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통화를 끝낸 해국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허리춤에 두른 앞치마 주머니에 전화기를 맡기며 창가 자리로 고개를 돌린다. 수빈의 말이 맞다. 봄은 이미 와 있다. 열린 창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싫지 않다. 정확히 몇 월 며칠 자 바람부터 좋아지기 시작했는지는 일일이 세어보지 않았으니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사월 언저리까지만 해도 쌀쌀맞기 그지없던 외풍이 꽁무니를 빼고 사라졌다는 것. 그리하여 지난한 시련의 계절이 지나갔다는 것. 계절은 돌고 돌겠지만 일단은 그렇다는 것. 그런 것들을 실감케 해주는 오월이다. 식당을 찾는 손님들의 옷차림이 표 나게 가벼워졌으며 좁은 골목을 지나는 자전거들의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듣기 좋게 경쾌하다. 영락없는 봄이 마민카식당 앞에도 지천으로 내려앉았다.
“사장님. 사장…님?”
나준이 해국을 부른다. 그것도 여러 번. 한참 만에 알아챈 해국은 조금 머쓱해한다.
“어? 어… 나 부른 거지? 왜?”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아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뭐 좋은 일 있죠?”
해국은 대답 대신 입매를 부드럽게 끌어올린다. 눈빛도 한결 온순해졌다. “저녁에 봐요~”라고 나긋하게 말하던 수빈의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에.
“그래 보이냐.”
“거울이라도 드려요? 히죽. 히죽. 아까 통화하실 때부터 계속 실없이 웃고 있잖아요.”
괜히 뜨끔한 해국은 민망함을 감추려, 부러 헛기침을 한다.
“뭐, 인마! 내가 언제... 그랬나...?”
“그랬나,는 과거완료고요. 흐흣과 히죽을 실시간으로 남발하는 사장님의 시제는 현재진행이라니까요, 사장님?”
“됐고! 너, 그 말투, 계속 거슬려. 그리고 딱히 존중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말끝마다 사장님~ 사장님~ 그 사장님 소리도 좀 어떻게 하라니까.”
“사장님을 사장님이라고 안 부르면… 뭐라고 해요?”
“음, 그러니까 너랑 나. 호칭을 말이지…”
“그럼 혀…엉?”
“……”
나준이 그 말을 언급한 시점부터 해국은 말이 없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서 어떤 반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형! 배고파~ 형, 듣고 있어? 아잇, 혀엉~!!” 피붙이도 아닌데 형,이라고 줄기차게 불러대던 녀석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들이닥쳐서 귀찮게 굴 것만 같은 녀석이. 해국은 지금 그 녀석 생각에 곤히 잠겨 있다.
“형~ 아니 사장님! 혹시 제가 실수한 거라도…”
당황한 기색으로 눈치를 살피는 나준. 해국은 그런 나준을 안심시키려 억양에 한껏 힘을 싣는다.
“짜식. 실컷 까불 때는 언제고 쫄기는! 호칭은 차차 정하기로 하고, 브레이크 타임 끝나가니까 저녁 장사 준비하자, 응?”
“예~썰!”
이름은 하나준. 나이는 스물하나. 성격은 모난 데 없이 밝고 씩씩함. 외모는, 해국이 보기에는 그냥 안경 낀 샌님인데 나준 본인은 자꾸 ‘너드남’이라고 우김. Nerd? 포털사이트 오픈사전에서 정의하길, 사교적이지 않고 무언가에 푹 빠져 사는 모범생스러운 이미지와 유순한 성격을 지닌 남성을 이르는 말이라는데,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유순’이라... 어쩐지 이 대목이 목엣가시처럼 걸린다. 해국이 지켜본 바, 나준은 마냥 유순한 성격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제 할 말은 똑부러지게 하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의견을 타인에게 명확히 관철시키는 타입이니까. 그러니까 보편적인 ‘너드남’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그래~서 합격. 외적인 이미지와 내적인 이미지가 절묘하게 상충하는 반전 캐릭터라서. 바로 그런 점이 해국의 눈에는 신기했달까, 신선했달까. 여하튼 첫인상부터 꽤 흥미로웠다.
“안녕하십니까. 하나준이라고 합니다.”
“네? 네… 안녕하세요.”
“사장님 되시죠?”
“제가 주인이긴 한데…”
“와아. 저 방금 SNS에 떠 있는 사진 보고 왔는데요. 실물이 훨~씬 더 멋지세요.”
“아, 뭐. 고맙… 고맙습니다.”
해국은 오랜만에 어안이 벙벙한 기분을 느꼈다. 자영업을 하다 보면 정말 별의별 기상천외한 손님들을 다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지구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하는구나’하는 경이로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저기 그런데요. 아무래도 여기에 오신 용건이…”
“네. 있죠, 용건. 그러잖아도 지금부터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아, 음! 잠깐만요. 뛰어왔더니 목이 타서. 실례가 안 된다면 물 한잔 주시겠습니까?”
