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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마민카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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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필 May 24. 2024

05_에블린의 세탁소

#소설 연재

프라하에 온 뒤로 수빈은 사색이 늘었다. 이제껏 한 번도 품어본 적 없는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한다. 어젯밤 다이어리에 끄적여 놓은 글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날 일(日), 항상 상(常).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일상.    

일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결혼이 깨지면서 수빈의 시계에도 금이 갔다. 고장 난 상태로 흘려보낸 시간은 천년처럼 아득해서, 가끔은 남의 일처럼 현실감 없이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상실과 좌절. 슬픔과 분노. 그리고 끝없는 허무. 이혼 후에 찾아온 불청객들이 수빈의 생활을 마비시켰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혼을 무기로 내세울 수는 없다. 언제까지고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 수빈은 우선, 삶의 큰 물음표를 심중에 반듯이 앉혀본다. 말하자면, 존재의 의미 혹은 살아가야 할 이유 같은 것인데... 처음에는 시험지를 받아 든 학생처럼 기어코 해답을 찾고자 했다. 어떻게든 생각을 잇고 이어서 뭐라도 결론을 내보려고 해 봤지만 결국 제 풀에 지쳐 관둘 수밖에 없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수고인지 수빈은 얼마 못 가 깨달았다. 머리를 쓴다고 찾아질 답이 아니었다. 늦게나마 일말의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것. 사실은 그걸로 충분했던 거다. 마음속에서 한번 똬리를 튼 물음표는 자생력이 강해서 알아서 뿌리를 내리고 또 알아서 가지치기를 하니까.    

 

'그래서? 어떻게 살고 싶은데? 네가 그리는 일상은... 뭐야?'


수빈은 가슴속 물음표를 지팡이처럼 붙들고 기억의 저편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 걷는 기분은 뭐랄까 먼지 쌓인 다락방에 오르는 것만 같다. 그새 거미줄은 몇 개나 늘었을지, 혹 생쥐가 기어 다니는 건 아닌지 온갖 걱정과 상상을 끌어안게 되는데... 그처럼 오래된 다락방에 가듯 기억의 방으로 간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도 모를 만큼 한참 만이라 문고리를 돌리기도 전부터 긴장감으로 입이 바싹 마른다. 그러다 마침내 과거의 문이 열리면, 까맣게 잊고 있던 케케묵은 장면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끼이익~!" 달리던 차가 급정거를 했고,

"에이씨! 당신 뭐야? 죽고 싶어?" 놀란 뒤차가 소리를 쳤다.

"빵~ 빠아앙 빵!"

성난 경적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던 그날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던 걸까. 어디로 가려했을까... 기억은 말이 없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엄마~ 같이 가~"

차에서 내린 어린 수빈은 잔뜩 얼어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저만치 멀어져 가는 피사체를 뒤늦게 인식한다.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그녀의 그녀를 애타게 부르며 쫓아갔다. 작은 발로 총총. 그런데... 돌아오는 말은,  

"아빠 따라 가! 얼른!"    

그 말을 하는 표정이 어찌나 서늘한지 팔다리에 힘이 쭈욱 빠졌다. 그 바람에, 간신히 움켜쥐고 있던 엄마의 치맛단이 손아귀에서 스르륵 풀려나갔다. 그 길로 돌아선 수빈은 반대편으로 달아나는 또 다른 실루엣을 향해 내달렸다.

"아빠! 엄마가... 엄마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했는데,

"엄마는? 엄마한테 가 봐! 어서!"  


갈림길에 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로 흩어졌고, 어린 수빈은 한동안 정지된 화면처럼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저만치 멀어져 가는 그들의 낯선 뒷모습을 가만히 목격하면서. 그날의 풍경과 그날의 환멸. 그날의 상실과 그날의 어린애... 그날 수빈은 어떠한 표정도 지을 수가 없었지만, 몸은 분명히 반응했다. 떨고 있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그럴수록 두 주먹에는 힘이 가득 실렸는데, 그건... 미움이었을까? 그럼에도 살고자 하는 의지였을까? 아마도 반항심으로 표출된 맹목적인 사랑은 아니었을까.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의 파도가 수빈을 덮쳤고, 동시에 어떤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기묘한 일이다. 이미 다 지나간 일임에도 여전히 모든 게 이상하리만큼 생생하다. 캄캄한 방에 불이 켜지듯 수빈의 기억이 환해졌다. 그러자 불현듯 답이 떠오른다.


