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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희 Dec 05. 2022

영국 역사서와 메리메 소설 속의 '비너스 반지' 모티프

팀 버튼의 ⟪유령신부⟫를 본 관객들이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아마도 빅터가 겁에 잔뜩 질린 모습으로 시체신부 에밀리와 마주치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빅터는 결혼 리허설할 때 혼인 서약을 제대로 암송하지 못해서 주례를 맡은 신부에게서 혼쭐이 난다. 마을 근처 겨울 숲에서 소심하고 유약한 빅터는 혼인 서약을 열심히 외우려고 하지만, 좀처럼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빅터는 품에서 결혼반지를 꺼내서 쳐다보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연습한다. 


이 손으로 당신의 슬픔을 걷어내고, 

포도주가 되어 당신의 잔을 언제나 채우겠습니다.

이 촛불로 어둠 속에서 당신의 길을 밝히겠습니다.

이 반지로 내 아내가 되어 주시길 당신께 청합니다. 


결혼 서약을 암송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빅터는 흥분에 휩싸여 맨 마지막 구절을 읊을 때 눈 덮인 땅 위에 무릎을 꿇고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손가락 형상의 물체에 반지를 끼운다. 그런데, 눈밭에서 삐죽 튀어나온 물체는 죽은 나뭇가지가 아니라 시체신부의 손가락뼈였다. 빅터가 앙상한 뼈에 반지를 끼우면서 읊조린 결혼 서약이 시체신부를 이승으로 소환한 것이다. 

(왼편 그림) 빅터가 반지를 끼운 나뭇가지 형상의 손가락; (오른편 그림) 결혼 서약과 반지로 시체신부를 소환한 빅터

⟪유령신부⟫와 그 저본으로 꼽혔던 ⟨시체신부⟩와 ⟨손가락⟩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땅에서 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손가락 모양의 이상한 물체에 반지를 끼워서 끔찍한 곤경에 처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반지’ 모티프는 12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서구 및 유대 문화권에서 폭넓게 전승되어왔다. 서양 학자들은 이러한 모티프를 ‘비너스 반지’ (Venus-ring motif) 모티프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이 모티프가 들어 있는 최초의 판본인 12세기 영국 역사서에 비너스 신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유대 전승본에서 결혼반지가 끼워진 존재는 시체신부 또는 여자 악령이지만, 영국 전승본에는 비너스 신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비너스 반지’ 모티프가 들어 있는 최초의 설화는 맘스베리의 윌리엄(William of Malmesbury 1095-1143)이 ⟪영국 왕 연대기⟫에 수록한 ⟨팔룸부스 사제⟩(The Priest Palumbus)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


로마 시민인, 어느 지체 높은 집안의 청년이 있었다. 고귀한 집안의 처녀와 결혼한 청년은 친구들을 위해 며칠 동안 잔치를 베풀었다. 음식을 배불리 먹은 사람들은 소화도 시킬 겸 공놀이를 하였다. 청년은 결혼반지를 잃어버릴까 봐 걱정되어서 놋쇠 동상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놓았다. 


공놀이를 끝마치고 동상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려고 하자 동상이 주먹을 꽉 쥐는 바람에 반지를 뺄 수 없었다. 청년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지만, 친구들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밤에 하인들과 동상에 가보았는데, 손가락은 펴져 있었지만, 반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다음 날 신부 옆에 눕자 짙은 안개 같은 물체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 방해꾼은 아내를 껴안지 못하고 막으면서, “내 곁에 누워라. 너는 오늘 나와 결혼했다. 나는 비너스 신이다. 너는 오늘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웠어. 나는 그 반지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아내를 안으려고 할 때마다 같은 일, 같은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청년은 아내가 조언한 대로 부모에게 사실을 알렸고, 부모는 팔룸부스라는 사제에게 사건을 의뢰하였다. 팔룸부스는 뛰어난 심령술사여서 악령을 마음대로 퇴치할 수 있었다. 


