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내면화의 오류
"반추(反芻)를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좋은 결정이네요."
…
한 문제가 오랜 시간 해결되지 않고, 더불어 수많은 문제들을 새로이 양산한다면,
잘못을 내 탓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제일 마음 편한 선택지가 되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상황의 모든 어긋남을 내면화해버리고 나면,
억울함도, 속상함도, 분노도, 혼란함도 그친다.
그리고 소요가 가라앉은 자리에 자기혐오가 남는다.
내가 어떤 지점에서 잘못을 저질렀지, 나는 왜 그랬지,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지, 왜 나는 늘 이런 식이지, 왜 나는 제대로 하는 게 없지.
몇 년 전의 나는 이 굴레가 꽤 답답했던 모양이다. 오랜 정신적 투쟁에 지쳐 선택한 '내 탓'이 사실은 분했던 것 같다.
그때의 일기를 다시 읽는 내가 과거의 나를 이해하고 편을 들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불평하지 않고,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속한 집단의 뜻과 나의 뜻이 일치하지 않을 때, 내 개인의 관점을 벗어나 더 큰 시야로 상황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을 때,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질문을 던지는 행위를 통해 나는 타인을, 집단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것이다.
또한 집단은 답변할 줄 알아야 한다.
개인이 던지는 질문을 묵살하고 집단이 가진 정치적 권력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의 의문점을 해소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집단은 개인이 불평하지 않고 질문하며 얻은 결과를 통해 집단에게 전하는 비판의 소리들을 수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여기서의 집단은, 단순히 개인에 비해 수적으로만 우세한 공동체의 단위가 아니다.
수직의 상하관계-명목적으로는 수평인 공동체일 수 있다-에서 상위에 위치한 우두머리, 즉 집단의 리더를 의미하기도 한다.
정해진 권위에 아무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공동체에서, 개인들은 두 가지 갈림길에 설 수밖에 없다.
떠나거나, 이성을 버리거나.
-2018년 7월 29일 일요일, 기온은 높지만 습도는 낮아서 좋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