'그래서? 어떻게 살고 싶은데? 네가 그리는 일상은... 뭐야?'


부정당하는 기분. 불편한 감각. 그런 것들로부터 온전히 해방된 하루. 멋지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날들이 아니라 진주알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 빨강머리 앤이 말한 소박하고 자잘한 매일을, 수빈도 몹시 바라고 바란다.   




"차우. 약 쎄 마쉬(Čau. jak se máš)?"

- 안녕. 잘 지냈어?


에블린이다. 세탁소 아주머니인 에블린이 콧등으로 미끄러진 안경을 추켜올리며 수빈에게 인사를 건넨다. 엄마뻘인 그녀가 오뉴월의 햇살보다 따사로운 미소를 지어 보일 때마다 이목구비 사이사이로 수갈래의 곡선이 드나든다. 세월을 머금은 여자의 주름에는 흉내 낼 수 없는 고아함이 있다. 그 얼굴을 차분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수빈은 전에 없이 신비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집을 나와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머릿속이 꽤나 시끄러웠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순간에 평온해지고 있다는 것이, 묘하고 묘하다.


"맘 쎄 도브쉐. 아 비(Mám se dobře. A vy)?"

- 잘 지냈어요. 에블린은요?


수빈의 일주일은 단조로운 리듬으로 돌아간다. 주중에 3일은 오늘처럼 에블린의 세탁소에서 일하고, 나머지 4일은 혼자서 시간을 보내거나 단비와 함께 하거나, 마민카식당 안팎에서 해국을 만나기도 한다. 새롭게 한주가 오고 또 한주가 찾아와도 생활의 패턴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따분한 생활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수빈 본인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고 있다. 일정한 흐름 속에서 느껴지는 고도의 안정감이, 수빈을 지탱한다.


"맘 쎄 따끼 도브쉐. 초 또 마쉬(mám se taky dobře. Co to máš)?"

- 나도 잘 지냈지. 그건 뭐야?

"또 예 모예 크니하(To je moje kniha)."  

- 제가 보는 책이에요.


프라하 6구역에 있는 502호 수빈의 집 침실에는 비비드 한 오렌지 컬러의 조립식 책꽂이가 있다. 주위의 이목을 끄는 걸 즐기지 않는 수빈의 성격 상, 몸에 걸치는 것은 대체로 무난한 색상을 택하는데 유독 가구를 고를 때 만큼은 예외적으로 과감해진다. 심리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가끔씩은 단정함의 궤도를 벗어나고픈 욕구가 아마도 그런 식으로 표출되는 건 아닐까, 하고 터무니없는 합리화를 해본다. 아무튼 수빈의 책꽂이에는 손때 묻은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있다. 혼란한 십 대 시절을 버티게 해 준 시집들과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 한때 푹 빠져 읽었던 조앤 K. 롤링과 스테프니 메이어의 시리즈를 비롯해서 최근에 읽은 톡톡 튀는 제목의 산문집들까지 일렬로 서 있는데, 그중에서도 오늘 수빈이 데리고 나온 책은 J.D. 샐린저의 소설이다.


"혹시 그 영화 보셨어요?"

"무슨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라는 영화가 있는데요. 원제는 'My Salinger Year'이에요. 필리프 팔라도 감독의 작품이고, 시고니 위버랑 마가렛 퀄리가 나와요."


수빈이 어깨에 맨 에코백 속에서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는 책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윌리엄 포크너가 현대문학의 최고봉이라 격찬했다는 바로 그 책인데, 수빈은 은근히 반항심이 있어서 너무 유명한 것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는 편이다. 같은 이유로 샐린저도 멀리해 왔는데 별 기대 없이 본 영화 한 편이 사고를 뒤집었다.


"그런 영화가 있어? 처음 들어보는데."

