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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ara Apr 04. 2020

여행의 기억, 터키

여행은 가는 것도 좋지만 가기 전에 어디를 갈지, 

뭘 먹을지 고민하는 것도 설레고 다녀와서 추억을 떠올리는 시간도 즐겁다. 여행 중에 행복한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 나중에 떠올릴 때는 힘들었던 순간도, 짜증 났던 순간도 모두 필터앱을 켠 것처럼 예쁜 기억으로 재탄생된다.

여행을 갈 수도 없고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도 없는 요즘 같은 때,

지나간 여행의 기억을 하나씩 꺼내보기로 했다.

작년 가을에 갔던 터키의 기억이다.


보드랍고 달콤한 기억, 카이막

육즙 자르르한 케밥부터 국민음료 아이란, 장미향 솔솔 나는 로쿰 등 군침 도는 음식 천지지만 꼭 다시 먹고 싶은 음식 한 가지만 꼽으라면 백종원이 천상의 맛이라고 표현한 바로 그 음식, 카이막이 떠오른다.

물소 젖을 끓인 후 식히면 표면에 막이 형성되는데, 이것을 걷어내면 부드러우면서도 탱탱한 크림이 된다. 여기에 황금색 꿀을 듬뿍 올려 터키식 바게트와 함께 먹으면 고소하면서도 달콤하고

향기롭고도 진한 맛이 입안 가득 행복을 만들어 낸다.

잠이 안 오는 밤, 우유를 데워본 사람이라면 표면에 생기는 막을 본 적이 있을 텐데, 일반 우유는 종이처럼 얇은 막이 생길 뿐이지만 물소 젖은 지방 함유가 높아서 훨씬 풍성하고 두터운 막이 생기기 때문에 카이막의 재료로  알맞다 한다.

일정이 빠듯하여 따로 카이막 전문집에 가 볼 생각은 못하고 있었는데, 양고기 케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별 기대 없이 시켜  카이막이 너무 맛있어서 바로 다음날 백종원이 다녀갔다는 카이막집에 찾아가게 됐다. 저녁 늦은 시간이라 가게를 정리하고 있던 주인은 한국인 손님을 보자 무심한 얼굴로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한다. 허름한 길거리 테이블에 앉아 카이막 한 접시와 커피 한잔을 행복하게 먹어 치우고, 포근한 이불처럼 돌돌 말려 있는 카이막 두 덩이를 사 와 다음날 일행들과 함께 아침식사로 나눠  먹었다.

나로서는 3일 연속 카이막을 먹은 셈인데 질리기는커녕 그다음 날, 아니 매일매일 못 먹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현지인들은 집에서 자주 만들어 먹는 특별할 거 없는 음식이라지만 카이막이야말로 단연 우유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요리가 아닐까.


진하고 향기로운 기억, 터키쉬 커피

터키 사람들은 커피에 대해 남다른 사랑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커피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이지만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커피하우스 문화가 최초로 시작된 곳이 바로 15세기 이스탄불이기 때문이다.

각성효과 때문에 성직자들이 기도를 하면서 마시는 음료로 시작한 커피는 한때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오스만 투르크시대에 이르러 터키인들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커피는 지금은 전 세계인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음료, 아니 문화가 됐다. 터키식 커피는 커피가루를 물에 넣고 진하게 끓여낸 후 각설탕이나 로쿰과 같이 내놓는다. 가루를 넣고 끓이기 때문에 다 마시고 나면 잔 바닥에 커피 가루가 남는데 옛날 사람들은 이걸 보고 점을 치기도 했다.

식사를 일찍 끝내고 식당 앞에 나와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자니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한 아저씨가 내게도 커피를 권한다. 아저씨 방식대로 각설탕을 두 개나 넣은 따뜻한 커피를 홀짝거리니 입안은 달콤 쌉쌀, 속은 뜨끈뜨끈 기분이 좋아진다.

