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Paris, 이 도시는 도통 내숭을 모른다. 체코 프라하의 매력이 귀부인 같은 고풍스러움에 있다면, 프랑스 파리는 당찬 말괄량이 아가씨 같달까.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아닐 수도 있지만, 지호는 아직까지 이보다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했다. 젊음이든 개성이든 혹은 그밖에 무엇이든 뭐 하나 빼는 법이 없다. 그래서 태가 난다. 그럴싸한 수식어의 도움 없이도 이름 자체로 '로맨틱'의 고유명사가 되는 곳. 파리는 그런 곳이니까. 에펠탑의 실물은 기대보다 훨씬 성대하며 메인 스트리트에 들어선 가게들은 인테리어로 매출을 올리는지 하나같이 외관이 삐까뻔쩍하다. 센 강을 거니는 파리지앵의 자태에는 흉내 낼 수 없는 멋스러움이 있고, 샤를 드 골 광장 한복판에 있는 개선문의 콧대는 언제 봐도 하늘을 찌른다. 이 도시도. 도시의 사람들도. 존재감을 드러냄에 있어서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어 보인다고, 지호는 생각한다. 센 강의 낭만이 흐르는 비르하켐 다리(Bir-Hakeim Bridge) 위에서.
"도브리 작가님?"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인기척에, 기마상 앞에서 비딱하게 서 있던 지호가 자세를 고쳐 몸을 반듯이 세운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주위에는 얼핏 한국인으로 보이는 백발 어르신 두 분 뿐이다.
"사진작가님, 맞으시지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이는 지호에게, 할아버지가 재차 물어온다. 휴대전화 액정과 지호의 실물을 한 번씩 번갈아 보면서.
"네? 아, 네! 그럼 혹시... 오늘 예약하신 분이신가요?"
"허허. 그렇소만. 늙은이들이 나타나서 놀랐소?"
"아, 아녜요.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얼굴에 다 쓰여있는데 뭘~ 솔직히 말해도 괜찮소. 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악수 한번 합시다."
조금 전까지 할머니의 손을 꼬옥 잡고 있던 노년 신사의 다정한 손이 이번에는 지호를 향하고 있다. 지호는 거뭇하고 투박한 그의 손을 지그시 보다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얼른 목에 걸더니 양손을 골반 뒤쪽으로 가져간다. 바지천에 손바닥을 쓰윽 닦고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치는 시늉을 하면서 할아버지의 거친 손을 부드럽게 맞잡는다. 그러는 사이, 할머니는 한 발치 뒤에서 두 남자의 어색한 첫 대면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본다.
"찾아오시기에 어렵지는 않으셨어요?" 지호가 공손히 여쭌다.
"모르는 게 있으면 전화기가 다 알려주는 세상인데 어려울 게 뭐가 있겠소." 할아버지가 씩 웃는다.
지호도 슬슬 긴장이 풀리는지 덩달아 입꼬리가 씰룩 올라간다. 말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퍽 당황했던 눈치다. 왜 아니겠는가. 스냅사진 촬영을 시작한 이래로 오늘처럼 뚝딱거려보기는 처음이다. 줄곧 젊은 커플들만 상대해 왔던 터라 어르신들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통 요령이 없다. 대화의 주제를 고르는 것부터 난관인 데다 포즈를 주문하는 화법이나 사소한 에티켓까지 온통 미숙한 것들 투성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옷이라도 좀 얌전하게 입고 나왔을 텐데, 하면서 때늦은 후회를 한다. 그에 반해, 역대 최고령 커플인 오늘의 손님들은 배테랑 모델처럼 여유가 철철 흘러넘친다. 안절부절못하는 지호도, 새롭게 처한 이 상황도, 모든 게 그저 반갑고 즐겁다는 듯 아이처럼 해사하다.
"나이 80에 별 걸 다 해보네. 안 그래요, 여보?" 할머니가 말한다.
"재밌지 않소? 이 나이에도 못 해 본 일이 있다는 게 말이오." 할아버지가 답한다.
지호가 마른 입술을 달싹여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입밖으로 소리를 내려다가, 표변한 얼굴로 조용히 카메라를 들어 올린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플의 가장 사랑스런 순간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포착하기 위해서.
"어엇. 거, 작가 선생님~ 벌써 촬영이 시작된 거요?" 옷매무새를 고치던 할아버지가 묻는다.
"그냥 테스트 촬영 좀 해봤어요. 본 촬영은 이제 시작할 텐데요. 뒤에 에펠탑 보이시죠? 여기가 센 강을 배경으로 파리의 랜드마크를 제일 예쁘게 담을 수 있는 장소라서 여기서 뵙자고 했습니다." 지호가 조곤조곤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어쩐지 다 이유가 있었네요. 하긴. 작가 선생님이 어련히 알아서 해주실까." 할머니가 손가방에서 네온 블루 계열의 토르말린색 스카프를 꺼내더니 목 뒤로 사부작이 두 바퀴 감아 두르며 말을 보탠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시선은 저를 보시되, 몸은 난간에 살짝 기대듯이... 예, 좋습니다."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을 때마다 뒤꿈치가 뭉툭하게 닳은 지호의 흰 운동화 밑창이 고개를 치켜든다. 색 바랜 카고 바지에는 주머니가 요란하게 달려있고, 품이 넉넉한 회색 티셔츠는 앞에서 보면 심심한데 뒤태가 반전이다. 어느 뒷골목 담벼락에서나 봄직한 힙한 그래비티 같은 프린팅이 등에 가득하다. 시선을 조금 더 위로 올리면 다른 그림도 볼 수 있는데, 목이 살짝 늘어난 티셔츠 자락을 지나면 새가 한 마리 앉아있다. 왼쪽 목덜미에 푸른색으로 그려 넣은 작은 새 그림 타투는 그가 카메라를 들어 올릴 때마다 마치 날갯짓이라도 하는 양 움찔한다.
