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비 오는 화요일이다.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과 바람에 흩날리는 빗줄기가 시야를 가리는 탓에, 해국은 그새 정오가 다 되어간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었다.
"와, 이거. 이래도 되나? 사장님! 장사가 원래 이런 겁니까?"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온 나준의 쩌렁한 음성이, 조용히 창밖을 보는 해국의 귀를 툭툭 건드린다.
"왜? 또 뭐가 문젠데?" 해국은 딱히 관심은 없지만 반응은 해야겠다는 뉘앙스로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린다.
"그렇잖아요. 평소 같으면 점심 손님들이 줄을 서고도 남을 시간인데 비 좀 온다고 그 많던 사람들이 발길을 뚝. 그럼 오늘 하루 매출도 뚝뚝 떨어질 텐데, 사장님은 걱정이 안 되세요?" 얼굴의 반을 가린 동그란 안경테와 그 너머로 보이는 나준의 찌푸린 미간이, 묘한 이질감을 만든다고, 해국은 생각한다.
"그걸 왜 네가 고민하세요? 나는 말이다. 손님이 없을 때는 매출보다 직원 걱정을 더 많이 해요. 저 녀석이 오늘은 또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해댈까, 하고 말이지. 알겠냐?"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입은 씨익 웃고 있는 걸 보면, 두 사람 사이에도 어느새 정이라는 게 싹트고 있는 모양이다.
나준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5월 28일인 오늘은 해국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다. 3년 전 오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를 잃었다.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 그만큼이나 살았다는 게, 지금도 살고 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서 아직은 눈물을 흘릴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비행기만 타면, 한국으로 날아가기만 하면, 늘 계시던 자리에서 언제나처럼 반겨줄 것만 같은 어머니. 어머니... 오늘은 어머니의 기일이다. 그래서 해국은 화가 나지 않는다. 비가 내려도. 손님이 뜸해도. 오히려 그래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으니까.
"아참, 아까 전화 왔었는데." 주어만 쏙 빼고 말하는 나준을, 해국이 빤히 본다.
"수빈 누나요!" 라고 나준이 얼른 실토한다.
"누나? 언제부터 누나야?" 해국이 살짝 거슬린다는 듯이 뾰족하게 받아친다.
"저보다 다섯 살 많으니까... 누나 맞잖아요? 맞다, 참! 사장님도 한 살 적으니까 저처럼 편하게 '누나'라고 부르세요." 나준이 얄미운 표정을 짓는다.
"그걸 왜 네가 결정하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통화 내용이나 말해 봐." 목소리는 애써 태연한 척 연기를 하고 있지만, 흔들리는 해국의 눈은 궁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뭐랬더라... 아, 그렇지. 어딘가 좀 이상했어요.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다가 끊었다니까요. 오늘 가게문 일찍 닫는 거 아니냐면서, 사장님 기분은 괜찮냐고 묻던데요? 잠깐, 잠깐만요!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혹시... 사랑의 이벤트? 아핫. 그런 거면 소인의 입방정은 못 들은 걸로 해주소서." 말을 끝낸 나준은,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붙여 입가로 가져가더니 좌측에서 우측으로 쓱.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한다.
"수빈씨가? 뭐 다른 말은 더 없었고? 야, 근데 넌 그런 말을 왜 이제... 하..." 나준은 대꾸를 하는 대신, 심각해지는 해국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핀다.
"안 되겠다. 나 좀 나갔다 올게." 돌변한 해국이 선언하듯 말한다. 풀어 재낀 앞치마를 돌돌 말아 나준의 손에 덥석 쥐어주고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얼굴로 창밖을 본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나준이 따지듯 묻는다.
"기도." 해국은 두 글자로 답한다.
"네~?" 나준이 되묻는다.
"그럴 일이 좀 있다. 자세한 건 다녀와서 말할게."
입구 쪽에 세워둔 우산꽂이에서 검은색 장우산을 하나 꺼내든 해국. 그대로 문을 열고 빗속으로 몸을 던진다. 나준은 갑작스럽고도 불가사의한 그의 돌발 행동을 골똘한 얼굴로 지켜본다. 장대비 사이를 뚫고 나아가는 해국의 흐릿한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퍼붓는 기세로 봐서는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는데, 왕왕 울다가 금세 뚝 울음을 멈춘 아이처럼 굵은 빗발이 빠르게 잦아들었다. 칙칙하던 하늘이 투명하게 개었고, 흠씬 물기를 머금은 성 니콜라스 성당 위로는 환영 같은 무지개가 반원으로 아스라이 떠올랐다. 눈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환영(幻影). 지금 해국의 눈에 비친 오색 무지개가 영락없이 그렇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란 대략 이런 순간을 일컫는 것이겠지, 하고 해국은 조용히 감상에 젖는다.
