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단비가 달린다. 그녀는 땀이 나도 달라붙지 않는 인디핑크 반소매 티셔츠에 스판 소재로 된 차콜색 긴바지를 입었다. 은회색 러닝화로 감싼 두 발을 구르며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심장이 쿵.쾅. 격한 신호를 보내온다. 이대로 내리 뛰었다가는 심장뿐 아니라 속에 든 모든 장기가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다리는 감각이 둔하다. 그런데 그럴수록, 이상야릇한 개운함이 신경계를 교화시킨다. 미치도록 괴로운데 뼛속까지 상쾌해지는 이 기분을, 단비는 조금 더 맛보고 싶다.
“언니~ 빨리 와! 에그 참, 도중에 멈추면 더 힘들다니까.”
허흐~ 허으-윽. 양쪽 허벅지에 두 손을 짚고 구부정한 자세로 멈춰 선 수빈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안간힘을 다해 달려도 단비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출발은 나란히 했건만 실력은 비등하지 못하다. 그래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정도의 격차는 아니어서, 보일 듯 말 듯한 단비의 뒷모습에 의지해가며 수빈도 가까스로 뛰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알았어. 허흐...후... 뒤따라 갈 테니까 먼저 가~”
사실 수빈은 뛰고 싶지 않았다. 단비에게 티를 낸 적은 없지만 속마음은 그랬다. 그런 마음을 먹고도 길 위에 나와 있는 이유는 오직 백단비, 그녀를 위해서다. 한마디 말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지호. 그로 인해 구멍 난 단비의 일상을 복원할 수 있다면 꺼려지는 마음을 무릅쓰고서라도 함께 하고 싶었으니까.
"안 되겠다, 언니. 우리 저기에서 잠깐 쉬자."
앞서 달리던 단비가 뒷걸음질을 치더니, 사정거리에 있는 광장을 가리키며 말한다. 프라하 6구역에 있는 데이비츠카(Dejvicka) 광장은 두 사람에게는 놀이터나 다름없는 곳이다. 오늘처럼 러닝을 하는 날이 아니어도 동네 주민으로서 즐겨 찾는 장소인데, 신기하게도 올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 계절과 날씨. 시간대와 이용객들. 하다 못해, 새소리나 바람소리에 따라서도 표정이 바뀐다. 이런 내용을 옆에 있는 단비에게 말하면 "그게 뭐? 당연한 거 아냐?" 라고 가벼이 받을지 모른다. 그럼 수빈은 "그게 어떻게 당연해? 당연하게 존재하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거야. 진짜 신비로운 건 가까이에 있다고." 라고 대거리할 참이다. 하지만 수빈은 속에 있는 말들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평소 때라면 몰라도, 왠지 오늘은 그러면 안 될 것만 같다. 괜한 입씨름으로 단비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피하고 싶다. 물론 단비는 전혀 어떤 기색도 없지만.
"와~ 햇살 뭐야? 언니, 보고 있어?"
"그러게. 눈이 부실 정도로 쨍하다, 정말."
초록잎이 무성한 키 큰 나무들이 거대한 파라솔처럼 드리워져 있고, 듬성듬성 열린 잎사귀들 사이로 볕뉘가 자리를 튼다. 이제 막 유모차에서 탈출한 꼬마 아가씨는 아장아장 걸어서 광장 중앙으로 호다닥 달려드는데, 아치형 분수에서 물줄기를 내뿜을 때마다 자그마한 얼굴로 앙증맞은 미소를 뿜어낸다. 이토록 청량한 봄의 단면을 보고 있으니 달리며 흘린 구슬땀이 시원하게 씻겨나가는 것만 같다고, 수빈은 생각한다. 그러다가 문득 분수 건너편을 보았는데, 백발의 노신사가 낡은 배낭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는 눈치다. 잠시 후, 돋보기로 시력을 회복한 그는 사부작이 책장을 넘기며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 앞으로는 몸집이 제법 큰 비둘기 두 마리가 뒤뚱거리며 지나가고, 수빈과 단비는 그 모든 장면들을 조용히 감상하며 최대한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 이럴 때는 걷는다는 표현보다는 스며든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다 보니 두 사람도 어느새 광장의 일부가 되었다.
"여기에 앉을까?"
단비가 비어 있는 나무벤치에 눈길을 주며 수빈에게 묻는다.
