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늑대⟫: 늑대의 삶을 부러워한 공주 이야기

by 김환희
“옛날에 로젤루핀이라는 공주가 있었어요. 로젤루핀은 높은 탑 꼭대기 방에 갇혀 살았지요. 임금님은 어린 딸 로젤루핀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로젤루핀, 바깥 세상은 몹시 거칠고 험하단다. 우리 귀한 공주를 그런 곳에 내보낼 순 없잖니.’”


호주의 그림책 작가 마가렛 섀넌(Margaret Shannon)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빨간 늑대>(베틀북, 2003)는 이렇게 시작된다. 사랑스러운 어린 딸을 험한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 탑에 가둔 임금의 마음은 보통 부모들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다. 유괴, 성추행, 교통사고, 질병 등등 이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거칠고 험한 세상으로부터 아이들을 온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부모들은 커다란 울타리 내지 완벽한 성을 쌓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많다. 부모들은 가정의 울타리에서 아이들이 벗어나지 않도록 아이들을 길들이고 싶어 하고, 아이들은 부모가 만든 새장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바깥세상에서 뛰어놀고 싶어 한다. 동화 속엔 아이들을 길들이고자 하는 어른의 욕망과 어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아이들의 욕망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동화작가는 이 대립되는 두 욕망 사이에서 줄광대처럼 조심스럽게 줄타기를 하다가 결국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마가렛 섀넌의 <빨간 늑대>와 그림형제와 페로가 쓴 <빨간 모자>는 이 두 욕망의 양극에 각각 서 있는 동화라고 볼 수 있다. 그림형제의 <빨간 모자>는 어린이를 자신의 틀에 맞게 길들이려는 어른의 욕망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는 동화라면, 마가렛 섀넌의 <빨간 늑대>는 어른이 만든 감옥으로부터 탈출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고자 하는 아이들의 꿈과 환상이 담겨 있는 동화이다. <빨간 늑대>의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출처: ⟪빨간 늑대⟫(마가렛 새넌 글˙그림/정해왕 옮김, 베틀북, 2003) 속의 한 장면


험한 세상으로부터 딸을 보호하기 위해 임금은 공주 로젤루핀을 성탑 꼭대기 방에 감금한다. 방에 갇힌 로제루핀은 창가에서 밤이 깊어질 때까지 바깥 세계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로젤루핀은 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된다. 왕궁 문에 누군가가 생일 선물로 온갖 색깔의 털실 뭉치가 들어있는 황금상자를 갖다 놓는다. 그 황금상자 속에는 “네가 원하는 것을 짜렴”이란 쪽지가 들어 있다.


로젤루핀은 황금상자에서 빨간색 실을 꺼내서 밤을 새워 늑대 모양의 옷을 짠다. 로젤루핀이 빨간 늑대 옷을 완성한 후 이를 입자 갑자기 몸이 점점 커진다. 몸이 거대해진 로젤루핀은 돌탑 지붕을 뚫고 숲으로 뛰쳐나간다. 왕은 로젤루핀이 갑자기 출현한 빨간 늑대에게 잡혀 먹혔다고 슬퍼하면서 그 거대한 빨간 늑대에게 먹을 것을 잔뜩 갖다 주라고 명령한다. 로젤루핀은 마을 사람들이 바치는 온갖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늑대 춤을 추고 늑대 울음소리를 내면서, 별빛 아래서 곤하게 잠이 들어 다른 빨간 늑대와 즐겁게 노는 꿈을 꾼다. 하지만 로젤루핀이 깨어나서 늑대 친구를 찾아 숲을 헤맬 때 늑대 털옷의 올이 나무에 걸려 풀리게 된다. 점점 작아져 버린 로젤루핀은 피곤에 지쳐서 커다란 나무 밑동에 난 구멍 속에서 잠이 든다. 늑대가 사라져 버리자 사람들은 빨간 털실을 추적해 곤히 잠자는 로젤루핀을 발견하고는 성으로 데려 온다.


임금은 돌아온 로젤루핀을 늑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더 높고 더 단단한 새 성탑을 짓는다. 다시 성에 갇힌 로젤루핀은 갈색 털실 뭉치를 꺼내서 밤새도록 아버지의 옷을 짠다. 딸의 간곡한 부탁으로 갈색 털옷을 입은 임금은 생쥐로 변한다. 생쥐 임금은 창가에 매달려서 바깥세상으로 나간 공주가 마을 아이들과 즐겁게 노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러한 줄거리를 지닌 <빨간 늑대>에서 서구 고전동화가 담고 있는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는 통쾌하게 전복되고 어린이가 꿈꾸는 자유롭고 즐거운 삶에 대한 판타지가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빨간 늑대>는 어린이의 내면에서 분출하는 역동적인 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삶의 즐거움을 자유롭게 향유하려는 욕구, 다른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뛰어 놀려는 바람, 권위주의적인 어른들의 부당한 억압에 대한 저항감 등을 잘 형상화해서 보여준다. 로젤루핀은 바깥세상이 위험하다고 자신을 가두어 놓는 아버지에게 반발심을 느끼면서 “나처럼 어린 공주한테는 바깥세상이 너무 위험하다고? 그렇다면 차라리 커다란 빨간 늑대가 되는 게 낫겠어”라고 말한다. 신비의 털실로 짠 늑대 옷을 입고 로젤루핀은 ‘커다란 빨간 늑대’가 되어 성을 뛰쳐나간 후 마음껏 소리 지르고, 마음껏 먹고, 마음껏 뛰어 논다.


