래, 그 꿈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깊이 잠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 또한 지호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인력으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한 미련의 부스러기는 입었던 옷가지들과 함께 빨래바구니 속으로 휙하니 던져놓는다. 그대로 욕실로 직진. 샤워기 레버를 올려 쏟아지는 미온수에 몸을 맡긴다. 샤아아~슈아아. 지호가 서 있는 한 평 남짓한 공간에 시원한 물소리만이 그득히 차오른다. 그래서 몰랐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금의 지호로서는 도통 알 길이 없기에.


쿵. 쿵쿵.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크림색 플랫슈즈에 연한 청바지. 그 위에는 올리브색 홀터넥 여름니트를 매치한 맵시 좋은 뒤태의 여성이 지호의 집 문밖에 서 있다. 26인치 여행용 트렁크와 함께.  


"여기가 아닌가. 크흠. 이상하네..."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려 봐도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풀 죽은 얼굴이 된 여자는 말 없는 철문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는다. 고개를 치켜들고 멍하게 한 곳을 응시하다가 애꿎은 머리칼을 헝클더니 두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는다. 그대로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양팔로 포옥 끌어안고 이리저리 흔들다가 그새 마음을 고쳐 먹었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한 뼘 가량 솟아있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아채듯 붙들고는 왔던 길로 대차게 걸어 나가는데, 몇 발짝 떼지 못하고 멈칫한다. 다시 휙 몸을 돌려 문 앞으로 돌아오더니 후우웁-하, 길게 심호흡을 하고 한번 더 쿵쿵.   

      

"키 엣 부 (Qui etes-vous)?"

- 누구세요?


벌컥 문이 열렸다. 젖은 수건을 어깨에 두른 말쑥한 얼굴의 지호가 마침내 문 밖의 그녀를 발견하고야 만다.


"뭐야, 백단비! 네가 왜 여기에..."


지호는 그 자리에서 몸이 굳었지만, 단비는 이제야 표정이 풀린다.


"와아... 유지호다! 안녕, 유지호. 살아...있었네?"






인간에게는 무수한 능력이 있다. 어떤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드러나지만 어떤 능력은 가지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잠재돼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직감'은 어느 쪽에 속할까. 특정한 상황이나 현상을 직면했을 때에 별다른 설명이나 수반된 증명 없이도 진상을 곧바로 느껴 알아차리는 감각. 지호는 그런 직감의 탁월함을 믿는다. 그러지 않고서야 도저히, 온몸에 감도는 이 기이한 감정을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유지호, 못 본 사이에 인심이 더 야박해졌네."

단비가 볼멘소리를 한다. 

"무슨 말이야?"

지호는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고 반문한다.

"답답이.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계속 이렇게 세워둘 거냔 말이지."


사람의 감정. 그러니까 감정의 변화는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 변화를 일으키는 요인은 대체로 밖에 있다. 그리고 그녀도 밖에 있다. 막 샤워를 마친 지호가 젖은 머리를 닦으며 현관을 돌아보았을 때.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듣고 문고리를 돌렸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동요하지 않았다. 지호의 일상을 뒤흔들 만한 요소는 파리 시내 어디에서도 감지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단비가 등장하기 전의 일이고, 앞으로는 기존의 흐름과 다르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걸, 지호는 직감하고 있다. 


"아, 내 정신. 잠깐만 기다려.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올게."

색 바랜 티셔츠에 5부 정도로 보이는 밴딩 반바지 차림을 한 지호가, 자신이 방금 빠져나온 곳을 가리키며 몸을 튼다. 

"잠깐만. 뭘 하겠다고?"

단비는 귀를 의심한다. 

"왜? 또 뭐가 잘못됐어?"

이상 기류를 감지한 지호는 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단비의 대답을 기다린다. 

"어... 뭐 꼭 그렇다기보다... 그래, 치안! 파리 치안 장난 없다고 들었는데 이 시간에 나가자고 하니까..."

난감한 표정이 된 단비는 말끝을 흐리는데, 

"푸-훕."

여과 없이 터져 나온 지호의 찐 반응. 

"뭐야, 뿜은 거야?"

단비가 미간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리며 말한다. 

"크윽. 크크크크."

핀잔을 들을수록 더 크게 박장대소를 하는 지호에게, 

"왜 웃냐고!!"    

