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커피 타임은 끝났다. 해국은 마민카식당으로 돌아갔고, 에블린은 하벨시장에 들렀다가 곧장 퇴근한다고 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운 후에도 세탁소는 지루할 틈 없이 복닥거렸다. 이제 막 가게문을 열고 나간 비드라 아저씨는 옆 골목 열쇠집 주인인데, 얼굴의 반을 덮은 흰 수염과 중후한 옷맵시가 인상적인 인물이다. 그는 낮에는 열쇠집에서 일하고 밤에는 첼로를 켠다. 다음 주말에는 화약탑 맞은편에 있는 히베르니아 극장에서 소규모로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여는데, 그날 무대에서 입을 연주복을 맡기러 왔다며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서둘러 자리를 떴다.
언제 또 손님이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누군가 나타나 닫힌 문을 열기 전까지, 적어도 그 시간 동안 세탁소는 온전히 수빈의 차지다. 수빈과 에블린의 세탁소. 이 상관관계를 설명하려면 지난 겨울에 가졌던 홈파티의 추억부터 되짚어야 한다. 단비의 손에 이끌려, 하는 수없이 따라간 곳이 마침 에블린의 집이었고, 수빈은 그 만남을 계기로 소중한 인연과 뜻밖의 일자리까지 얻게 되었다. 덕분에 수빈의 나침반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녀가 프라하에 오면서 계획한 시간은 무비자로 머물 수 있는 3개월이었다. 떠나올 때는 석 달이면 될 줄 알았는데, 이미 그 시간은 한참 전에 초과했다. 모든 게 예정에 없던 일이다. 조용히 숨어 지내기 위해 찾아든 곳에서 다시 또 사람들을 사귀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고, 계획에도 없던 일을 위해 시간을 늘리고... 무엇보다, 다른 여자와 신혼여행을 온 전남편과 마주치는 기막힌 상황까지 겪게 될 거라고는...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월요일 오전 7시 34분 / K스토리 저장 글
제목: 프라하에서 쓰는 이혼일기
소제목: #16. 천문시계 앞에서
오늘이 벌써 열여섯 번째 이야기다. 그에 관해 쓸 말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것에 스스로도 적잖이 놀라고 있다. 어리석은 말인 줄은 알지만, 그와 함께 살았을 때. 그가 대화를 피하지 않았을 때. 그가 이별을 고하기 전에. 지금이 아니라 그때 이렇게 내 마음을 세세히 들여다보았다면 어땠을까. 이혼일기가 아니라 결혼일기를 썼더라면... 그래서 후회나 잘못을 복기하는 게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과 성찰을 했더라면... 그래도 우리는 헤어졌을까?
나는 아직도 바보 같은 가정들을 늘어놓는다. 그를 못 잊어서가 아니다. 이혼이 창피해서도 아니다. 내가 정말 두려운 건 '바로 나'다. 어쩌면 나는 타인과 혼인 관계를 지속하기 어려운 관계 불능적인 인간은 아닐까. 그가 나를 떠난 게 아니라 내가 그를 밀어낸 거라면? 그렇다면 나는, 다시는 어떤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나는... 나는... 난 여전히 바람 앞의 등불 같은데 그는 어쩌면 그렇게 모든 게 쉽고 빠른지, 끝끝내 그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를 보냈다.
"있잖아, 수빈아...."
"난 네가 있잖아, 할 때가 제일 겁나더라. 뭐야? 무슨 일인데?"
"후... 이걸 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해, 그냥. 나 괜찮아지고 있다고 말했잖아. 응?"
"아, 몰라. 어차피 알게 될 일인데 뭐. 너의 그 전남편이 글쎄..."
"그 사람이 왜?"
"이번 주말에 식을 올린 댄다. 재혼을 하신대요."
몇 달 전, 20년지기 친구인 희은의 입으로 그의 재혼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언젠가 벌어질 일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성급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고 착각할 즈음, 그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서울이 아닌 프라하에서. 그의 새 아내와 함께.
'나야. 전화번호 안 바뀌었지? 아까 낮에는 나도 경황이 없어서... 지금 머릿속이 너무 복잡한데... 잠깐 시간 좀 내. 한 시간 후에 올드타운 광장에 있는 천문시계 앞에서 보자.'
그날 오후, 그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그가 보낸 텍스트를 읽는 순간, 한낮에 맞닥뜨린 장면이 팝업창처럼 되살아났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의 자리였던 그 자리. 그 남자의 옆자리. 그곳에서 다정하게 묻는 낯선 여자의 음성.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 현실은 때로 그 어떤 비극보다 잔인할 때가 있다. 찰나의 정적이 흘렀고, 그와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로를 스쳐갔다. 마치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들처럼. 영원히 몰라야만 하는 사람들처럼.
