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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희 Dec 21. 2022

13세기 유럽 성모기적담 속의 '비너스 반지' 모티프


‘비너스 반지’ 모티프가 들어 있는 설화에 등장하는 신이 영국 역사서에서는 비너스이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의 시문학에서는 동정녀 마리아이다. 12세기 영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비너스의 모습은 소유욕과 복수심을 지닌 악령의 속성을 지닌 신이고, 서사는 일종의 악령퇴치담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13세기 프랑스와 스페인의 음유시인 사제들은 비너스가 등장하는 악령퇴치담을 동정녀 마리아가 등장하는 성모기적담으로 개작해서 전승하였다. 


 성모 마리아가 등장한 ‘비너스 반지’ 설화로 가장 오래된 판본은 프랑스 수와송 지방의 음유시인 사제 고티에 드 쿠앵시(Gautier de Coincy 1177-1236)가 지은 시문학에서 발견된다. 생 메다르 성당의 사제이면서 음유 시인이었던 쿠앵시는 ⟪동정녀 마리아의 기적⟫이라는 책에 ⟨팔룸부스 사제⟩와 유사한 사건을 다룬 노래를 수록하였다. ⟨성모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 어느 성직자⟩라는 제목의 노래인데, 줄거리를 짧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어떤 성직자가 보수 중인 낡은 교회에서 친구들과 공놀이하게 되었다. 그는 공놀이하다가 여자 친구가 준 반지가 상할까 봐 걱정되어서 성모상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두려고 성모상으로 다가갔다. 새롭게 제작된 성모상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성직자는 반지를 준 여자 친구보다 성모가 십만 배는 더 아름다우시다고 찬양하였다. 게다가 앞으로는 여자친구도 아내도 얻지 않고 오로지 순수한 사랑을 성모에게만 바치면서 살겠다고 맹세하였다. 맹세를 끝마치고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자 갑자기 손가락이 구부러져서 반지를 다시 뺄 수 없었다. 그가 공포에 떨면서 소리를 지르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와서 사연을 물었다. 성모상이 말을 하고 움직였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모두 다 그가 속세를 떠나서 오로지 성모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성모에게 한 맹세를 잊어버린 성직자는 여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는 신혼 첫날밤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든다. 꿈속에 성모가 나타나서 성직자를 진실하지 않은 거짓말쟁이라고 호되게 꾸짖는다. 놀라서 깨어난 성직자는 성모의 출현이 단순한 꿈이라고 여기면서 다시 신부와 동침하려고 한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진다. 꿈속에 다시 나타난 성모가 분노에 가득 차서 온갖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다. 성직자는 자기 잘못을 깨닫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곧바로 속세를 떠난다. 그는 어느 은둔처에 머물면서 성모와 결혼한 수도승의 삶을 산다. 


학자들은 쿠앵시가 ⟨성모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 어느 성직자⟩를 지을 때, 당대에 널리 알려졌던 맘스베르의 ⟨팔룸부스 사제⟩를 저본으로 삼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쿠앵시 판본은 맘스베르 판본과 다른 점이 적지 않다. 우선, 전반부에서, 주인공이 결혼식을 올린 상태에서 조각상에 반지를 끼우는 것이 아니라 미혼 상태에서 여자 친구에게서 받은 반지를 조각상의 손가락에 끼운다. 또한, ⟨팔룸부스 사제⟩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결혼 서약’ 모티프가 새롭게 삽입되었다. 쿠앵시는 주인공이 성모 마리아에게 어떻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는지 상세하게 서술한다. 

Gautier de Coincy, Wiki Commons


청년은 공놀이할 동안 여자 친구가 준 반지를 안전한 장소에 두려고 교회를 향해서 걸어갔다. 그때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새로 제작된 성모상을 보았다. 그 성모상이 너무도 싱그럽고 아름다워서 그는 무릎을 꿇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한 채로,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했다. 이제 그의 마음이 완전히 바뀌었다. “성모님, 지금, 이 순간부터 평생 당신을 위해 살아가겠습니다. 당신처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처녀나 여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이 반지를 내게 준 처녀보다 수십만 배 더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내 마음을 모두 그녀에게 주었지만, 당신을 사랑하기에 이제 그녀를 떠나겠습니다. 그녀가 준 마음과 보물을 버리겠습니다. 순수한 사랑을 담아서, 다시는 그 어떤 여자친구나 아내도 갖지 않는다는 맹세의 징표로, 이 아름다운 반지를 당신께 바칩니다.”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는 조각상의 곧게 뻗은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그 순간 조각상이 손가락을 아주 세게 구부려서, 손가락을 자르지 않는 한, 반지를 다시 빼낼 수 없었다. 청년은 너무도 두려워서 공포에 질려 소리 질렀다. 


