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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ara Mar 19. 2020

바이러스가 만든 새로운 일상, 집순이 생활하기

슴슴한 켄터키 일상 한 스푼 - 4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6개 지역은 이미 자택대피명령(shelter in place order)이 발효된 상태이고 뉴욕시에서는 자택대피명령 카드를 곧 꺼내  것으로 보인다. 말 그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명령이다. 이러한 극약 행정처분 없이 코로나바이러스 곡선의 정점을 지나고 있는 한국이 정말 대단할 따름이다. 올해처럼 미국 언론을 통해 'South Korea'가 긍정적인 측면에서 많이 거론된 적이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연초에는 '기생충'으로 미국 언론의 시선을 사로잡더니 요새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모범적인 대처로 국가 이미지마저 향상된 느낌이 든다.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흐름을 바꾸거나 새로운 도약으로 이끄는 결정적 터닝포인트가 있듯 국가의 이미지에도 그런 것이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한국의 터닝포인트가 아닐까.


나의 미국 생활의 터닝포인트는 물론 코로나바이러스이다. 일 년 동안 미국에서 지내면서 꼭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버킷리스트의 80%가 밖으로 나가서 하는 것들이었다. 바이러스 여파가 적어도 8월, 길면 1년 내내 갈 수도 있다고 하니 버킷리스트는 물 건너갔다. 개인적으로야 아쉽기 그지없지만 생계가 위태로운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국에 그딴 게 무슨 대수냐 싶다. 부디 모두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낼 수 있기를.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고 보니 새삼 느끼는 것이 있다. 하루가 무척, 아주, 매우 길~다는 것이다. 넷플릭스만 보면서 하루를 보내지 않으려면 나름 체계적으로 시간을 써야 한다. 우선 아침에는 최대한 늦게 일어난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들이 일찍 일어나려고 하기 때문에 조금 더 자라고 간곡히 설득한다. 그래도 9시 정도면 눈이 떠지는데 아들은 디즈니채널을 보게 하고 나는 핸드폰을 한다. 바이러스 관련 뉴스도 검색하고 한국 기사도 찾아보고 유튜브도 조금 보다 보면 10시가 된다. 사실 유튜브만 봐도 정오까지 버틸 수 있지만 자라나는 새싹이 집에 있으니 그 정도만 하기로 한다. 이제 슬슬 아점을 준비한다. 삼시 세 끼를 다 찾아 먹다 보면 금세 '확찐자'가 될 뿐만 아니라 식량도 금방 동이 나 또 마트를 가야 하므로 하루에 두 끼만 먹는 것으로 한다. 아점은 손이 많이 가는 것으로 준비한다. 김밥이다. 냉장고에 쟁여둔 재료들을 활용하므로 그럴싸한 음식은 못 만들고 그냥 이래저래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음식으로 한다. 맛은 없다. 너무 맛있게 하면 많이 먹게 돼서 또 '확찐자'가 되므로 일부러 적당히 맛없게 한다.

아점을 먹고 11시 정도면 산책을 나간다. 요새 같은 때 렉싱턴같이 작은 도시, 한적한 산책로가 있는 동네에서 살게 된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기며 한 시간 정도 걷는다. 꽃 사진도 찍고 아들 사진도 찍으면서 산책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회적 거리를 유지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책을 읽는다. 사기만 하고 구석에 미뤄 둔 두꺼운 책들(안나 카레니나, 코스모스 등)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됐다. 오후에는 아들과 레고 스타워즈 놀이를 하면서 요다를 연기하고 아들이 만든 터무니없는 보드게임에 연속으로 패배하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3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다. 요가 수업에 가지 못하므로 집에서 요가를 하기로 한다. 나름 향초도 켜보고 꽃병도 갖다 놓고 분위기를 내본다.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기억나는 동작을 이것저것 시도해본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주로 했던 동작을 반복하고 가장 자신 있는 동작인 베이비 포즈를 많이 구사하다 보면 4시가 넘는데, 그때부터 저녁 준비에 들어간다. 평소라면 한 끼는 내가 했으니 한 끼는 네가 하라며 남편에게 식사 준비를 양보했겠지만 하루가 길기에 내가 기꺼이 만들기로 한다. 점심과 마찬가지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만든다. 수제비다. 오랜 시간 반죽에 공을 들인다. 그래도 김밥보다는 맛있다. 역시 밀가루는 사랑이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면 TV를 본다. 아이가 TV를 너무 많이 보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리스닝 공부는 될 거라며 부모로서의 죄책감을 덜어본다. 드디어 밤이다. 하루 종일 별로 하는 일이 없기에 전혀 피곤하지 않지만 그래도 잠자리에 든다. 재미가 없어 진도가 좀처럼 나가지 않는 책을 읽어본다. 북클럽이 잠정 중단된 상태라 재미없어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에 두어 장 읽다가 집어치우고 핸드폰을 한다. 어두운 데서 핸드폰을 다 보면 눈이 피로해져 얼추 졸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잠을 청한다. 강제 집순이의 기나긴 하루 끝.

내일은 어렸을 적 엄마가 해주시던 것처럼 들기름 살짝 바르고 소금 솔솔 뿌려서 김이나 구워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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