"응, 그러자."
수빈이 앉으려고 허리를 반쯤 숙이고 있는데,
"아구... 아구 다리야..."
하고, 먼저 착석한 단비가 곡소리를 낸다.
"못살아, 백단비! 씩씩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그 할머니 소리는 뭐야."
"열심히 뛰었으니까 이런 소리가 나오죠. 아고 삭신아. 나 죽네, 나 죽어~ 크큭. 왜~? 내가 부끄러워? 말해 봐. 부끄럽냐고~”
단비가 수빈의 옆구리를 공략해 간지럼을 태우자,
"아흐크. 야, 너... 그만!"
"뭘 그만해. 대답할 때까지 계속 공격한다~ 어?"
"알았어. 항복! 할머니 소리 취소야, 취소!"
"진즉에 그럴 것이지. 쿄쿄. 아~ 날씨 좋다~"
장난기를 거둔 단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지르더니, 곧장 수빈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어허. 이 아가씨가 또 아무 데서나 드러눕네?!"
"뭐 어때. 해외살이 좋은 게 뭐야. 남들 눈치 안 봐도 되는 거. 그거 하난데 맘껏 누려야지. 안 그래?"
수빈이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으로 가볍게 톡. 단비의 이마에 꿀밤을 먹인다.
"으이그. 말은!"
"아얏! 하나도 안 아프지롱. 하암~ 역시 사람은 몸을 움직여야 해. 언니랑 달리기 시작하고부터는 불면증이 다 뭐람. 시도 때도 없이 졸리다니까."
단비는 무언가 삐걱거리는 일이 생길 때마다 몸을 못 살게 구는 경향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아버지의 직장 문제로 느닷없이 전학을 간 적이 있다. 졸업까지 1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전학생이 된 아이는 외톨이가 될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월등히 높을 수밖에 없는데, 단비의 경우는 99.9퍼센트의 가능성으로 그 범주에 들어갔다. 성격이 내향적이거나 모나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튀는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전학생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이미 도드라지는 상황에서) 무리에서 의견을 말해야 할 때마다 눈치 안 보고 소신껏 입바른 소리를 하다 보니, 자발적 아웃사이더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울고불고하진 않았으나 스트레스가 아주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럴 때 택한 방법이 달리기였다. 해질녘에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실 때면 가까운 길을 두고 일부러 멀리 빙 둘러서 뛰어갔다. 숨이 가파르게 차오를 때까지 죽어라 뛰다 보면 잡념은 날아가고 순간의 감각만 남았다. 어떤 날에는 심장 소리가 귀를 뚫고 나오는 상상을 하느라 길에서 혼자 키득거리기도 했다. 두부나 콩나물이 든 비닐봉지를 앞뒤로 신나게 흔들어대면서. 땀에 젖은 이마를 닦으며 배시시. 잠깐이라도 그렇게 단순해지고 명쾌해지는 기분이 좋았다. 오늘도 그렇다. 마음을 주었던 지호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지만 단비는 낙심하지 않는다.
"혹시... 연락 왔어?"
수빈이 어렵게 입을 연다.
"유지호?"
단비가 담담하게 응수한다.
"응, 지호씨."
"아니. 손가락이 부러졌거나 마음이 부러졌거나. 둘 중 하나 아닐까?"
말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단비는 여전히 그의 연락을 기다린다. 그렇지만 유난을 떨고 싶지는 않다. 코 빠뜨리고 있는다 해서 없어진 유지호가 다시 짠-하고 나타날 리 만무할뿐더러, 당장 찾아내 눈앞에 데려온다 한들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관계도 아니다. 정말로 화가 나는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애초부터 단비에게는 없었다. 지호의 선택을 (미리 알았다 하더라도) 돌릴 만한 어떠한 자격도 영향력도 없었다는 사실이 그가 떠났다는 팩트보다 더 아프다고, 차마 이런 말까지는 수빈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다. 그러니 속으로 침잠한다. 의식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 내면 깊숙이 가라앉은 생각을 수면 위로 건져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다리는 건... 이것 또한 단비, 너의 선택인 거야.'
그녀 안의 그녀가 말한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남은 건, 각자의 선택을 감당하는 것 뿐이기에 단비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당차고 씩씩하게 닥쳐버린 현실을 타개하는 중이다. 지호도 어디선가 그럴 것이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