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라디오 DJ를 맡게 되었을 때 이 일이 즐거웠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째는, 영국에서 일주일에 한 시간 동안 온전히 한국 노래만을 방송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또한BTS, 블랙핑크 노래가 아니라 나도 알고, 한국 2030 세대면 누구나 알 법하지만 영국 사람들은 모를 노래들을 소개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둘 째는, 스튜디오 안에서 헤드폰을 쓰고 녹음하는 내 모습이 좋았다. 영국인으로 가득한 이 커뮤니티에 당당히 한국인으로 입성한 기분도 들었다.
3월 잠시 한국에 방문했을 때에도 라디오 DJ로서 활동은 계속되었다. 스튜디오에 직접 방문할 수 없어도 워낙 휴대폰 녹음 기능이 뛰어나서 스튜디오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퀄리티의 방송을 만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내가 선곡한 노래로 방송을 만드는 것 자체에 처음만큼 큰 재미를 느끼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매주 15곡씩 선곡하고 음원 다운받고 곡마다 곡 소개를 써서 녹음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한 달이면 60곡인 셈이다.
라디오라는 매체의 매력을 느끼게 된 이후, 영국 남부 지역 각종 라디오 방송국에 메일을 보냈다. 내가 살고 있는 사우스햄튼부터 본머스, 바스, 런던과 같은 근교 도시뿐만 아니라 브라이튼과 같이 다소 먼 지역까지도 두드렸다. 각 지역마다 있는 BBC는 물론이고 상업, 지역, 대학 방송국 등 가리지 않고 무작정 메일 보냈다.
그렇게 이곳저곳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교수님께 말씀드리자, 사우스햄튼 지역 방송국 중 한 곳에 연결해 주셨다. 하지만 내가 원하던 결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1시간 정도 방송 프로그램 시간 동안 인터뷰도 하고 내 노래도 부르면서 게스트로 출연하는 것이었는데, 그분이 제안한 건 1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이 와서 마치 장기자랑하듯 한 명당 한 곡씩 부르는 한 달에 한 번 있는 'karaoke night'에 오라는 거였다.
영국 라디오에서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미 하고 있는 일이기에, 할 이유가 없었다. 만일 내가 영국 지역 방송국 스튜디오를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고, 라디오에 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에 보람을 느껴보고 싶었다면 그 이벤트에 참여했을 것이다.
'이 일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스튜디오 부스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때가 오면 현 라디오도 그만 두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라디오 DJ 역할은 내게 일종의 영국 사회생활 맛보기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비록 돈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학교 밖 사람을 주기적으로 만나고 소통할 기회도, 스튜디오 안에 들어가 녹음할 수 있는 기회도 감사했다.이처럼 직접 경험을 쌓는 데에 성공했든, 다른 방송국에 가봤지만무산됐든, 아니면 아예 이메일에 답장이 오지 않았든 경험 그대로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