마가렛 섀넌이 로젤루핀을 ‘커다란 빨간 늑대’로 변신하게 한 것은 <빨간 모자>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빨간 모자>는 17세기 말부터 오늘날까지 서구 유럽에서 어린이들에게 바깥세상과 낯선 존재의 위험성을 일깨워주는 유익한 동화로 사랑받아 왔다. <빨간 모자>에서 험한 바깥세상은 숲으로, 그리고 그 바깥세상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존재는 늑대로 상징화된다. 숲에서 딴전 부리지 말고 길만 따라서 얌전히 걸어야 된다는 어머니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늑대의 꾐에 빠져서 숲 속에서 꽃을 꺾으면서 놀다가 결국 할머니를 죽게 만들고 자기 자신도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빨간 모자의 이야기를 읽으면 아이들은 낯선 존재와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갖게 된다. 바깥에서 놀기 좋아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다가는 자칫 잘못하다 죽을 수도 있다는 교훈을 <빨간 모자>는 아이들에게 철저하게 가르쳐 준다. 소녀는 페로의 <빨간 모자>에서는 늑대의 먹이가 된 채 삶을 마감하고 그림형제의 <빨간 모자>에서는 늑대의 뱃속에 들어 간 후 사냥꾼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다. 바깥세상과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어린이에게 일깨워 주고 부모의 말에 순종하도록 길들이는 데 있어서 <빨간 모자> 이상 가는 동화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빨간 모자는 결심한다. “앞으로 어머니가 길에서 벗어나 숲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면 꼭 어머니 말씀대로 해야지 “라고.


섀넌의 <빨간 늑대>는 <빨간 모자>가 지난 몇 세기 동안 어린이에게 가르쳐 온 교훈에 정면 도전한다. 섀넌의 동화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바깥세상에 만약에 무서운 늑대가 존재한다면 그 늑대가 두려워 집안에 움츠려 있기보다는 오히려 그 늑대처럼 강한 힘을 지닌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부모의 지나친 관심과 걱정이 아이들을 보호하긴커녕 가정이란 감옥에 갇힌 채 창백하게 병들어가게 하는 것은 아닐까? 모리스 센닥(Maurice Sendak)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Where the Wild things are)에서 주인공 맥스는 늑대 옷을 입고 늑대처럼 뛰어놀다 어머니에게 야단맞고 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자 야수들이 사는 나라로 환상여행을 떠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로젤루핀도 아버지에 의해 독방에 감금당한 수인(囚人)이 되자 자신이 털실로 밤새워 짠 늑대 옷을 입고 늑대로 변해 험한 바깥세상으로 여행을 떠난다. 로젤루핀이 경험한 바깥세상은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그토록 거칠고 험한 세상은 아니다. 섀넌은 초록빛 숲과 마을의 광장을 성보다 훨씬 더 아늑하고 활력 넘치는 행복의 공간으로, 어린 딸을 보호하기 위해 아버지가 만든 성탑 속의 방을 로젤루핀의 내면에 존재하는 생명의 불꽃을 사그라지게 하는 암울하고 음산한 감옥으로 그린다.


마가렛 섀넌이 <빨간 늑대>를 통해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로젤루핀이 처음으로 클로즈업되는 그림과 맨 마지막 페이지의 그림을 비교해 볼 때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림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면 창백한 피부의 로젤루핀이 성탑의 회색빛 창문틀에 손을 얹은 채 바깥세상을 넋을 잃고 쳐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로젤 루핀은 마을의 아이들이 광장의 분수대 주위에 모여 원을 그리면서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을 부러운 듯이 바라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림책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조그만 생쥐로 변한 임금이 회색빛 창문틀에 매달려서 로젤루핀이 분수대에서 모여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을 내려다본다. 로젤루핀은 아버지가 그 어떠한 것으로도 부수기 힘든 새 돌탑을 만들어 자신을 그 꼭대기에 다시 가두었을 때 아버지를 위해 갈색 털실로 생쥐 옷을 짠다. 임금인 아버지는 딸의 간곡한 부탁--“사랑하는 아빠, 제발 부드럽고 상냥해지세요.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이걸 한번 걸쳐 보세요”--을 거절하지 못해 생쥐 옷을 입고 결국 돌탑에 갇힌 생쥐 신세가 된다. 돌탑을 탈출한 로젤루핀은 화려한 공주옷과 신발을 나무에 걸어 둔 채 속옷 바람으로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고, 아이들은 로젤루핀을 따스하게 맞이하기 위해 둥근 원의 한 귀퉁이를 미완성인 채 열어 둔다.