벌건 대낮에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묻지도 않은 실명을 발설하질 않나. 초면에 남의 실물을 운운하며 혼을 빼놓질 않나. 그보다, 다짜고짜 물부터 내놓으라는데… 그냥 확 쫓아낼까, 하는 생각도 물론 안 한 건 아니지만 해국의 두 다리는 이미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허, 거참, 물건이네. 허엇 참…”
잠깐. 어째서? 분명히 언짢았는데 어이없게도 웃음이 났다. 황당함을 넘어 실소로 번지는 상황이 해국도 마냥 싫지만은 않았나 보다. 솔직히 일정 부분은 흥미롭기도 했다. 안경 낀 샌님. 아니, 너드남이 다음으로 또 어떤 말들을 쏟아낼지 은근 기대가 되기도 하고, 여러모로 흥미진진한 모먼트인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이럴 때일수록 냉수 먹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하면서 조리대 선반에 엎어 둔 물잔 두 개를 꺼내어 나란히 세웠다. 손바닥만 한 유리컵에 8할 정도로 차오를 때까지 냉수를 콸콸 쏟아붓고는, 두 잔 중에 한잔을 들어 올려 입속으로 다급히 털어 넣었다.
“크-하.”
해국은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물기를 쓰윽 닦은 후, 나머지 잔을 집어 들고 조리실을 빠져나갔다. 포커페이스까지는 아니어도 되도록 감정을 숨겨보려 했는데 그게 잘 안 됐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나준을 향해 걸어가다가 ‘그래. 그러고 보니 저 친구, 누구랑 참 많이 닮았단 말이야’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편, 그런 해국의 속마음이 읽힐 리 없는 나준은 천진무구한 얼굴로 식당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있었다.
새하얀 수성페인트를 칠해 놓은 벽면과 테이블마다 가늘고 길게 떨어뜨린 포인트 조명. 프라하의 낭만을 담은 흑백 사진들과 골든버드 오브제로 맞춤 제작한 냅킨 홀더의 섬세함까지. 전체적으로 밥집보다는 카페 분위기에 가까운 모던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곳, 마민카식당. 나준은 이곳이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가게 한쪽에 진열된 북유럽풍의 빈티지 그릇들은 주인이 직접 사 모은 걸까, 하는 궁금증을 품다가 카운터로 슬쩍 고개를 돌렸는데… 계산대 가장자리에 반듯하게 놓인 연두색 화분과 눈이 딱 마주쳤다. 눈대중으로 ‘한 뼘은 되려나’ 하는 어림짐작을 하면서 오른팔을 쭉 뻗어 손바닥을 넓게 펼쳤다. 그러자, 손가락 사이사이로 붉은 꽃잎들이 수북이 차올랐다. 이번에는 손을 내리고 꽃을 좀 더 자세히 보았다. 그 좁은 공간 속에서 피어난 생명이 나준이 알고 있는 그 로즈제라늄이 맞는지 아닌지 긴가민가 하던 차에, 해국이 다시 등장했다.
“자, 마셔요.”
“감사합니다.”
나준은 물잔을 건네받자마자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제가 여기에 오기 전에 뭘 좀 봤는데요.”
“뭘 봤는데요?”
살짝 풀어져 있던 해국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마민카식당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직원을 구한다는 채용공고문을 올리셨더라고요.”
“아, 그거요? 네, 뭐... 그랬죠.”
“마침 제가 지내는 곳이 여기에서 도보로 5분 18초 컷이더라고요. 캬~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출퇴근 문제없고, 신체 건강하고, 용모 단정하고! 그런 의미에서 저, 어떠세요?”
그렇게 나준은 마민카식당의 일원이 되었다. 직원을 들일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위태로웠던 개업 초기가 지나갔다는 뜻이며 식구를 늘릴 만큼은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니까. 하지만 해국은 들뜨지 않는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계절과도 같아서 때가 되면 좋은 일이 오듯 때가 되면 나쁜 일도 온다. 그렇지만, 그렇다 하여도, 당장은 웃고 싶다. 함께 일할 동료가 있고 찾아주는 손님들이 있다.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오월이 왔고, 지금 막 그녀도 왔다.
“어, 왔어요?”
“오긴 왔는데, 다시 갈까 봐요.”
“왜요? 무슨 일 생겼어요?”
“무슨 일은 해국씨한테 있죠. 이 시간까지 손님들 꽉 찬 거 보니까 오늘도 엄청 바빴나 본데, 나까지 보탤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밥은 다음에…”
수빈이 어깨에 걸친 숄더백을 고쳐 메고 돌아서려 할 때, 해국은 하얀 식탁보가 깔린 테라스 자리로 걸어간다. 원탁테이블 중앙에는 ‘Reserved’라고 새겨진 작은 아크릴 팻말이 세워져 있다. 해국은 보란 듯이 그 팻말을 치우며 수빈에게 싱긋한 눈짓을 보낸다. 눈치 빠른 나준도 와인병을 들고 지원 사격에 나선다.
“사장님, 아까 말씀하신 프로세코 와인요. 이거 맞죠?”
나준은 해국을, 해국은 수빈을 본다.