심통 난 얼굴로 다그치는 단비.  

"몰라서 묻냐. 치안 무서운 줄 아시는 분이 어? 겁도 없이 여길 온 거지? 그것도 혼자서 말이야. 어후~ 진짜 백단비! 넌 도대체..." 

이제야 좀 호흡기가 진정 됐는지, 지호는 속에 있는 말들을 가감 없이 쏟아내는데...  

"그럼 어떡하냐.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고! 연락도 안되고! 다른 방법이 없잖아, 다른 방법이~!"


단비의 성난 진심이 지호의 남은 웃음기를 싹 걷어낸다. 이 대목에서만큼은 지호도 우회로를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한다. 그러는 사이에 바닥에서 들려오는 철퍼덕 소리. 


"에이, 진짜... 서 있을 힘도 없구만." 


요란한 기지로 차가운 시멘트 위에 털썩 주저앉은 단비가 이번에는 세상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댄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지호의 눈빛이 사뭇 복잡하다.  


"너, 뭐야~ 빚쟁이야? 알았으니까 시위 그만하고 일어나지?“

지호가 체념하듯 말한다. 

"일어...나면?"

단비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새침하게 물어오자,  

"동네 시끄럽게 이러지 말고 일단 들어가자고." 한다.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파리에서 보낸 숱한 밤들 중에 이렇게나 당황스러운 밤은 처음이라고, 지호는 생각한다. 갑작스럽고 터무니없어서 황당하기 짝이 없는 그런 밤. 그 한가운데에는 요주의 인물인 백단비가 있다. 이제 막 못 이긴 척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녀는 먼지투성이가 된 엉덩이를 툭툭 털어내다가 지호의 손에 들린 자신의 짐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입술을 샐쭉인다. 


"엇! 별이다!!" 

아파트 복도 난간 틈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슬쩍 올려다보던 단비가 소리친다. 

"너 시력 안 좋지?" 

지호는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시들하게 대거리한다.  

"쯧. 역시 유지호. 내 예상이 맞았어."

단비가 혀를 차며 말한다. 

"나에 대해서 뭘 어떻게 넘겨짚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틀렸어."

지호의 입에서 담백하다 못해 건조한 언어들이 떨어진다. 

"오~ 이거 봐. 꼬였네, 꼬였어. 희미하다고... 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거든?! 아, 몰라. 별은 됐고! 나 배고파서 진짜 별 보일 지경이야. 저녁 뭐 먹여줄 거야?"

고개를 숙여 문고리를 돌리고 있는 지호. 그의 머리 밑으로 불쑥 들어온 단비가 대답을 재촉한다. 별을 박은 듯 반짝이는 눈으로. 

"아우, 깜짝이야. 경고야, 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지호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고 무엇을 깊이 자각하고 판단할 새도 없이 행동이 사고를 앞지른다. 어쩌면 그래서. 지호는 모처럼 실감하고 있는지 모른다.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있다는 실감을 그녀가 안겨 주었다. 물론 겉으로는 최대한 심드렁한 척 하고 있으니 단비에게 들킬 염려는 없다. 설령 들킨다 하더라도 단비라면 "애쓴다"하고 넘길 일이지만, 그런 볼품없는 상황은 되도록 피하고 싶으니까 당장은 표정을 단속하는 게 최선이다. 아무튼 여러모로 애쓰고 있는 지호는 단비가 흘리듯 꺼낸 말 한마디에도 의미를 부여해 본다. 그녀의 말처럼 도시의 별빛은 희미하지만, 단지 가리워져 있을 뿐이지 사라진 건 아니라고. 흐릿하고 아득해도 별은 별이라고. 그러니 우리는 지금까지 해온대로 각자의 별을 쫓으며 살면 되는 거라고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속에 반짝이는 별 하나를 품고 산다. 지호와 단비도 그렇다. 서로가 쫓고 있는 별이 무엇인지. 지호는 왜 파리로 떠나왔으며 단비는 왜 그런 지호를 찾아왔는지... 아직은 어떤 것도 명쾌하지 않다. 하지만 밤이 더 깊어지고 서서히 구름이 걷히면 보여야 할 별들은 어김없이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그때가 오면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밝고 영롱하게 빛나겠지.

 

오늘 밤, 지호와 단비는 나란히 하나의 문을 통과하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