막대한 금은보화를 받기로 한 팔룸부스는 청년에게 편지를 보냈다. “밤에 갈림길에 서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시오.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갈 거요. 그들이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마시오. 그 무리가 지나가고 나면 비할 수 없이 아름답고 큰 남자가 경주용 마차에 탄 채 지나갈 것이요. 그에게 말을 걸지 말고 이 편지를 전해주시오. 당신에게 그럴 용기가 있다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오.” 청년은 사제가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일군의 무리가 지나간 후 마지막으로 에메랄드와 진주로 장식한 마차를 탄 악령이 나타났을 때 청년은 말없이 편지를 전해주었다. 악령은 편지를 열어본 후에 “전능하신 신이시어, 제가 언제까지 팔룸부스 사제의 사악함을 견뎌야 합니까?” 악령은 부하들에게 명령해서 비너스에게서 반지를 억지로 빼앗아 왔다. 


청년은 간절히 바라던 대로 아내와 무사히 동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악령이 신에게 불평한 사실을 전해 들은 사제는 자기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달았다. 사제는 군중 앞에서 자신이 저지른 모든 사악한 죄를 낱낱이 교황에게 고해한 후에, 사지를 절단하는 놀라운 속죄를 하고 죽었다.


⟪영국 왕 연대기⟫에는 ⟨팔룸부스 사제⟩ 속의 사건이 1137년에 로마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이라고 쓰여 있다.  이 이야기는 13세기에 출간된 ⟪웬도버의 로저가 쓴 역사의 꽃⟫이라는 역사서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1058년에 로마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피에르 야코프 보나콜시(Pier Jacopo Alari Bonacolsi)가 제작한 비너스 청동상. 이 두 비너스 청동상은 메리메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비너스 상을 연상시킨다. 

 맘스베리가 소개한 ‘비너스 반지’ 모티프가 들어 있는 설화는 서구 문화권에서 오랜 세월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1837년에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érimée)가 출간한 단편 소설 ⟨일의 베누스⟩ (La Vénus d'Ille)일 것이다. 이 작품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가 편찬한 ⟪세계의 환상소설⟫(민음사, 2010)에 포함되어 있으며, 서구에서는 영화로도 몇 차례 제작된 적이 있다. ⟨일의 베누스⟩는 19세기 초에 쓰인 소설인 만큼 등장인물도 다양하고 사건과 배경도 풍부하게 묘사되었다. 하지만 주요 사건의 줄거리는 ⟨팔룸부스 사제⟩와 아주 비슷하다. 일인칭 소설인 ⟨일의 베누스⟩는 어느 고고학자의 시각에서 사건을 서술한다. 


일인칭 화자인 고고학자는 유물을 감정해달라는 어느 부유한 골동품 수집가의 초대를 받아서 카탈로냐 근처의 카니구 산 지방으로 여행한다. 올리브 나무 밑에서 발견된 유물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비너스 상이었다. 화자가 저택을 방문했을 때, 골동품 수집가는 때마침 아들을 결혼시키려는 참이었다. 결혼식을 앞둔 청년은 예식을 올리기 직전에 테니스 경기를 한다. 그는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결혼반지가 공을 치는 데 방해가 되자 투덜거리면서 테니스장 근처에 있는 비너스 동상으로 달려가서 동상의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잠시 끼워둔다. 나중에 테니스 경기를 승리로 끝마친 청년이 반지를 비너스 동상의 손가락에서 빼내려고 하지만, 동상이 손가락을 구부리는 바람에 실패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목격한 청년은 비너스가 반지를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아내라고 생각하기 때문임을 직감하고 강렬한 두려움에 휩싸인다. 이처럼, ⟨일의 베누스⟩의 전반부 서사는 12세기 역사서 속의 ⟨팔룸부스 사제⟩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 


⟨팔룸부스 사제⟩와 ⟨일의 베누스⟩의 차이점은 후반부에 있다. 메리메의 소설에서 청년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는, 팔룸부스 사제와 같은 능력 있는 퇴마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신혼 첫날 밤, 차갑고 커다란 비너스 동상이 신방으로 찾아와서 신부의 침상 곁에 눕는다. 나중에 신방에 들어온 청년은 침대에 누워서 자신을 기다리는 청동 비너스 상과 마주친다. 청년은 두려움에 떨면서 무릎을 꿇었지만, 비너스 상이 양팔을 벌려서 힘껏 껴안는 바람에 온몸이 으스러져 처참하게 죽는다.  



[1] The Project Gutenberg EBook of William of Malmesbury's Chronicle of the Kings of England, by J. A. Gi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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