"같이 봐요."
역시나 환영 같은 목소리가 해국의 좁은 달팽이관을 타고 긴가민가하게 흐른다. 반사적으로 돌아간 고개가 직시한 인물은 지수빈. 그녀의 오밀조밀한 눈, 코, 입이 해국의 두 눈동자에 가득 차오른다.
"좋은 건 같이 봐야죠." 수빈이 같은 말을 한번 더 되풀이하면서, 해국의 두 발 옆으로 자신의 두 발을 가져다 놓는다.
"저걸 보느라 수빈씨가 온 줄도 몰랐네요." 해국의 시선은 성당과 무지개를 향하고 있지만, 그의 온 신경은 이미 그녀에게 가 있다.
"자, 받아요." 아까부터 뒷짐을 지고 있던 수빈. 등 뒤에서 흰 국화 한 다발을 꺼내어 해국에게 내민다.
"웬 꽃이에요?" 생각지 못한 전개에 해국은 잠시 멍해진다.
"왜긴요. 오늘 해국씨 어머니 기일이잖아요. 그래서 여기에서 보자고 한 거 아니었어요? 이런 날에 빈손으로 오는 건 예의가 아니죠~" 봉긋하게 입을 벌린 새하얀 꽃잎들과 그 위로 피어난 순백의 미소가 해국의 심장을 사정없이 두드린다.
"고마워요. 어머니가 기뻐하실 거예요. 음, 그러니까 제 말은..." 해국은 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몸을 살짝 옆으로 튼다. 그러고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한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수빈은 그의 말을 재촉하는 대신, 차분히 화제를 돌린다.
"이 꽃이요. 흰 국화의 꽃말이 뭔지 알아요?" 수빈이 무언가 중요한 말을 숨겨둔 듯한 얼굴로 묻는다.
"글쎄요. 죽음 외에 다른 의미가 더 있나요?" 해국은, 더 이상 자신이 '죽음'이라는 명사를 부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는 중이다.
"진실과 성실. 그리고... 감사. 하얀 국화의 꽃말이에요. 만약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해국씨를 보고 계신다면,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감사하고 계실 거예요. 어때요? 완벽한 해석이죠?"
비가 한껏 떨어뜨려 놓은 기온을, 수빈의 고운 마음씨가 다시 포근하게 끌어올린다. 그녀가 발산하는 온기가 해국에게로 둥그렇게 퍼져 나간다. 비할 데 없이 따스하고 아늑하다. 이 느낌을 달리 어떻게 형용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해국의 마음속으로 촛불 하나가 들어온다. 작은 초 하나 켜진다고 해서 온 세상이 살만해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눈앞의 한 사람은 살릴 수 있다. 얼음장 같던 해국의 마음이 수빈이라는 촛불에 스르륵 녹고 있으니까.
"우리, 저기로 가서 앉을까요?"
성당 안으로 들어선 해국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뒤따라 걷는 수빈은 말없이 고개만 두 번 끄덕인다. 그리고 찾아온 침묵. 이곳은 언제나처럼 고요하다. 너무 고요한 나머지, 세상과 단절된 듯한 기분을 준다. 높다 못해 거룩한 분위기까지 자아내는 아치형 천장과 신비롭기 그지없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들. 그 문틈 사이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형형색색의 빛이 무언의 언어처럼 말을 걸어오는 곳. 성 니콜라스 성당.
건축가들은 이 공간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건축물이라 칭송하는데, 그보다 솔깃한 것은 모차르트가 1787년에 연주했던 오르간을 현재까지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이곳에서 추모 미사도 열렸다고 한다. 최근에야 그런 역사적 배경을 처음 알게 된 해국은, 그 순간에 모차르트가 아니라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아들만 넷인 어느 서씨 집안에서 고명딸로 나고 자란 신애씨.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에 순백의 면사포를 쓸 때까지만 해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 앞에 어떤 생이 놓여 있을지. 삶이란 때로 얼마나 괘씸하고 잔인한지. 감히 짐작 조차 못했을 것이다. 일러도 너무 이른 나이에 남편을 잃었다. 그 후로 그녀는 여섯 살 밖에 안된 어린 아들의 손을 붙잡고 황망한 세상을 걸어야 했다. 사는 동안에도 미망인으로 외로이 살다가 52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쓸쓸히 생을 마감한 한 여인. 그 옆에는 물론 해국이 있었지만, 목석 같은 아들 하나로 채울 수 있는 고독이 아니었음을 해국이 왜 몰랐겠는가.
