숀 탠의 ⟪빨간 나무⟫: 황량한 속뜰에 핀 불꽃 나무
호주에서 태어난 중국계 그림책 작가 숀 탠(Shaun Tan, 1974- )의 ⟪빨간 나무⟫(풀빛, 김경연 옮김, 2003년)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작은 불꽃에 관한 그림책이다.¹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한 숀 탠은 16세 때부터 SF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1992년에 국제 미래 출판미술가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고 2001년에는 월드 판타지 상을 예술가 부문에서 수상했다. 숀 탠의 ⟪빨간 나무⟫는 매우 독창적인 그림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그림책 속의 배경은 그의 또 다른 판타지 ⟪잃어버린 것⟫(사계절, 엄혜숙 옮김, 2002년)과 마찬가지로 과학과 기술문명으로 황폐해진 미래의 디스토피아이다. 하지만 ⟪빨간 나무⟫는 극적인 플롯을 지닌 SF 동화는 아니다. 디스토피아의 황량한 풍경을 메타포로 삼아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섬세하게 형상화한 그림책이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디스토피아에서의 삶을 홀로 말없이 버티어가는 소녀의 모습은 오늘날의 일상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숀 탠의 ⟪빨간 나무⟫는 유아용 그림책은 아니다. 이 그림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적어도 삶에서 소외감, 권태, 절망, 두려움, 고독의 감정을 느낄 정도로 인생 경험이 쌓여야 된다. 그렇다고 어른을 위한 책이라는 것은 아니다.⟪스쿨 라이브러리 저널⟫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의 어린이를 위한 책으로,⟪북리스트⟫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 이상의 청소년들이 읽어야 될 책으로 추천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 숀 탠 자신은 그림책의 독자를 연령으로 한계 짓는 것을 거부한다. “그림책,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²라는 글에서 숀 탠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는 그림책이 아동기에나 필요하다는 사회적 통념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그림책이 지닌 단순성을 통해 복잡 미묘한 사고를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예술이란 심오한 사상을 단순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등등. 사실 숀 탠의 그림책을 읽노라면 어린이/어른, 그림/글, 단순성/복잡성, 꿈/현실, 미래/현재 등의 이분법적인 경계가 허물어진 접경지대 (twilight zone)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문자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정서를 시각적 언어로 표현한 숀 탠의 그림을 또다시 문자언어를 통해 재현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백문불여일견 (百聞不如一見)이라고나 할까. 숀 탠의 그림 속엔 문자 언어로 일일이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상징과 은유가 담겨 있고, 다른 예술가들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래서 숀 탠은 자신의 그림책이 지닌 코드를 독자가 이해하기 위해선 “시각적 해독력”(visual literacy)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내 자신 그의 그림을 글로 표현하자니 시각적 해독력의 부족을 절감하게 된다. 하지만 글을 통해 그림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나와 같은 글쟁이의 숙명(?)이 아니던가. 이 글에선 내가 숀 탠의 그림에서 인상적으로 읽은 것 또는 숀 탠의 그림이 내 마음 속에 불러일으킨 개인적인 상념 내지 울림 등에 대해 언급해 볼까 한다.
숀 탠의 ⟪빨간 나무⟫는 표지부터가 신비하다. 멀리서 표지를 보면 보랏빛과 황금빛이 어우러진 하늘에 검은 별 비슷한 것이 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표지를 가까이서 꼼꼼히 살펴보면 배경이 하늘이 아니라 바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황금빛 수평선이 저 멀리 보이는 보랏빛 바다 위에 짙은 녹색 종이배가 떠 있고 그 안에 주황빛 단발머리 소녀가 앉아 있다. 그리고 수면에 비친 배 그림자 위에 조그만 빨간 나뭇잎 한 장이 놓여 있다. 우울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소녀는 자기가 속한 세계로부터의 탈주를 꿈꾼다. 하지만 종이배도 소녀도 그 꿈을 실행으로 옮기기엔 너무도 무력해 보인다. 표지에 등장하는 물의 이미지와 빨간 잎은 책 전체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사실 이 그림책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도 각 그림에 숨어 있는 빨간 잎을 찾는 일이다. 소녀가 처한 상황이 제 아무리 어둡고 황량하게 묘사되어도 그림 어딘가에는 빨간 잎이 반드시 존재한다. 마치 절망의 심연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생명의 불씨처럼.
