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어쩌면, 이 풍경을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한 점의 구김도 없이 맑게 반짝이는 봄의 파편이 수빈의 집 창가에 이리저리 튀었다. 수빈은 거실 통창에 떨어진 햇살 조각들을 쫓아 눈으로 한 움큼씩 그러모은다. 그러다 이내 감상에 젖는다.
‘지금 보이는 것을 그림으로 옮길 수 있을까. 사진으로는 담아낼 수 있을까. 아니야, 부질없을 테지. 오직 인간의 육안으로만 온전히 새길 수 있을 테니까.’
살갗에 닿는 바람이 몰라보게 상냥해졌고, 반원형으로 불룩하게 배를 내밀고 있는 옆집 발코니가 못 본 새 화사해졌다. 폭이 좁은 오렌지빛 사각 화분에 촘촘히 들어앉은 블루데이지가 비할 데 없이 싱그럽다. 아래층 발코니에서는 아이들이 비눗방울 놀이를 하는지, 동글동글하게 방울이 진 거품들이 바람을 타고 올라온다. 실바람에 두둥실 떠올랐다가 하늘거리는 꽃잎 위에서 톡,하고 터져나간다. 비눗방울이 톡톡 터질 때마다 까르르 깔깔~ 아이들의 웃음도 함께 터진다. 조금 전부터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수빈의 얼굴에도 은은하게 미소가 번진다.
“도무지 찡그릴 수가 없는 날이네. 오늘따라 하늘은 또 왜 이렇게 예쁜 거야, 흠.”
입은 툴툴거려도 눈꼬리는 부드럽다. 허공에 떠 있는 시선이 빨간 지붕들 위로 살며시 내려앉는다. 몇 달 전, 무작정 프라하로 떠나왔을 때, 수빈의 가슴속에는 한 가지 소망 밖에 없었다. ‘저기 저 지붕 아래에 숨고 싶어. 조용히 숨어 지내고 싶어. 한동안만이라도… 아무도 날 찾을 수 없게 말야.’ 소란한 마음이 사정하듯 외쳤다. 도망치라고. 숨어버리라고. 이혼녀라는 꼬리표로부터의 도피였고, 무너진 꿈으로부터의 피신이었다. 그사이 긴긴 겨울이 다녀갔다. 어느덧 6개월이나 흘렀고, 수빈은 여전히 빨간 지붕 밑에 있다.
‘혹시 글 쓰는데 방해한 건 아니죠? 저녁에 시간 괜찮으면 가게로 와요. 봄 시즌 메뉴로 내어놓을 거 하나 만들어봤는데 수빈씨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어서요.’
방금 해국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수빈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장을 적는다. ‘와인도 있나요? 그럼 생각해 보고.’라는 짧은 문장을 전송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메시지 수신음 대신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수빈이 말한다.
“나예요.” 해국이 답한다.
수빈은 전화기를 귀에 대고 거실 창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다. 그러고는 가만가만 그의 음성을 속으로 짚어본다. 봄의 햇살처럼 보드랍고 반짝이는 소리를.
“오늘도 손님 많았어요?”
“음… 보통 때 만큼요? 수빈씨는요? 뭐 하고 있었어요? 점심은 먹었고요?”
“숨차요. 하나씩요.”
“아, 미안해요. 궁금한 게 너무 많죠, 내가.”
수빈은 언젠가 단비를 보며 호기심의 속뜻을 떠올린 적이 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그녀는 자매처럼 지내는 동생인데, 수빈과는 다섯 살 터울이다. 그날은 눈이 펄펄 내리는 하얀 밤이었다. 502호 수빈의 집에서 함께 와인잔을 기울이던 단비가, “있잖아, 언니… 겨우 두 번 마주쳤을 뿐인데 친구 하자고 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하고 난데없이 물어왔을 때, 수빈은 비로소 이해했다. 인간이 지닌 가장 근원적인 특성인 호기심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일지 모른다고. 누군가에게 자꾸만 눈이 가고, 볼수록 더 궁금해지고, 알아갈수록 깊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 사랑은 대체로 그렇게 시작된다고 나름의 정의를 내렸던 기억이 난다. 순수하게 누군가에 대한 관심을 키울 수 있는 단비가 닿을 수 없는 빛처럼 찬란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랬던 그녀에게, 다시는 없을 줄 알았던 감정의 파도가 밀려온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는 이해국, 이 남자가 있다.
“오늘 날씨 진짜 너무한 것 같지 않아요? 화창한 봄날에 일만 하고 있으려니 괜히 억울한데요.”
“뭐… 그럴 수 있죠. 그래서요?”
“그냥 확 문 닫고 수빈씨랑 놀까요?”
“진심이에요? 손님들은 어쩌고요?”