해국은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살며시 두 눈을 감는다. 그리고 염원한다. 부디 그곳에서는 평안하시기를. 어떤 아픔도 없기를.
침묵은 꼬리가 길다. 두 사람은 성당을 빠져나온 후로도 조용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니 정처도 있을 리가 없는데 발은 쉬지 않고 어딘가를 향한다. 유럽 특유의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무작정 걷다 보면 유리 공예품이나 골동품을 파는 소담한 골목이 나온다. 좁고 오래된 골목을 통과하자 이번에는 탁 트인 도로가 나타났다. 붉은 트램과 갖가지 색을 띠는 승용차들이 길 하나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관광이 아니라 생활을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여전히 이질적이지만 딱히 새로울 것은 없는 광경이다.
비가 갠 한낮의 프라하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이 부시다. 해국은 무심결에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행여 수빈이 오해할 새라 재빨리 인상을 펴는데, 그걸로는 부족하다 싶었는지 이번에는 어깨를 못살게 군다. 축 늘어져 있던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려고 잔뜩 힘을 주는 몸짓이,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다. 이를 눈치 챈 수빈은 보고도 못 본 척 태연하게 넘기려다가 결국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대화의 물꼬를 튼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요?"
"뭘... 물어야 하는데요?"
"통상적인 질문들요.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거냐, 라든가. 우리는 현재 무슨 사이며 앞으로는 무슨 사이가 될 수 있나, 없나... 예를 들면 그런 거."
"글쎄요. 흠... 그런 게 의미가 있나?"
해국은 잠시 말을 멈추고 꽃을 본다. 오늘 수빈에게서 받은 흰 국화 한 다발을 면면히 살피다가, 이윽고 할 말이 떠올랐는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앙다문 입술을 연다.
"이 꽃의 꽃말이 진실과 성실 그리고 감사,라고 했죠? 우리가 현재 무슨 사이든 아니든, 앞으로 무슨 사이가 될 수 있든 없든, 그런 것보다 중요한 관계의 본질이 진실과 성실 그리고 감사,가 아닐까요. 함께하는 시간 동안 진실과 성실로 대한다면... 그 마음이 서로에게 닿기만 한다면 우리가 무엇이 되든 되지 못하든, 그걸로 난... 감사할 것 같은데."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지호씨처럼 사라져 버려도요?"
애써 담담하던 해국의 표정이 그윽하게 변하고 있다.
"그럴 거예요?"
수빈은 잠깐 멈칫하다가, 툭 떨어뜨린 시선 끝에 말을 놓는다.
“그럴지도 모르죠."
"와... 잔인하다."
"진짜로 그런다는 게 아니라 가정,이잖아요. 내일을 가정해 보면 그렇다고요. 내일의 일은, 내일이 오기 전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내 말은..."
"알아요, 무슨 뜻인지."
입은 웃고 있지만 그의 눈은 옅은 슬픔을 채 걷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담담하게 다음 말로 넘어가는 건, 성숙한 어른의 태도를 취하기 위해서다. 떼쟁이 아홉 살도 아니고 열아홉 미성년도 아니다. 스물아홉 청년이 된 이해국이라는 남자는, 과하지 않은 솔직함과 적당한 재치의 효용성. 무엇보다 유연함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각자의 사정과 이유가 있다는 걸 왜 모르겠어요. 그래도 수빈씨가 떠난다면 힘들겠죠, 당연히.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마음까지 괜찮아지는 건 아닐 테니까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워하거나 우리가 만났던 시간들을 외면하진 않을 겁니다.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였던 시간까지 없던 게 되는 건 아닐테니까요."
해국은 최대한 자신의 마음과 비슷한 어휘를 모색하려 노력했는데... 상대도 그렇게 받아들였을지, 거기까지는 화자의 영역이 아니라서 확인할 도리가 없다. 다만 한 가지 기대하는 바는 언어가 담지 못하는 마음은, 마음 대 마음으로 전달되리라는 것.
그런 바람으로 그녀의 손을 잡는다.
가녀린 수빈의 손이 해국의 큼지막한 손바닥에 포옥 들어와 감싸이고,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이 둥둥 떠 있는 상념을 걷어낸다. 내일의 걱정은 내일 하도록 내버려두고 당장은 아직 가지 않은 오늘에 집중하라고. 오늘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눈앞에 있는 서로에게 충실하는 것 뿐이라고. 마침내 잡은 손을 소중히 바라보는 거라고 말이다. 놓칠세라 꽉 잡으면 이내 불편해지고 편하자고 느슨하게 두면 스르륵 놓치게 된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손을 잡는다는 건 그런 것. 손을 내밀 용기와 그보다 더 큰 주의와 배려가 필요한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