"네, 됐습니다~ 여기 촬영은 이만하면 될 것 같고요. 다음 장소로 이동할게요." 지호가 말한다.
"벌써? 늙은이들 힘들까 봐 빨리 끝내는 거 아니요?" 할아버지가 노파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물음을 건넨다.
"전혀 아니고요" 지호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이건 진짜 그냥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두 분 표정이 너어~무 좋으셔서 촬영이 술술 진행돼서 그런 거니까요. 염려 안 하셔도 돼요, 어르신~" 하면서 살갑게 군다.
"사진을 찍어 달랬더니 노인네 마음을 녹이네 그려. 그런데 말이오, 젊은 양반! 본명이 도브리는 아닐 테고, 그렇다고 불어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할아버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호를 본다.
"아, 도브리요! 'Dobry'는 체코어로 '좋은' 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프라하 교민으로 오래 살아서 불어보다는 체코어가 익숙하거든요." 지호가 말을 끝내려 하자, 이번에는 할머니가 나선다.
"저런. 어린 나이에 남의 나라에서 고생이 참 많았겠네. 얼마나 힘들었을까. 으휴, 대견해라~ 그래, 참! 작가 선생님~ 좀 전에 도브리가 좋다는 뜻이라고 했지요?" 뭉게구름을 닮은 할머니의 폭신한 음성이 지호의 빈곤한 마음을 보드랍게 감싸 안는다.
"네, 맞아요.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지호의 말씨가 한결 더 나긋해졌다.
"도브리. 발음이 참 곱네~ 그런데 말이지요. 이 나이만큼 살아보니 그렇습디다. 세상사 살아내는 일이 어디 좋기만 하겠어요. 하지만 말이에요. 불행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행복도 반드시 오긴 온답니다."
비르하켐 다리 위에서 시작한 어느 노부부의 촬영은 강변을 따라 한 시간 가량 진행됐다. 일이 끝나고 지호는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머리는 아직도 셋일 때 나눴던 스몰토크를 맴돈다. 특히 마지막에 할머니와 나눈 대화는 여운이 긴 물음표로 남았다. 정말 그럴까? 행복이라는 거, 형태도 없는 추상 명사 따위에 기대를 걸어도 되는 것일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도처에 도사린 불행과 공생하는 법을 배우는 편이 속은 훨 편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그런 게 꼭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지호가 파리에 온 목적은 그런 게 아니다. 쓸모, 스물일곱에 걸맞은 쓸모를 찾으려는 것이다. 전교육과정 해외이수. 12년 특례. 명문대 타이틀. 그리고 1년 만에 자퇴... 당시에 소식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지호만 보면 할 말을 잃고 횡설수설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한국보다는 가족이 있는 프라하가 (비록 남의 나라일지라도) 심적으로는 한결 편했으니까. 올드타운에 있는 어학원에서 유학생들에게 체코어를 가르치는 파트타임 강사일도 나름대로 적성에 맞았고, 틈틈이 어머니가 운영하는 한인민박집에서 일손을 돕거나 해국을 보러 마민카식당에 가거나 혹은 단비를 만났다. 그럭저럭 괜찮은 일상이었지만, 평온한 상태가 오래 지속될수록 고민은 깊어졌다. 겉으로 허허실실 웃고 있다고 해서 속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기에.
지호는 파리 8대학의 영화과 입학을 앞두고 있다. 가을 새 학기까지 두 달 남짓 여유가 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조바심이 난다. 이 불안의 실체는 무엇일까. 미래를 향한 열망일까 아니면 두고 온 것에 대한 미련일까. 그도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혼잡한 감정이 지호를 다그치는 와중에도 파리의 용모는 흐트러짐 없이 반짝인다. 프랑스의 북서부를 적시는 센 강은 오늘따라 더 유유히 흐르고, 그림 같은 도시를 지붕처럼 덮은 하늘은 푸른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쾌청하다. 거짓말처럼 말간 풍경 위로, 한참 전에 헤어진 두 어르신의 모습이 슬며시 겹쳐진다.
"사진은 넉넉 잡아 한 달 정도 걸릴 텐데요, 어디로 보내 드릴까요? 자제분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하고, 지호가 할아버지께 여쭸을 때,
"뭐 하러요. 자식들 귀찮게 안 하고 알아서 잘 지내는 게 우리 여생의 숙제라오. 가만… 그나저나 한 달 후에 오늘 찍은 사진들이 날아오면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은 기분이겠구먼.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려. 좀 이따 숙소에 돌아가면 내 이메일 주소를 찍어서 보내드리리다." 라고, 멋쟁이 노신사다운 답이 돌아왔다.
앞으로 50년 남았다. 두 어르신의 연배가 되려면 무려 반백년을 더 살아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한다. 지나온 시간의 곱절을 더 건너야 다다를 수 있는 경지라니. 가늠할 수 없이 아득한 세월이 지호를 숙연하게 만든다. 그분들처럼 아름다운 노년을 맞을 수 있을까. 그분들처럼 근사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지호는 한동안 오늘 낮에 마주한 장면들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영화보다도 영화 같았던 노부부의 강렬한 잔상이 부표 같이 떠 있는 한 청년의 시선 끝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