"시대적 배경은 1995년이고요. 작가를 꿈꾸는 주인공이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작가 에이전시에 입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작가? 참, 수빈도 글 쓴다고 하지 않았어?"

"에이, 저는 그런 수준이 아니에요. 요즘 온라인에 글쓰기 플랫폼 잘 돼 있잖아요. 그 안에서는 누구나 다 작가예요. 아주머니도 해보실래요?"

"내가? 뭘 한다고? 아휴, 난 됐어~ 가게 장부 정리하는 것도 성가신데 무슨. 어쨌거나 그 영화가 90년대 작가 에이전시? 그런 내용이라는 거지?"

"네, 아주머니 취향에 맞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좋더라고요. 그 영화 때문에 샐린저의 책을 찾아보게 됐거든요."

"그래? 그럼 해국이랑 같이 본 거야?"

"아...아뇨. 그건 아니고..."

"왜, 같이 보지~ 해국도 영화 좋아하는 것 같던데."


에블린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흐뭇하게 웃는다. 당황한 수빈은 말끝을 흐린다. 그러던 차에 벌컥 문이 열린다.


"안녕하세요~"

수빈의 등 뒤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온다.

"어서 와, 그새를 못 참고 나타났네."

에블린이 놀리듯 말한다.

"네? 못 참다니, 뭘요?"


해국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에블린과 수빈을 차례로 본다. 괜히 머쓱해진 수빈은 에블린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물을 보면서 딴청을 피우는 것으로 어색함을 모면하려는 것이다. 한편, 영문을 알리 없는 해국은 에블린이 눈치채지 못하게 곁눈질로 슬쩍슬쩍 수빈의 표정을 읽어보는데... 세 사람 사이에는 오묘한 기류가 흐르고, 가게 안에는 꽃향기를 닮은 세제향이 은은하게 떠다니고 있다.


"일부러 저 놀리려고 그러시는 거죠?"  

해국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추궁하자,

"글쎄, 입이 심심해서 말을 못 하겠네. 그렇지, 수빈?"

해국 놀리기에 재미 들린 에블린은 한결 더 짓궂게 장난을 건다.

"맞다, 커피! 제가 잘못했네요. 요즘 커피 배달이 뜸했죠? 가게 일이 바쁘다 보니 신경을 못 썼어요."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마민카 커피가 좀 맛있어야지."


애정 어린 눈으로 장난을 거는 에블린과 어리광 섞인 해국의 모습이 꼭 모자지간처럼 정겹다고, 수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의 투샷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럼 오늘은 해가 뜨거우니까 얼음 가득 넣어서 아이스커피, 어떠세요? 그 사이에 두 분, 제 험담하시면 안 됩니다. 네?"

"다시 오게? 식당은 어쩌고?"

"이거 왜 이러세요. 저도 직원 있습니다. 말이 좀 많은 게 흠이긴 한데요. 일은 곧잘 해요."

"그렇다고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돼?"

"걱정 마세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린데요, 뭐."

"그러지 말고 아예 식당 넘기고 세탁소로 다시 들어오지 그래?"


그러고 보니 해국도, 마민카식당을 열기 전에 몇 달간 에블린의 세탁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걸, 수빈도 들어서 알고 있다.


"흐흣. 그건 안 되죠. 일터와 아지트는 분리해야죠.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손님들 들이닥치기 전에 얼른 다녀올게요~“


수빈은 이전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해국에게는 에블린과 있을 때에만 나오는 숨겨진 얼굴이 있다. 아이처럼 티 없고 소년처럼 천진한 그의 민낯이 오늘따라 수빈의 마음을 흔든다.


‘해국씨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을까.’


Maminka,는 체코어로 엄마,라는 뜻이라는데... 다 큰 청년이 이역만리에 와서 처음으로 차린 식당의 이름을 '엄마'로 지은 걸 보면 무언가 사연이 있긴 있을 텐데, 그 부분에 관해서는 아직 어떠한 얘기도 듣지 못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다. 수빈은 해맑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 아래 드리워진 그늘을 헤아리곤 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수심을 살피다 보면 어느새 엄마 같은 마음이 된다. 이해국. 어딘가 모르게 모성애를 자극하는 이 남자가 자꾸만 수빈의 신경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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