가톨릭 사제였던 쿠앵시는 독자들이 성모 마리아의 분노에 공감할 수 있도록 주인공의 충동적인 행동과 경솔한 맹세를 묘사하는 데 공을 드린다. 대단원에서 성모는 청년의 신방에 나타나서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데, 그 모습이 자비와 은총의 성모라고 보기는 어렵다. 쿠앵시의 시 속에 등장하는 성모는 질투심과 소유욕에 사로잡힌 비너스 신을 떠올리게 한다. 동정녀 마리아가 이러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비너스 설화에서 서사를 끌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너스 신의 변천사를 추적한 베타니 휴즈는 ⟪여신의 역사⟫(미래의 창, 성소희 옮김, 2019)란 책에서 아스타르테, 아프로디테, 비너스로 이어지는 여성신의 계보가 중세 시대에는 동정녀 마리아에서 그 맥을 잇는다고 보았다.


아스타르테에서 아프로디테 그리고 비너스가 되기까지 이 여신은 4천 년 동안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갔다. 이 불굴의 생명력을 보면, 사람들은 초자연 세계의 중재자로서 자극과 위안을 주는 강력하고 연민 어린 여성을 언제나 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아프로디테는 기독교 풍토 속에서 종교 혁명을 거치고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프로디테가 다름 아닌 동정녀 마리아의 외피를 두르고 재탄생했다.


비너스가 중세 시대에 동정녀 마리아로 재탄생했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쿠앵시 전설 속의 성모 마리아는 사랑, 욕망, 질투, 분노 따위의 감정을 지닌 비너스 신에 가깝다. 쿠앵시는 로마 귀족 청년이 퇴마사의 도움으로 비너스 신을 물리치고 인간 신부와 결합하는 ⟨팔룸부스 사제⟩ 류의 설화에서 전반부 서사를 빌려왔지만, 성모기적담에 부합되게 후반부를 대폭 개작하였다. 


쿠앵시의 음유시에서 조각상이 악령의 속성을 지닌 비너스 상이 아니라 사제가 섬기는 성모상으로 설정된 만큼 후반부 개작은 필수적이었을 듯싶다. 쿠앵시는 팔룸부스 사제와 같은 강력한 퇴마사가 사건에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의 출현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청년이 속세를 영원히 떠나서 수도승이 되는 것으로 결말을 개작하였다. 성(聖)과 속(俗)의 힘겨루기에서 속이 승리하는 ⟨팔룸부스 사제⟩와는 달리, 쿠앵시의 이야기에서는 속이 아니라 성이, 인간이 아니라 신이 승리한 것이다. 


‘비너스 반지’ 설화에서 서사를 빌려온 성모기적담은 13세기 갈리시아포루투갈어로 번역되어 중세 스페인에 널리 전승되었다.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왕 알폰소 10세(재위 1252~1284)가 편찬한 성모마리아 찬가 집에 유사한 서사를 지닌 음유시가 수록되었다.[2] 현왕(El Sabio)으로 불리던 알폰소 10세가 편찬한 찬가 집에 수록된 성모기적담은 쿠앵시의 음유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3] 알폰소 10세의 성모찬가 집(Cantigas de Santa Maria)에 수록된 판본은 오늘날까지 삽화와 노래가 전승되고 있다. 유튜브 검색창에 ‘Cantiga 42’를 넣으면 스페인 또는 포르투갈의 전통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다.


https://www.gettyimages.com/detail/news-photo/scenes-of-life-in-medieval-times-a-building-site-a-game-of-news-photo/142083928?adppopup=true



[1] Poquet, ed. Les Miracles de La Sainte Vierge par Gautier de Coincy, Paris, 1857, 354-360; Thomas Head, ed. Medieval Hagiography, London: Routledge, 2001. 636-638.

[2] John Esten Keller, The Motif of the Statue Bride in the "Cántigas" of Alfonso the Learned, Studies in Philology , Jul., 1959, Vol. 56, No. 3 (Jul., 1959), pp. 453-458

[3] https://youtu.be/qH_foNg4W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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