“하아… 역시 안 되겠죠? 이 봄이 달아나기 전에 빨리 붙잡아야 할 텐데, 이것 참…”
“눈을 한번 크게 떠 봐요. 지금 마민카식당 앞에도 봄이 지천으로 떨어졌을 걸요? 음, 이를 테면…”
속상해하는 해국을 다독이려는 듯 수빈이 다감하게 입을 뗀다. 옆집 발코니에는 ‘블루데이지’라는 봄꽃이 활짝 피었고, 그 아래층에서는 아이들의 비눗방울 놀이가 한창이라고. 거실 창가에는 반짝이는 봄의 파편이 이러저리 튀었고, 빨간 지붕들은 모처럼 본연의 색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고. 봄이 이토록 폐부 깊숙이 들어와 있다고 말하면서 시시콜콜한 일상의 순간들을 나눈다. 마치 소풍날 보물 찾기에서 발견한 선물을 꺼내 보이듯 그렇게.
“좋네요.” 해국의 목소리가 흐뭇하다.
“뭐가요?” 수빈이 반사적으로 묻는다.
“그냥요. 그냥…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주고받을 수 있는 지금이 좋아서요.”
해국과 나눈 대화 중에 특별한 내용이라고는 귀를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렇다 할 화젯거리나 자극적인 가십은 물론이고, 달팽이관이 녹아내릴 것 같은 사랑의 속삭임도 없었다. 그래서, 남다르다. 요즘 날의 수빈은 보통의 순간들이 지닌 가치에 더 마음이 간다. 그저 각자의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다가 문득 떠오르면 짧은 메시지를 보내거나 잠깐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는다. 오늘 하늘이 어떻고, 햇살이 어떻고, 옆집 풍경이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서로의 나날을 포갠다. 별 것도 아닌 주제로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대화 말미에는 “좋네요”라고 담백하게 말할 수 있는 사이. 아무것도 아닌 하루를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관계. 해국과는 이 모든 게 가능하다.
“아참. 봄 시즌 메뉴가 뭐예요?” 수빈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그야, 미리 말하면 재미없죠. 오실 건가요, 손님? 그럼 말씀하신 와인도 종류별로 준비하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식당은 8시 반 마감이니까 수빈씨는 8시쯤 와서 식전주로 프로세코(Prosecco) 한잔 어때요?”
“그 정도면… 마다할 이유가 없겠는데요? 그래요. 저녁에 봐요.”
해국과 약속한 석식까지는 앞으로 다섯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넉넉할 수도 부족할 수도 있는 시간이다. 물론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고도 어렵지 않게 보낼 수야 있겠지만, 수빈은 단 몇 분도 허투루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그 겨울, 꺼져가는 눈으로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리던 유약한 여인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더는 슬픔을 빌미로 시간을 남용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에만 매달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당장은 그와의 대화를 복기하느라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이내 생산적인 일을 찾아서 걸음을 옮겨본다. 외출이라고는 해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집을 비우기 전에 해 두어야 할 일은 없는지 살뜰히 살피던 중에, 식탁 가장자리로 슬그머니 시선이 고인다. 새벽녘에 열었다 덮어둔 노트북이 반듯하게 놓여 있는 자리. 수빈은 한동안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섬섬옥수를 펼쳐 서로 엇갈리게 깍지를 낀다. 하나로 묶인 두 손을 위로 곧게 들어 올리자 으윽, 하는 신음이 입 밖으로 가느다랗게 꼬리를 뺀다. 이런 수선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내친김에 몸이 기억하는 몇 가지 동작으로 스트레칭을 이어간다. 들숨과 날숨. 수축과 이완. 괴로운 건 몸인데 불평은 속에서 일어난다.
‘몸이 언제 이렇게 굳어버렸지? 각성하자, 지수빈. 대체 어쩌자고 이 지경까지…’
팔다리를 길게 늘어뜨리면 뭉친 근육이 풀어지듯이 움츠러든 마음도 쭉쭉 늘여서 단정하게 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무튼 생각은 여기까지. 수빈은 온몸에 도는 찌릿한 감각을 연료 삼아 마침내 행동을 개시한다. 식탁 의자 하나를 빼서 자리를 만들고 노트북 덮개를 ㄴ자로 열어젖힌다. 까만 화면에 불이 번쩍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달아오른 물은 사방으로 열을 뿜어내기 바쁘다. 구멍이 숭숭 난 둥근 스테인리스 수저통과 가운데 부분만 색이 바랜 원목 도마. 상부장 손잡이에 반으로 접어서 걸어 둔 피치색 주방 타월 위에도 촉촉하게 김이 서린다. 그것도 모자라, 뜨거운 습기는 수빈의 마음까지 말랑하게 만드려는지, ‘오늘은 어쩐지…’로 시작되는 밑도 끝도 없는 긍정을 기도문처럼 품게 한다. 오늘은 어쩐지… 마음에 드는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오늘은 어쩐지… 드물게 괜찮은 하루가 될 것 같다고.
그냥, 그런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