짧은 정적 사이에 주고받는 어색한 눈맞춤만이 언어가 되는 순간이다. 과연 서로는 서로를 올바르게 읽었을까. 눈으로 하는 대화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렇다면 이 순간에 눈은, 보기 위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보이기 위해, 내비치기 위해 있는 것일까. 제삼자인 나준의 시야에는 기다리는 남자와 주저하는 여자가 있다. 해국과 수빈. 두 사람 사이에서 길을 잃은 나준은 홀로 엉뚱한 상상에 빠져든다. 세상이 말도 안 되게 더 좋아져서 스마트폰에 있는 홍채 인식 기술을 지금과 같은 상황에 도입할 수 있다면? 좋아하는 이에게 눈만 갖다 대면 상대가 마음을 열고 잠금 해제되는 신박한 마법이라도 생긴다면 '숙맥'인 사장님을 구제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얼토당토않은 공상을 늘어놓다가,
“저기… 사장님! 이 와인은 어떻게 할까요?”
라는 말로 서먹한 분위기를 흩트린다.
“그건 이리 주고… 마감 시간 다 돼 가니까 뒷정리 좀 부탁하자.“
“옙. 염려 마십쇼.”
그런데 순순히 퇴장하는 줄 알았던 나준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선다. 무언가 중요한 말을 빠뜨린 사람처럼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다. 영문을 모르는 해국은 어리둥절하다. 나준은 그런 해국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들릴 듯 말 듯한 귓속말로 “파이팅…!”이라고 속삭인다.
“야, 너…!”
해국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 소리 하려고 폼을 잡자,
“그럼 전 이만 총총.”
나준은 잽싸게 자리를 뜬다.
그 모습에 피식.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해국과 수빈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다. 그 사이, 검푸르게 짙어진 저녁 하늘 위로 노릇한 반월이 떠올랐다. 적당히 스산한 오월의 밤공기. 달과 바람. 은은한 조명과 감미로운 음악소리가 이 밤, 마민카식당을 포근하게 에워싸고 있다. 이대로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밤이다. 마침, 먼저 온 손님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면서 테라스는 어느덧 둘만의 공간이 되었다. 해국은 테이블 위에 와인병을 내려놓고는 의자 하나를 슬쩍 뺀 후, 무언의 제스처로 수빈에게 답을 구한다.
“민폐 끼치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네요.”
라고 말하는 그녀가, 해국이 내어 준 자리에 앉는다.
“그런 생각하지 말라고 해도, 말 안 들을 테니까… 그럼 이렇게 해요. 오늘은 손님이 아니라 신메뉴 평가원 자격으로 온 거라고요. 그러니까 먹어보고 냉정하게 말해줘야 해요. 무조건 맛있다, 괜찮다 하면 안 된다고요. 네?”
“알았어요. 가감 없이. 솔직하게. 됐죠?”
“좋아요. 자, 그럼 우선 식전주부터 한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해국이 코르크 마개를 열자 산뜻한 포도향이 터져 나와 수빈의 코끝을 간질인다. 티끌 하나 없이 투명하게 반짝이는 크리스털 글라스에 연노랑빛 액체가 반절 가량 차오르고, 수직으로 줄을 선 기포들이 바닥을 치고 토도독 솟아오른다.
“오늘은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의 2017년 산 프로세코를 준비해 봤어요. 고심해서 고르긴 했는데 수빈씨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음~ 벌써 향부터 맛있는데요? 그런데 왜 잔이 하나예요?”
“전 아직 안되죠. 마지막 손님까지 가시는 거 보고 앉을게요. 음식 내올 테니까 수빈씨부터 천천히 들고 있어요.”
프로세코*는 낮에 해국이 전화로 약속한 그 와인이다. 유럽에서는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식전주로 프로세코 와인을 즐겨 마신다. 지금이야 이곳 식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몇 달 전만 해도 수빈은 그 광경이 낯설어 곁눈질로 훔쳐보기 바빴다.
‘빈속에 술부터 들이붓다니. 저 사람들 괜찮을까?’
그랬던 수빈 앞에도 잔이 놓여있다. 한 모금을 입에 넣고 잠깐 머금었다가 조금씩 목을 축이며 음미한다. 와인마다 다른 무게와 질감을, 그 미세한 바디감에 집중하다 보면 잠시나마 모든 걸 잊을 수 있다. 톡 쏘는 탄산의 청량함과 가벼운 탄닌의 쌉싸래함에 정신을 빼앗기는가 하면, 알코올 11도의 힘에 기대어 기억을 편집할 수도 있다. 불편하지 않은 순간들만 오려내 안주로 삼는 밤. 수빈은 종종 이런 밤을 만난다.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앞머리를 헝클고 미간을 간지럽히는데… 공기의 냄새나 바람의 감촉. 사소한 계절의 실감 속에서, 마민카식당의 봄밤이 달큰하게 무르익어 간다.
*이탈리아 글레라 포도로 만드는 백포도주. 베네토주에서 많이 생산되며 적당한 당도가 있고, 샴페인과 다르게 톡 쏘는 맛을 가진 스파클링 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