"나와줬구나. 답이 없어서 안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만날 이유도 없지만 피할 이유도 없잖아."
"그래, 뭐... 그렇지. 좋아 보인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야?"
"대답해야 해? 그런 말 듣자고 부른 건 아닐 거 아냐."
"아... 그러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네 얼굴 보니까 머리가 하얘지네."
"새신부는 어쩌고 나왔어? 들키면 어쩌려고?"
"들키다니 뭘."
"몰라서 물어? 프라하가 당신에게 어떤 곳인지."
어떤 마음이면 그럴 수 있을까. 꼭 여기여야만 했나. 나와 함께 신혼여행의 추억을 만든 이곳. 영원한 미래를 약속했던 이곳인데... 다른 곳도 아닌 프라하를 새로운 아내와 다시 찾은 그 사람을 내 머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로써 나는, 그와 함께한 모든 시간을 통째로 부정당한 기분이니까.
"그게 뭐 어때서? 아까 보니까 너도 옆에 누구 있는 것 같던데, 누구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왜? 뭐가 알고 싶은 건데?“
결국 파국. 신물나도록 익숙한 대화의 패턴이 이어졌고, 때마침 우리 두 사람을 질책하듯 시계 종이 울렸다. 구시청사 천문시계는 연, 월, 일, 시간을 나타내는 칼렌다륨,이라는 상단 시계와 계절별 장면들을 묘사하는 플라네타륨,이라는 하단 시계. 이렇게 두 개의 시계로 이루어져 있다. 정각이 되면 황금색 닭이 나와 종을 울리고 칼렌다륨의 해골 모형이 움직이면서 12사도들이 창문을 열며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사라진다. 만인이 손꼽는 진풍경이다. 프라하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낭만적인 볼거리인 탓에, 매 시간 정각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천문시계 앞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그날도 그랬다. 나와 내 전남편. 우리만 빼면 완벽한 그림이었다.
세탁소 손님의 소강 상태는 30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가게 안은 한없이 적막하고 수빈의 눈은 공허하다. 허공을 보는 그녀의 눈이 시선을 떨구면, 환하게 켜진 전화기가 속을 훤히 드러낸다. 오늘 아침, 출근하기 전에 집에서 써 놓고 나온 글이 수빈의 손바닥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아직 발행하지 않은 새 글의 전문을 처음부터 차분히 읽어 내려가다가 미묘하게 복잡한 감정이 일어서 잠시 허공을 본 것이다.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문맥이나 맞춤법, 띄어쓰기나 행간의 의미 같은 것에만 신경을 집중하려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수빈에게는 문장을 짓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 감정의 부피를 줄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매번 실패의 고배를 마시지만 일견 치기가 발동하기도 한다. 자전적 에세이란 모름지기 솔직해야 하는 장르가 아닌가. 에세이를 쓰면서까지 감정을 억제하고 마음을 포장해야 한다면, 수빈은 더 이상 글을 쓸 이유가 없다.
'이제 와서 뭘 망설이는 거야?
괜찮아, 지수빈. 위축되지 말자.
글을 쓰기로 한 건 아무래도 잘한 일이야.'
수빈의 글쓰기에는 가시적인 목적이 없다. 작가를 지망하는 것도 아니고 부업을 노리는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그랬다. 무엇을 바라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글쓰기에서 기대하는 것은 오직 치유. 오직 자유. 비우고 비우다 보면 언젠가는 홀가분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바라는 게 있다면 그런 것이다. 활자로 가득한 까만 글숲에 들어앉아 있다 보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타인의 이야기. 그 속에 담긴 저마다의 고뇌와 무게를 마주하면, 그간 연연해왔던 모든 일들이 어쩌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자각이 든다. 이 세계 안에서는, 여기서만큼은 솔직해져도 되겠다는 안심이 생긴다. 그런 이유로, 수빈은 오늘도 글을 게재하기 위한 '발행' 버튼을 누른다.
3분 전 / K스토리 발행글의 댓글
'아니 왜 그분은 하필이면 또 프라하래요? 아, 화나. 제 얘기도 아닌데 왜 제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안 하셨으면 해요. 관계 불능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요. 이건 좀 이기적인 마음일지 모르지만, 왠지 작가님이 힘을 내면 저도 조금은 용기가 날 것 같아서요. 관계는 늘 어렵고 두렵지만 그럼에도 시작은 해보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작가님도 파이팅! 그럼 다음 글도 응원하겠습니다.'
글을 올리자마자 댓글 하나가 달렸다. 비관적인 생각은 하지 말라고. 용기를 내라고. 두렵지만 같이 힘을 내자고. 얼굴도 모르는 이가 수빈을 위로한다. 담백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수빈의 두 뺨에는 따뜻한 눈물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