이러한 설정은 기존의 서구 유럽의 고전동화가 보이는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를 급진적이지만 해학과 재치가 넘치는 방식으로 전복시킨다. <빨간 늑대>는 <빨간 모자>가 아이들의 마음에 심어 준 바깥세상에 대한 공포심과 내면에 존재하는 유희정신과 호기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준다. 섀넌은 아이들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들의 외침에 귀 기울임으로써 동화를 ‘길들임’의 도구가 아니라 해방의 기제가 되게 한다. 하지만 <빨간 늑대>는 어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동화는 아니다. <빨간 늑대>를 읽으면 우리 어른들은 자의 반 타의 반 회피해 온 여러 교육적인 딜레마에 빠져들게 된다. 과연 어린이가 어른의 보호망을 탈출한 빨간 늑대가 되어 바깥세상을 제멋대로 배회하고, 아버지를 무기력하게 생쥐로 변하게 하는 이런 동화를 어린이에게 읽혀도 되는 것일까?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어린이의 욕구, 그들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 부모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어느 선까지 인정해야 되는 것일까? 이 세상은 아이들이 겁 없이 나다니면서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먹고 놀고 싶은 대로 마음껏 놀아도 될 정도로 그렇게 만만한 곳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법의 성을 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아이들의 창의력, 독립심, 호기심을 제어해서 나약한 인간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이 험한 세상을 지혜롭게 헤쳐 나갈 소녀는 조심성 많은 ‘빨간 모자’일까? 모험심 강한 로젤루핀일까? 등등. <빨간 늑대>는 우리 어른들로 하여금 여러 복잡한 상념에 잠기게 한다.


만약 내 아이가 다시 유치원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 아이를 위해 <빨간 모자>와 <빨간 늑대> 가운데 과연 어떤 동화를 읽어 줄까? 아마도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두 동화를 모두 아이에게 읽어 준 후 ‘빨간 모자’와 ‘빨간 늑대’에 대해 아이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묻고 수평적인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두 책 중의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나는 그다지 망설이지 않고 <빨간 늑대>를 고를 것 같다. 이런저런 삶의 경험이 쌓여 가면서 내 자신이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우리 인간이란 예측하기 힘든 세상의 변화 앞에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란 사실이다. 아이들 앞에서 우리 어른들은 전지전능한 신처럼 자신만만하게 행동할 때가 많지만 실상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난공불락의 성을 지을 능력도 무풍지대에 살게 할 능력도 없다. 굳이 현실 속에서 그 실례를 들지 않아도 그림형제의 전래동화 자체가 이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해 준다. <빨간 모자>에서 소녀는 어머니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낯선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숲의 매력을 이기지 못해 늑대의 먹이가 되고, <라푼첼>에서 여자 마법사는 바깥세상으로부터 수양딸을 완벽하게 보호하기 위해 문도 계단도 없는 탑을 쌓았지만 좁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깥세상의 왕자와 라푼첼의 사랑을 막지 못했다. 또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서 임금은 불길한 예언으로부터 딸을 보호하기 위해 전국의 모든 물렛가락을 없애 버렸지만 호기심 많은 공주는 성 안을 배회하다 물렛가락에 손가락이 찔려 백 년 간 깊은 잠을 자게 된다.


부모로서의 인간적인 한계와 불확실성의 시대를 혼자 헤쳐 나가게 될 아이들의 미래를 고려할 때, 바깥세상과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과도하게 조장해서 아이들에게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갖게 하는 동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빨간 모자’의 삶보다는 ‘빨간 늑대’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내 아들을 볼 때 걱정과 두려움이 앞선다. 아들의 자유분방한 끼와 걷잡기 힘든 에너지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마음이 불안해질 때면 내 자신이 반복해서 읽곤 하는 시가 한 편 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수록된 “아이들에 대하여”란 시이다. 그 시 가운데 내 마음에 가장 와 닿는 구절을 소개하는 것으로써 이 서평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는 말라.
큰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인용한 책


그림형제. 김열규 역. 「작은 빨강 모자」. ⟪그림형제동화전집⟫(합본). 현대지성사. 1999.

칼릴 지브란. 류시화 역. ⟪예언자⟫. 열림원. 2002.

마가렛 섀넌 글·그림. 정해왕 옮김. ⟪빨간 늑대⟫. 베틀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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