표지를 넘기면 소녀의 공허한 내면세계를 나타내는 듯 회색의 빈 페이지가 보이고 한 장을 더 넘기면 소녀가 푸른 초원에서 간이용 나무 의자 위에 위태롭게 서서 확성기로 말을 하는 모습이, 아니 말을 뱉어내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푸른 초원에서 소녀는 무엇 때문에 확성기를 입에 대고 말을 뱉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할 용기가 없어 텅 빈 들판을 택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없지만 마음속에 담아 두기엔 삶의 절망과 외로움이 너무도 커서 홀로 그렇게 독백하는 것일까? 들어줄 사람 한 명 없는 들판에서 홀로 외치는 소녀의 모습이 안타깝다.
그림책의 본격적인 시작은 “때로는 하루가 시작되어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라는 글과 더불어 소녀의 방에서 펼쳐진다. 소녀의 방은 가구가 별로 없어서인지 황량한 분위기를 풍긴다. 액자 속의 나뭇잎만 빨간색이고 방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나뭇잎들은 거무스레한 낙엽들이다. 액자 속의 빨간 잎처럼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방의 프레임 속에 갇혀있는 듯 보인다. 그림책을 한 장 더 넘기면 “모든 것이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합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띄고 어느새 방안 가득 낙엽이 숨 막힐 정도로 쌓여있는 것이 보인다. 소녀는 낙엽 더미에 묻힐까 봐 두려워서인지 방문을 열고 탈출을 시도한다.
책장을 한 장 더 넘기면, “어둠이 밀려오고”란 글과 더불어, 음울한 도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검붉은 눈물을 흘리는 거대한 물고기의 동상 아래를 걷고 있다. 거대한 물고기 동상은 왜 검붉은 피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물고기도 소녀처럼 도시를 탈출해서 바다로 나아가길 꿈꾸기 때문일까? 검은 물고기가 마치 소녀의 마음속에 바다를 향한 열망을 심어주기라도 한 듯 소녀는 어느새 바닷가에 와 있다. 소녀는 해변 자갈밭에 놓인 거대한 병 속에 들어가 있다. 마치 거센 파도가 밀려와 자신을 저 넓고 푸른 바다 너머 세상으로 데려다주길 바라는 듯하다. 병 속의 소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핵으로 오염될까 두려운 듯 거대한 방독면을 쓰고 있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필사의 탈주를 꿈꾸는 소녀의 모습이 애처롭다.
그다음에 펼쳐지지는 그림들은 “마음도 머리도 없는 귀머거리 기계”와 다름없는 사회를 보여준다. 소녀가 일하는 직장은 피라미드 속처럼 암울하고, 사람들은 살아있는 죽은 자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유령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속도에 쫓기고 각종 정보에 치인 채 숫자 놀음과 신분상승에만 관심을 쏟으며 살기 때문일 것이다. 숀 탠은 종이비행기, 사다리, 숫자, 신문, 잡지, 시계 등의 다양한 형상을 콜라주 기법으로 교묘하게 배합해서 이성도 판단력도 마비된 기계처럼 무엇인가에 쫓기듯 헉헉거리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바쁜 삶을 표현한다. 분열된 형상들이 검붉은색과 황금색으로 혼돈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그림은 현대인의 삶이 지닌 혼돈과 광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휴일인지 소녀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놓인 거대한 소라 껍데기 위에 앉아 있다. 기다림의 시간을 기호로 표시하면서 소녀는 무엇인가 새롭고 멋진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그런 소녀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거대한 우주를 중심으로 볼 때 인간이란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때로는 기다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한없이 기다리다 지친 소녀는 마침내 용기를 내서 아주 조그만 빨간 돛단배를 타고 파도를 거슬러 가는 모험을 감행한다. 하지만 커다란 배들이 여기저기서 충돌하고 재앙이 한꺼번에 불어 닥치는 바람에 소녀의 모험은 실패로 끝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창문에 서서 바깥세상을 내다본다. 창문 밖의 푸른 하늘에는 커다란 나비 모양의 황금 비행선이 빨간 나비들을 흩뿌리면서 날아가고 있다. 