아저씨는 하루에 5번 이상은 커피를 마신다기에 카페인 때문에 잠을 설치지는 않냐고 물어봤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 잠을 못 자는 것은 커피 때문이 아니야. 마음 때문이지."


찬란한 도시의 기억, 이스탄불

터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적지부터 인류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물까지 시대별로 남겨진 찬란한 문화유산으로 인해 역사학자들은 터키를 "살아있는 인류 문명의 박물관"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가야 할 곳도 많고 봐야 할 것도 넘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곳, 하나만 꼽자면 역시 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은 아시아의 끝과 유럽의 시작을 함께 품고 있는 세계 유일의 도시이자 15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두 거대 문명의 수도였던 특별한 도시이기도 하다.

과거 그리스의 식민지였다가 동로마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1000년세월 동안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이곳은, 

15세기에 이르러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 이후, 다시 500년간 이슬람 문명의 중심이 된다.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화려한 유적지와 유물들이 이스탄불 어디를 가든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데, 그리스, 로마 문명부터 기독교, 이슬람에 이르기까지 각 문명이 남긴 다양한 문화유산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몇 곳만 꼽아 보면, 예라바탄사라이, 성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 돌마바흐체 궁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그리고 그랜드 바자르가 떠오른다.


예라바탄사라이

예라바탄사라이는 동로마시대에 황실에 물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만든 지하저수지로 예술작품 같은 기둥 336개가 지하공간을 떠받치고 있는데, 공간 자체가 마치 물에 잠긴 그리스 신전처럼 신비롭고 아름답다. 부서진 건축물 등에서 가져온 자재로 기둥을 만들어서 모양도 각기 다르고 기둥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도 재미있다.


성소피아 성당 블루모스크

서로 마주 보고 서있는 성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는 각각 기독교와 이슬람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두 대표 문명의 흥망성쇠, 충돌과 조화를 생생히 보여준다. 특히 성소피아 성당은 예술적 측면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모두 세계 최고의 건축물로 알려져 있는데, 훗날 오스만 제국의 황제도 이곳을 파괴하는 대신 이슬람 사원으로 변신시켰을 정도이니 종교마저 뛰어넘는 위대한 건축물인 셈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돌마바흐체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국력이 쇠락할 19세기 무렵, 제국의 부흥을 노리며 베르사유 궁전을 본 따 만든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 중 하나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이 궁전의 건립을 위해 금 14톤과 은 40톤을 사용했다는데 막대한 건축비로 인해 결국 제국의 멸망과 근대 터키의 시작을 재촉했으니,

이 또한 대단한 건축물이다.


이스탄불 고고 박물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은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인 카데쉬 조약, 알랙산더 왕의 부조가 새겨진 석관을 비롯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피고 진 찬란한 문명들이 남긴 귀중한 보물들과 역사적인 유물들을 만날 수 있는 세계적인 박물관이다.


그랜드 바자르와 나자르 본주

15세기에 만들어진 그랜드 바자르는 실크로드의 종착지로서 기나긴 사막을 통과해 온 상인들이 이국의 귀한 물건들을 내놓았던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실내 시장이다. 보석, 카펫, 찻잔 등 비싼 물건도 많지만 기념품으로 딱 맞는 저렴하고 특색 있는 물건도 많은데, 그중 악을 막아준다는  터키 부적 '나자르 본주'는 크기도 작고 디자인도 예뻐서 대량으로 사 가지고 가면 아주 유용하다. 이곳에서 2불 정도 주고 산 나자르 본주 목걸이는 아직도 가장 즐겨하는 목걸이 중 하나다.


다시 가고 싶은 그곳

역사적 의미를 차치하고라도 이스탄불은 특별함으로 가득 찬 도시이다. 이국적이지만 친근하고, 적당히 소란스러우면서도 기품 있고, 보수적이지만 여행객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는 곳,

아침으로는 아시아에서 카이막을 먹고 점심으로는 보스포러스 해협 너머 유럽에서 고등어 케밥을 먹을 수 있는 곳, 이스탄불에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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