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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석영 Jun 25. 2020

포스트 코로나 시대, 동물원에 미래가 있을까?


포스트 코로나 시대동물원에 미래가 있을까?  

-창경원과 런던 동물원그리고 칼 하겐베크  


                             

꼬맹이 시절, 내가 처음으로 갔던 동물원은 이름하여 ‘창경원(昌慶苑)’이었다. 정확히는 창경원 안에 식물원도 있고 동물원도 있었지만 당시 우리는 이곳의 동물원을 그저 창경원이라 부르곤 했다. 일본의 조선 모욕, 그 끝판왕이었던 창경원은 애버랜드, 서울랜드 같은 ‘테마파크’의 ‘원조’였다. 


창경궁의 시원은 1418년으로, 이 해 조선 왕 태종은 현 창경궁 터에 수강궁(壽康宮)을 건립한다. 세월이 흘러 1483년~1484년, 성종은 이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昌慶宮)을 세운다. 하는 일마다 창성하고(昌) 경사스러운(慶) 일이 가득해야 할 이 왕궁이 일개 놀이시설로 전락한 건 1907년~1909년, 창경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건 1911년의 일이다. (후원의 왕실 농경지이자 농업 교육장이었던 내농포는 1907년 연못이 되고 만다)

 

1908년과 1909년, 창경원 내 동물원을 지을 때 참고가 된 모델이 있었을까? 일본 최초의 동물원은 1882년 개장한 도쿄 시의 우에노 동물원으로, 정확한 이름은 ‘온시 우에노 동물원 (恩賜上野動物園)’이다. 일본어로는 ‘온시’라고 읽는 한자는 한국어로는 ‘은사’라고 읽는다. 1882년 당시 이 동물원의 부지는  일본 왕실 소유였는데, 1924년 왕실이 이것을 도쿄 시에 ‘은사’했다 해서 부쳐진 이름이다. 이 온시 우에노 동물원을 설계했던 이들의 후배들이 내가 처음으로 본 동물원도 설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온시 우에노 동물원을 만들던 당시, 참고가 된 모델은 무엇이었을까? 근대 동물원은 어디서,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이것을 추적하다보면 우리는 인류사에 나타났던 각 왕국의 왕실 소유 동물 수집관(menagerie)을 만나게 된다. 최초의 동물 수집관은 기원전 3,500년경에도 있었다고 하며, 중국의 주 문왕,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 바빌로니아의 네부차드네자르 2세( Nebuchadnezzar II) 등 숱한 왕들이 왕실 동물원을 거느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13세기 중엽,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1000마리가 넘는 치타를 (동물 사냥을 위해) 사육했다는 이야기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대중용 전시공간인 근대식 동물원은 이러한 왕실 소유 동물 수집관들의 개방, 전용, 변형으로 시작되었다. 1779년 대중에게 공개된 신성로마제국 소유의 쇤브룬 동물수집관,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될 무렵 베르사이유 궁전에 있던 동물수집관이 이동하여 생긴 파리 시의 식물원(Jardin des plantes) 내 동물원 등이 죄다 이런 식이다.  


이런 원시적 형태의 동물원에서 진일보한 근대식 동물원은 1828년 런던에서 건립된다. 런던 동물원은 처음 설립되었을 무렵 대중 개방이 목적은 아니었지만, 1830년대와 40년대를 지나며 대중용 시설로 다시 디자인된다. 그 결과물이 1847년의 대개장이었다. 런던 동물원은 향후 세계의 각종 동물원의 모델이 된다. 온시 우에노 동물원을 설계한 이들이 참고했던 동물원은 다름 아닌 런던 동물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단절이 일어난 시점은 1847년이 아니라 1907년이었다. 이 해, 독일의 칼 하겐베크(Carl Hagenbeck, 1844~1913)는 새로운 유형의 동물원을 세계에 선보인다. 하겐베크는 동물을 감옥 같은 좁은 우리에서 해방시켜 자연 상태의 서식지와 유사한 생태환경의 거주공간으로 옮겼다. 동물을 생물학적 분류 체계에 따라 나누지 않고 지리적 생활조건에 따라 나누는 원칙도 하겐베크가 수립한 원칙이었다. 그러니까 동물원 안 동물들이 최대한 자연 상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나름’ 배려한 것이다. 이것을 역사는 하겐베크 혁명이라 부른다.    


이렇게 보면, 하겐베크는 동물을 사랑한 위대한 혁명가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하겐베크는 전 세계를 돌며 동물을 게걸스럽게 사고 판 상인이었는데 (심지어 그는 창경원에도 인도산 코끼리를 팔았다) 그의 수집 목록에는 인간도 있었다. 그의 눈에 덜 문명화되어 보이는 사람들, 제 3세계의 원주민들을 독일로 데려온 후 자신의 동물원에서 다른 동물들 옆에 세운 것이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분노해 있는 우리들의 시각으로 보면 천인공노할 이런 ‘인종 전시(ethnological expositions)’가 하겐베크 시대에는 아무렇게나 자행되었다. (인간을 다른 동물처럼 전시하는 일은 심지어 1958년까지 지속되었다. 1958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엑스포’58에서 전시된 것이다.) 


당연히 하겐베크의 인종차별적 시선은 그의 동물차별적, 종차별적 시선을 시사한다. 하겐베크 동물원에 있던 동물들이 그들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받았을 리 만무한 것이다. 그러나 하겐베크 혁명 덕에 동물원 내 동물들이 그나마 ‘숨’은 쉴 수 있게 된 것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    


20세기 후반 들어 세계의 동물원들은 전시 기능에서 교육 기능, 생물종 보호 기능으로 자신의 존재 목적을 바꿔가고 있다. 또는 적어도 그렇게 홍보를 하고 있다. 하지만 하겐베크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 그 시설이 얼마나 동물 친화적이든, 동물원 자체가 인간의 이익이라는 (지구적 시각에서는) 편향적 이익을 위한 시설임을 곱씹어봐야 한다. 예전에 사람들은 개인이 노예를 거느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사형제도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성이라면 무조건 남성보다 적은 급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지금 얼마나 낡아빠진 생각인가. 멀쩡히 잘 살던 야생동물을 포획해 그들의 서식지에서 그들을 격절할 권리가 과연 인간에게 있는 걸까? “우리가 그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동물을 고통스럽게 할 도덕적인 권리가 우리 인간 종에게는 없다”고 대미안 아스피널(Damian Aspinall)은 말한다. (그는 몇 개월 전부터 자신이 운영하던 야생동물파크 안의 야생동물을 야생으로 되돌려 보내고 있다.) 


만일 아스피널의 생각마저, 동물의 권리마저 교육하는 곳으로 남아 있겠다면, 나 역시 동물원의 존속을 찬성할 생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물원으로서는 자가당착이 아닐까? 야생동물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19년형 코로나바이러스의 경고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이들에 동물원 운영자들이 의당 포함되지 않을까? 하겐베크 혁명에 이은 2차 혁명이 필요한 시점은 지금이 아닐까? 


역사의 흐름이 이러하거늘, 역사를 거꾸로 사는 이들이 있다. 제주 조천읍에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물테마파크를 조성하려는 리조트 기업 대명과 제주도 공무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언젠가는 바로잡히고 재평가되는 법이다. 지금 대서양 양편에서는 과거에 인종차별적이었던 백인들의 동상이 가차 없이 내동댕이쳐지고 있다. 자기 편의대로 동물을 수집해온 동물원의 운명도, 또 새로 세워질지도 모를 미래의 동물원의 운명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겨레신문, 애니멀피플 섹션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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