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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희 Dec 30. 2022

16세기 유대 랍비 전설 속의 '비너스 반지' 모티프

‘비너스 반지’ 모티프가 들어 있는 설화는 16세기에 유대 문화권에서도 폭넓게 전승되었다. 유사 설화가 유대인이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지역뿐만 아니라 독일의 보름 (Worm) 시에서도 채집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팔룸부스 사제 대신에 랍비 루리아가 등장하는 성인 전설로 전승되었고, 독일에서는 역사적인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민담으로 전승되었다.


독일 보름 시에서 전승된 유대 민담은 ⟨여자 악령과 결혼한 남자⟩라는 이야기인데, 후반부에 여자 악령이 비너스 신과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설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랍비의 아들로서 친구들과 숨바꼭질할 때 자기도 모르게 악령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다. 그는 술래였는데 나무 구멍에서 삐죽 튀어나온 악령의 손가락을 친구 것으로 착각하고 장난으로 반지를 끼우고 결혼 서약을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주인공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을 때, 첫날 밤에 금과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은 악령이 나타나서 자기가 아내라고 주장하며 신부를 죽인다. 두 번째 신부도 같은 방식으로 죽고, 세 번째 신부만이 살아남는다. 세 번째 신부는 진주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자 악령이 부부 침상으로 다가오자,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말해서 살아남는다.


〈여자 악령과 결혼한 남자〉는 ⟪유령신부⟫의 저본으로 꼽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유령신부⟫의 저본으로 꼽히는 두 이야기는 ⟨시체신부⟩와 ⟨손가락⟩인데, 그 가운데서 출처가 명확하게 밝혀진 이야기는 ⟨손가락⟩뿐이다. 슈워츠가 ⟨손가락⟩의 저본(底本)으로 삼은 전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설화이다. 하지만 그 설화에 ‘근접한’ 이본이 ⟨장난 결혼식⟩(“The Mock Marriage")이란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었다[1]. ⟨장난 결혼식⟩은 16세기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실존 인물, 즉 ‘아리’(Ari)라고 불리는 랍비 이삭 루리아 (Rabbi Issac Luria 1534-1572)의 행적에 관한 전설이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Gorion 320-21).


사페드의 어느 시골길을 걷던 청년들이 잠시 앉아서 쉬다가 땅에서 삐죽 튀어나온 채 위아래로 움직이는 손가락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한 청년이 장난으로 “누가 이 손가락에 결혼의 징표로 반지를 끼울래”라고 묻자, 다른 청년이 일어나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그러자 반지를 끼운 손가락이 땅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 모든 청년은 읍내로 갔고, 한동안 그 사건은 잊혀졌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반지를 끼웠던 청년이 어떤 처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식을 하는 날, 식장에 갑자기 한 여자가 나타나서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와 결혼했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거지? 율법에 따라서 판결하면 따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신랑과 신부를 죽여 버리겠어.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봐요.” 그 여자의 손가락에서 신랑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본 신부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고, 식장에는 신랑과 그 여자만 남았다.  


그러자 랍비 이삭 루리아는 신랑을 불러서 그 악령과 결혼할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다. 신랑은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던 그날 차라리 다리가 부러져서 싸돌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말한다. 랍비는 수행원을 불러서 악령을 데려오라고 한다. 수행원이 악령을 발견하지 못한 채 돌아오자 랍비는 악령이 두려움 때문에 집 안에 숨어 있으니깐 “랍비가 너와 네 가족을 파문할 거다”라고  위협해서 데려오라고 명령한다.   


악령이 나타나자 랍비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서 같은 종족끼리 결혼하라고 말한다. 악령이 ”결혼반지를 낀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나요“라고 대꾸하자, 랍비는 ”그는 네 얼굴을 결코 본 적도 없고, 네가 악령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반지를 손가락에 끼운 것은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악령이 계속 말대꾸하면서 따지자 랍비는 화가 나서 이혼장을 써주면서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악령과 그 가족 모두를 파문시켜버리겠다고 말한다.


랍비는 서기를 불러서 이혼장을 쓰게 하고 악령에게 신랑과 신부와 그들의 가족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말한다. 악령은 랍비의 말에 복종한 후에 사라진다.  랍비가 신부의 아버지를 불러다 다시 신랑과 결혼을 시키라고 설득한 덕분에 결혼식이 새롭게 거행된다.  


이 유대 전설에는 비너스 대신에 여자 악령(Demon)이 등장하지만, 전체적인 줄거리가 ⟨팔룸부스 사제⟩와 많이 유사하다. 전설의 핵심은 랍비 루리아가 어떻게 악령을 물리치고 곤경에 처한 신랑을 구했는가에 있다. 다시 말해, 악령을 제압하는 퇴마사 랍비의 카리스마와 지혜로운 판결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하지만 ⟨팔룸부스 사제⟩에는 들어 있지 않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결혼 서약을 하는 모티프가 삽입되어 있다.  ⟨장난 결혼식⟩에 ‘결혼서약’ 모티프가 들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영국 판본뿐만 아니라 프랑스 판본(또는 스페인 판본)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듯싶다.   


