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독일여자
포르투 캄파냐 역에서 리스본행 주간 열차를 탔다. 실은 야간열차를 타고 싶었다. 친구가 추천해 준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때문이다. 영화는 다리 난간에서 뛰어내리려는 젊은 여자를 늙은 남교사가 구하면서 시작된다. 감상을 사소한 이유로 미루다 리스본을 떠나고도 한참 뒤에 보았다. 하지만 제목은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밤은 영혼이 외적인 충격 없이 놀라움과 공포, 판결, 슬픔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시간이다. 열차는 영혼이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떠나는 공간이다. 그러니 밤의 열차를 타면 나의 이야기를 온전히 마주한 채로 새로운 곳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혹은 새로운 누군가와. 하지만 리스본행이든 리스본발이든 야간열차는 코로나 때문에 운행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포르투갈 정부가 운행을 중단하고 싶었는데, 코로나를 핑계 삼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야간열차를 타진 못했지만 대신 숙박비는 저렴했다. 여행객이 절반의 절반이 난 시절이었다. 리스본에서 머물렀던 블루삭 호스텔은 3박에 30유로였다. 하루에 10유로를 지불해서 1박을 할 수 있는 곳은 세계 어디에서도 드물었다.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특히 물가가 저렴했다. 파리나, 바르셀로나에서는 이보다 세배나 네 배를 주어야 비슷한 숙소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인테리어에 시원한 파랑을 많이 사용한 호스텔은 시설도 나쁘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 8인실 침실이 다닥다닥 붙은 방은 다소 답답한 구석이 있었지만, 작은 커튼은 안락하게 내 공간을 사적으로 분리해 주었다. 침구는 깔끔했고 침대 머리 위에 달린 선반은 종일 주머니에 채우고 다닌 동전이나, 에어팟을 두기 좋았다. 무엇보다도 위치가 좋았다. 숙소 앞에 지하철이 있어 주요 명소를 편히 다닐 수 있었다.
나는 독일 여자와 같이 입실했다. 코와 귀에 피어싱을 여러 개 한 여자는 스케이트보드를 챙겨 왔다. 보기에 다소 히프하고 거센 면이 있어서, 반항하는 청춘 같았다. 사진을 찍고 싶었다. 모습이 선명한 사람들은 사진스럽게 담긴다. 독일 여자는 성격도 못지않게 터프했다. 스케이트보드도 쿵쿵 던져 놓고, 문도 쿵쿵 잘 닫았다. 다른 사람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말을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말투도 시원시원했다. 무엇보다도 옷차림이 시원시원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바지를 벗은 그녀는 좁은 호스텔 방 침대 사이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짐을 정리했다. 나도 좁은 공간에서 캐리어를 정리해야 해서 마주 봐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당황은 했지만 건조해서 야하진 않았다. 그래도 눈 두기가 애매했는데, 되려 그녀가 개의치 않아서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동양 남자라고 굳이 나를 깎아서 생각한 것도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무튼 나도 뭔가 낯선 상황을 타개해야 할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헤이 유 룩소굿, 아이드 라익 투 테이크 픽처 오브 유’라고 했다. 독일 여자는 ‘굳이, 나를’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쿨하게 좋다며 웃었다. 나는 문득 낯설었다. 팬티만 입고 있는 처음 만난 외국 여자 친구와 촬영 약속을 잡고 있네. 이런 생각을 하니, 나도 여행가쯤 되는 것 같았다. 독일 여자와는 이틀 뒤에 사진을 촬영하기로 했다. 그 뒤로 독일 여자가 자기 침대 위에 올라가서 무슨 말을 건넸는데, 내가 못 알아들으니까 짜증을 부리며 말을 말았다. 어린 것이 버릇이 없어 보였다.
각자 이틀을 보낸 뒤, 우리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피게이라 광장으로 갔다. 독일 여자가 리스본에서 스케이트를 자주 타는 장소라고 했다. 걸으며 그동안 리스본 일정을 물었다. 호카곶, 신트라 비슷비슷했다. 다소 버르장머리가 없었지만, 여행지가 같다고 하니 동질감이 들었다. 동질감이 생기니 친밀감도 들어서 독일 여자 스케이트보드를 타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한국식으로 미루어두었던 호구조사를 했다.
너 몇 살이니? / 스물. / 와 너 어리다. / 응 / 너는 몇 살이니?, 와 너 어려 보인다. / 고마워.