하지만 창문이 바깥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기 때문에 소녀는 안타깝게도 창문을 열고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운 것”들을 만질 수가 없다. 그 이후 펼쳐지는 그림들은 더욱 절망적이고 어둡다. 끔찍스러운 운명의 주사위를 힘겹게 든 채 폐물이 되어버린 기계들과 건물들의 폐허 사이를 홀로 걷는 소녀의 모습, 인생이란 무대에 서있는 연극배우로서 침묵하는 군중들 앞에서 무엇을 해야 될지 몰라 막막해하는 소녀의 모습, 벽에 자신의 형상을 그리며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물음을 던지는 소녀의 모습, 그리고 마치 죽음의 무시무시한 아가리로 몸을 던지기라도 할 듯이 수많은 묘비 앞에 서서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소녀의 절망적인 모습이 차례차례 펼쳐진다.
그리고 결국 그 하루는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끝나려 한다. 그런데 소녀가 자신의 방문을 빠끔히 연 순간 돌연히 방바닥 한가운데 자라고 있는 조그만 빨간 나무가 눈에 띈다. 소녀가 나무를 향해서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순식간에 나무는 밝고 생기 있게 빛나는 커다란 빨간 나무로 변한다. 소녀가 꿈꾸던 대로 그렇게 아름다운 나무가 서 있다. 마치 나무는 소녀가 자신을 발견해 줄 그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다. 소녀가 갈망하던 밝고 아름답고 따스한 생명의 불꽃은 저 멀리 다른 세계에 존재한 것이 아니고 바로 소녀의 곁에 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숀 탠은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항상 새롭게 발견되는 사물들이 있습니다. 보통 그것은 우리가 매일 죽 보아 온 그 낡은 잡동사니들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신비롭습니다.”라고.
이 그림책을 읽는 내내 어느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의 죽음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2002년 겨울, 어른보다 더 자유롭게 놀 시간이 없는 이 기막힌 한국의 교육 현실을 한탄하면서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열한 살의 소년이 자살을 했다. 그 당시 이 사회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처한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린이의 어두운 현실에 비해 그들이 삶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와 소외감을 진지하게 다룬 책은 너무도 적다. 어른보다 더 가혹한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어린이들에겐 삶에 대한 장미 빛 환상을 심어주는 동화보다는 어쩌면 ⟪빨간 나무⟫와 같이 어린이가 처한 실존적 상황을 진지하게 다룬 그림책이 더 필요할는지 모른다. 분석심리학자 폰 프란츠는 “불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³ 내면에 타오르는 감정의 불꽃 없이는 인간은 성숙한 존재가 될 수도 없고 고양된 의식을 지니기도 힘들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불꽃은 생명과 파괴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 불꽃은 때로 우리를 절망, 분노, 번민, 열망, 고통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불꽃으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빛과 온기와 생명을 느낀다. ⟪빨간 나무⟫는 시적인 언어와 독창적인 그림으로 일상적인 삶이 가져다준 절망과 고독을 견디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생명의 불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한 외로운 영혼의 통과의례를 훌륭하게 형상화한 아름다운 그림책이다.
참고자료
¹ Shaun Tan. The Red Tree. Vancouver: Simply Read Books, 2003. http://www.shauntan.net/books.html
2) “Shaun Tan: Out of Context." http://www.locusmag.com/2001/Issue12/Tan.html
² "Picture Books: Who are They For?" http://www.shauntan.net/essay1.html
³ Marie-Louise von Franz, The Interpretation of Fairy Tales. Boston: shambhala,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