⟨장난 결혼식⟩이 내게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영국의 역사서와 프랑스의 성모 기적담에서 서사를 빌려 왔지만, 비너스 또는 성모 마리아가 악령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맘스베리의 윌리엄이 쓴 12세기 역사서 속에 기록된 로마 이야기에는 비너스 신이 등장하고, 프랑스 사제 쿠앵시의 ⟪동정녀 마리아의 기적⟫에서는 비너스 대신에 성모 마리아가 등장한다. 그런데, 16세기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비너스나 마리아를 여자 악령으로 대체하였다. 그 이유를 우리는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선, 예수의 신성(神性)과 동정녀 마리아의 무염수태를 믿지 않아서 유럽인들에게 온갖 박해를 받아온 유대인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16세기 초 독일 레겐스부르크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유월절 무교병을 만드는데 기독교 소년의 피를 넣었다는 누명을 썼으며, 고리대금업을 했다는 이유로 독일인들의 박해를 받았다. 유대인들을 지켜주던 막시밀리안 1세가 죽자, 독일인들은 곧바로 유대교 회당을 빼앗고 그들을 레겐스부르크시에서 추방했다. 레겐스부르크 시민들은 유대교 회당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성모마리아를 위한 교회를 지었다. 유대인을 추방하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Albrecht Altdorfer)는 〈아름다운 성모 Schöne Maria〉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이 치유의 기적을 지녔다는 소문이 독일에 널리 퍼져서 수많은 기독교 순례자가 성모마리아의 은총을 받으려고 레겐스부르크로 모여들었다. 독일인들의 성모 신앙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에게 성모 마리아는 강력한 악령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알트도르퍼가 그린 1519년의 유대교 회당(좌), <아름다운 성모>(중앙), 오스텐도르퍼가 그린 레겐스부르크의 순례자들 (우)


‘비너스 반지’ 설화가 유대 문화권에 들어오면서 여자 악령 이야기로 대체된 또 다른 이유로는 릴리트 신화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유대의 탈무드 신화에서 아담의 첫번째 아내는 이브가 아니라 릴리트이다. ⟪벤 시라의 알파벳⟫이라는 중세 문헌에 따르면, 릴리트는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서 흙으로 빚은 최초의 여성이다. 아담과 릴리트는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는데, 특히 부부가 성관계할 때 의견이 맞지 않았다. 릴리트는 상위 체위를 원했고 아담은 자신이 릴리트보다 우월한 존재이니 하위 체위를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릴리트는 아담이나 자신이나 모두 흙으로 빚은 사람이어서 동등하다고 주장하면서, 아담 곁을 떠났다. 그 이후,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 릴리트를 찾아와서 아담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매일 백 명의 자식들이 죽을 거라고 겁박했다. 하지만 릴리트는 끝끝내 아담의 곁으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악령 사마엘의 신부 또는 밤의 괴물로 사는 삶을 택했다.

릴리트 또는 인안나의 형상으로 추정되는 바빌론 테라코타 (좌), 라파엘(중앙)과 리차드 웨스톨(우)이 그린 릴리트

⟪히브리 여신⟫을 쓴 라파엘 파타이(Raphael Patai)는 릴리트를 아담의 첫번째 아내, 악령의 왕인 사마엘의 신부, 홀로 잠이 든 남자를 유혹하는 밤의 괴물(Succuba), 유아 살해자, 그리고 신의 배우자가 된, 화려한 전적을 지닌 여자 악령(she-demon)으로 서술한다.[2] 릴리트는 탈무드가 쓰여진 시기(2세기~5세기)에는 사악한 여자 악령으로 등장하지만, 중세 카발라 시대에는 신의 배우자라는 높은 지위에 이른다. 특히 릴리트는 홀로 잠이 든 남자를 유혹하거나 갓난 아이들에게 질병과 죽음을 가져다주는 존재여서 유대인들의 가정을 위협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릴리트는 아람어가 기록된 주문 그릇에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표시된다. 릴리트는 아담의 첫 번째 아내만이 아니라 유사한 속성을 지닌 악령들을 대표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1] ⟨장난 결혼식⟩ 은 1842년에 출간된 일리저 아라키(Eliezer Arakie)의 설화집에 수록된 성인 전설과 하워드 슈워츠가 저본으로 밝힌 랍비 루리아 전설집(Shivhei ha-Ari)을 결합해서 빈 고리온(Micha Jeseph Bin Gorion)이라는 유대인 구비문학자가 기록한 전설이다. 필자가 ‘근접한’이란  표현을 쓴 것은 ⟨장난 결혼식⟩이 두 편의 각편을 종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Gorion, Micha Joseph Bin. Mimekor Yisrael: Classical Jewish Folktales. Bloomington: Indiana UP, 1990, 320-321.

[2] Raphael Patai, The Hebrew Goddess, Detroit: Wayne State UP,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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