상호 간의 연차를 알고도 독일 여자는 연장자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넌 뭐 좋아하니? 스케이트 말고? / 음악 / 오 음악, 음악 좋지. 나도 음악 좋아해. /
음악을 좋아한다길래, 케이팝 유세 좀 떨어볼까 했더니, 케이팝은 안 좋아한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요새 케이팝 좋아하는 여자애들 꽤 있다며 속없는 녀석들이라는 표정도 지었다. 블랙핑크, 레드벨벳 몇 가지 꺼내려던 나는 표정을 감추었다. 그녀는 모던록을 좋아한다고 했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니 나도 들어볼 수 있어? 물었더니 노래 한 곡을 틀어주었다. 역시 반항적인 노래였다. 너랑 어울린다고 말해주었다.
리스본 다음에 어디 가? / 어, 포르투 / 포르투 좋아~ 근데 여행 경로는 어떻게 짰어?/ 원래는 동유럽으로 가려고 했어. 근데 푸틴/ 아 러시아..
알고 보니 원래는 동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마침 러시아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했다. 나한테 짜증 섞어 말할 때랑 같은 표정이었다. 독일 여자는 학교를 마치고 잠시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여행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부럽다고 했다. 여행을 하다 보니 유럽 친구들은 정규 교육기간을 마친 뒤 바로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업하지 않고 잠시 혼자 만의 시간을 갖는 경우가 있었다. 이 친구는 6개월을 여행한다고 했다. 나는 독일 여자에게 한국의 교육을 알려주었다. 한국에서 학생들은 졸업을 하면 그런 일은 꿈꾸기 어려워. 그뿐만 아니라, 음악을 하고 싶어도 국어와 수학을 공부해야 하고, 체육을 좋아해도 학교에서 시인이 되고 싶은 친구와 생물 수업을 들어야 해. 정말 그랬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음대를 준비하는 친구가 나를 포함 4명이 있었다. 우리는 아침에 유일한 피아노실에 가서 40분 동안 번갈아 가며 피아노를 치며 연습을 했었다. 그리고 수업 시간이 되면 우리의 진로와 상관없는 국어 공부나, 역사 공부를 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기란 세상에 모든 감정을 누르는 것과 같다. 국어나 역사는 그 감성을 깊게 해준다. ) 나는 공부가 재밌어서 그리 싫진 않았지만 친구들은 질색을 했다. 연습을 꾸준히 할 수 없어서 아쉽기는 다 마찬가지였다. 하나 있던 연습실은 봄이 지난 뒤 용도가 변경되었다. 전교 1등부터 30등까지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의 자습실이 되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연습할 공간이 없었다. 나는 원래 못하는 사람이라 상관이 없었지만 다른 친구들, 특히 피아노를 전공하려던 친구는 결국 음대 진학을 포기했다. 지금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졸업 뒤에 혼자만의 여행을 떠날 사치는 바라지도 못했다. 그저 공부를 하는 다른 친구들과 다른 꿈을 꾸는 모습을 존중받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팝이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대단하다. 독일 여자는 케이팝의 가치를 알까.
광장에 갔더니 독일 여자처럼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자유롭고 반항적으로 보이는 외국인 사이에서 기죽기 싫었다. 나 역시도 카메라를 잘 타는 프로 사진가 인양 셔터를 눌렀다. 밤이 깊어지면서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졌다. 비 오는데?라고 이야기했더니 독일 여자는 조금 더 타고 들어온다고 했다.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독일 여자도 곧 돌아왔다. 사진을 보내줄 테니 이메일을 알려달라고 했다. 독일 여자 메일 주소는 그녀처럼 정형하지 않고 복잡했다.
다음날 출발할 짐을 꾸린 뒤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스물에 혼자 낯선 세상으로 여행을 다녀온 나를 그려보았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었을까. 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때도 나는 음악을 버텼을까. 동생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방법도 알았을까. 나는 답이 있고 답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모르면서 아는척하는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나를 잘 몰랐다. 슬프면서 화를 냈고, 외로우면서 혼자 소주도 잘 마셨다. 사랑받고 싶은데 사랑받고 싶은지도 몰랐다.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는 법도 몰랐다. 있는 그대로 흔들리면서 피어서 꽃이라는데, 나는 없는 것으로도 잘 흔들렸다. 나부터 알아갔다면, 나는 더 잘했을까.
이런 생각도 했다. 사랑하고 이별했던 사람들이 내 삶에 없었더라면, 나는 어땠을까. 지구를 몇 바퀴 돌려서, 다시 만나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다. 똑같이 그를 그리워할까. 전 사람의 취향이 내 습관이 된 줄도 모른 채, 언제 내리고 녹았는지 잊은 첫눈처럼, 똑같이 잊고 살까. 첫눈은 언제나 특별했지만, 늘 잊었다. 스케이트보드를 한 번 더 타고 싶었다. 발을 구르지 않아도 내리막길에서 몇 시간이나 쏜살같이 달리고 나면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독일 여자는 첫날 이후로 바지를 잘 챙겨 입었다. 지금 생각하니 바지 입기가 대순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