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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마민카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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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필 May 10. 2024

03_방공호에 사는 여자

#소설 연재

“쌀쌀하지 않아요?”


수빈이 봄밤의 정취에 알딸딸하게 빠져들 무렵, 해국은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보드라운 담요를 수빈의 어깨에 살포시 덮어주었다.


“괜찮은데…”

“안 되겠어요. 안으로 자리 옮겨 줄게요.”

“예의상으로 하는 말 아니에요. 난 여기가 좋아요.”


해국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수빈의 두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래요, 그럼.”

수빈은 반달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더니,

“있잖아요,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물어봐 줄래요?” 라고 약간의 취기를 빌려 청한다.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낯빛이 발그레한 걸로 보아, 나쁜 징조는 아닌듯하다.  

“어떤데요?”

“그게 그러니까… 방공호 알죠?”

“모를 수가 없죠, 군필자라면 더더욱.”

“그럼 번데기 앞에서 주름 좀 잡을게요.”

“흐흣. 얼마든지요~”  

“근데… 왜 웃어요?”

“수빈씨 이런 모습 처음이라서요. 꼭 다른 사람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수빈과의 첫 만남을 되짚어보면 동일 인물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유난히 추웠던 어느 저녁, 눈처럼 희고 겨울나무처럼 창백한 얼굴로 마민카식당을 찾았던 그녀를, 해국은 또렷이 기억한다. 아직은 서툴고 부족한 청년 사장과 텅 빈 눈으로 앉아서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한인여성. 두 사람은 겨울을 건너 봄으로 왔다. 계절이란 그런 것. 언제 겨울이 끝났고 언제 봄이 시작됐는지 눈치채기 어려운 것처럼 둘 사이의 관계도 알 수 없게 흘러가고 있다.


“어떻게 다른데요?”

“수빈씨 먼저요. 나 아직 답을 못 들었다고요.”

“그랬지, 참. 뭐랄까... 이 기분은 말이죠. 전쟁 같은 시간을 지나고 지나서, 이제 막 어둡고 습한 방공호에서 탈출한 심정에 빗댄다면, 과장이 너무 심한 걸까요?”

수빈을 바라보는 해국의 눈이 슬픈데 따뜻하다.

“전혀요. 수빈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죠.”


해국은 알고 있다. 수빈에게 전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 두 사람은 존 레논의 벽을 지나 카렐교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날의 일은, 우연이라는 말로 적당히 넘기기에는 충격이 꽤 컸다. 반대편에서 마주 걸어오던 그들은 누가 봐도 신혼부부였다. 3년 전, 수빈과 다녀간 프라하에서 두 번째 허니문을 즐기던 그 남자. 그의 얼굴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에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굳어 있었는지는 해국의 뇌리 속에 사진처럼 남아있다. 방금 일어난 일처럼 강렬하고 선명하게.  


“자, 이제 해국씨 차례예요. 말해 봐요. 아까 나더러 이런 모습 처음이라고, 다른 사람 같다고 했잖아요.”

“아! 내 정신! 음식 들고 나온다는 게 수빈씨 추울까 봐 담요만 가져왔네요. 배 안 고파요?"

“와...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시겠다... 이거죠?”  

“그럴 리가요. 마감도 했겠다, 시간 많으니까 음식 먹으면서 천천히 얘기해요. 괜찮죠?"


수빈은 3초 가량 묘연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달빛처럼 온화한 얼굴을 만든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밤공기는 아직 서늘하니까 담요 잘 덮고 있어요. 10분! 아니 5분만요.”  


해국은 수빈을 두고 돌아서면서 방공호의 의미를 되새긴다. 적의 공습을 피해 땅속에 파 놓은 은신처가 눈앞에 선하게 그려져 일순간 걸음이 흔들린다. 은밀하고 안전하긴 한데 답답해서 숨이 조여 오는 작은 굴. 수빈은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런 곳에서 지낸 걸까. 그리고 그런 얘기를 저토록 담담하게 내뱉는 모습은… 긍정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은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가 없다. 그저, 현재하는 이 순간을 그녀와 함께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밖에는.


“음식 나왔습니다~”

식욕을 돋우는 고소한 향취와 함께 해국이 돌아왔다.

“세상에. 이게 다 뭐예요?”

수빈이 눈을 크게 키우며 묻는다.

“5월 한정 봄시즌 메뉴들인데요. 명이 좋아해요?”

“명이나물이요?”

“네, 몰랐겠지만, 체코에는 명이가 흔하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사는 한인들은 봄마다 명이 뜯으러 숲에 다녀요.”

“진짜 생각도 못했어요. 유럽과 명이나물이라니.”

“재밌죠? 그런데 현지음식점에서는 명이요리를 취급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네… 맞아요, 메뉴에도 없었고, 먹는 사람도 못 봤어요.”

“그래서 마민카식당에서 준비했죠. 이건 명이나물 솥밥이고요. 그리고 이건 도토리묵과 명이나물전. 마지막으로 명이나물 샐러드를 곁들인 궁중떡볶이 대령했습니다."


뜬금없지만 수빈은 이런 순간에 *필립 라킨의 시를 떠올린다. '나날들은 왜 있는가? 나날들은 우리가 사는 곳. 그것은 오고, 우리를 깨우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그것은 그 속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있는 것. 나날들이 아니라면 우리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라는 시구가, 해국의 식탁을 바라보는 수빈의 시선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우리가 살아갈 곳은 눈에 보이는 공간이 아니라 무형의 시간 속이라고. 누군가와 함께 맞이하는 하루하루의 나날들 속에서만 우리가, 우리로서 행복할 수 있다고... 정말 그럴까. 수빈은 이제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아주 오랜만에 가져보는 꽉 찬 기분을 부정할 용기도 나질 않는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나날들 위로 또 하루가 쌓여갈 뿐이다.


“테라스 공사한다고 했을 때 어떻게 바뀔까 궁금했는데 기대 이상인데요? 한옥집 마당처럼 자갈도 깔려 있고 담쟁이넝쿨도 싱그럽고, 전체적으로 마민카 식당이랑 너무 잘 어울려요.”

수빈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역시 공들인 보람이 있네요. 그런데 좀 좁죠? 공간이 조금만 더 넓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좀 아쉬워요."

"그래서 더 좋은데요? 아늑한 맛이 있잖아요."

"그렇담 다행이고요. 음식은 어때요? 이대로 메뉴에 올려도 될까요?”

“되고 말고죠. 단비랑도 한번 와야겠어요.”  

“참, 단비씨… 요즘 통 얼굴을 못 봤네요. 지호 그렇게 사라지고 많이 놀랐을 텐데.”  


영영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이 한순간에 꼬리를 감춘 것처럼 항상 그 자리에서 실없이 웃고 있을 것 같던 지호가 돌연 종적을 감춰버렸다. 유지호. 그 녀석은 대체 왜 말도 없이 사라진 걸까.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던 단비는, 그 뒤로 어떤 심경의 변화를 맞았을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들이 달처럼 높이 떠 있는 밤이다.







영국의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시인, 필립 라킨(Philip Larkin)의 詩『나날들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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