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가연 Sep 25. 2023

걱정 끌어다 하지 않기

영국에서 새로운 시작 

도시도, 기숙사도, 학교도, 모든 게 처음이다. 어떤 식으로든 감정이 동요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작년 11월에도 런던에서 혼자 1주일을 보내봤지만 이제는 도시도 신분도 달라졌다. 여행객 신분일 때와 유학생 신분일 때 이렇게 마음에서부터 차이가 날 줄 몰랐다. 


그 이유는 관광객일 때에는 여행할 수 있는 정해진 시간이 있기에 아무리 불쾌한 일이 있어도 얼른 털어버리고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영국까지 구경하러 와서 그런 부정적 감정과 씨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최소 1년 동안 영국에서 사는 것이 정해져 있다. 장점은 작년처럼 매일 2만보씩 걸으며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보고 더 경험하려고 발바닥을 희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만 단점은 앞으로 계속 생활할 생각 하니 걱정도 불만도 많다. 


그렇지만 걱정을 끌어다 하지 않기로 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각각 20, 30킬로 되는 캐리어가 2개라 어떻게 이걸 들고 런던 공항에서 사우스햄튼까지 가야 하나 걱정되었다. 그런데 혼자서 낑낑 대는 작은 동양인 여자를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캐리어가 너무 무거워서 카트에 올리지도 못하고, 카트를 제대로 끌지도 못하니 그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도와줬다. 심지어 기숙사에 도착해서는 또다시 낑낑 대며 캐리어 두 개를 끄는 나를 본 어떤 같은 기숙사 친구가 캐리어 한 개를 대신 끌어주며 방까지 데려다주고 방 소개까지 해줬다. 


또한 방에 도착해서는 화장실에서 뭔가 이상한 냄새가 환풍기를 계속 틀어도 빠지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2천 원짜리 방향제만 사서 놨더니 해결이 되었다. 몇 달 전부터 기숙사가 과연 마음에 들까 걱정이 많았는데 와보니 문제가 생기면 바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그때도 '가보면 알아서 잘할 거다' 거듭 생각했지만 말처럼 그게 쉽지 않았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앞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 미리 걱정하는 정도가 훨씬 줄어들거라 생각한다


영국에 도착한 지 이제 겨우 3일 차인데, 소위 'honeymoon period'가 내게는 없는 것만 같다. 물론 학교는 어제 딱 한 번 가봤기에 계속 그 캠퍼스에서 생활할 생각 하면 설렌다. 정식 학기 시작은 10월 2일부터로 그때까지는 캠퍼스 투어, 동아리 가입, 수업 오티 등이 예정되어 있다. 얼른 더 알아가고 수업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반면 영국 자체에 대한 설렘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이미 작년에 일주일 동안 런던에서 가보고 싶던 주요 명소는 거의 다 가본 탓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설렘이 크지 않은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설렘과 기대가 크면 그만큼 실망도 크다. 어떤 점이 한국보다 불편한지 조금은 미리 경험해 봐서 실망도 덜 할 듯싶다. 



지금 하고 있는 걱정은 '도대체 여기서 뭘 먹어야 하나'이다. 그러고 보면 작년 LA나 런던 갔을 때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셀렉스, 햇반과 반찬들로 하루하루 연명하였다. 현지 음식보다 가져온 음식을 훨씬 많이 먹었다. 주식이 셀렉스였다. 그런데 이번엔 2주가 아니라 1년 치 짐을 챙겨 왔기 때문에 당연히 음식은 거의 가져올 수 없었다. 


오늘은 기차 타고 2시간을 가서 런던 한인 마트에서 김, 카레, 두유, 콩자반 등을 사 왔다. 한국에서는 할머니집에는 가야 먹을까 말까 한 콩자반 통조림을 사 오다니 그걸 집으면서도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라면, 김치, 떡볶이와 치킨인데 다 1년 동안 먹지 말라고 해도 내겐 전혀 문제가 없는 것들이다. 


한국에서도 워낙 밥 챙겨 먹는 것을 귀찮아해서 셀렉스로 끼니를 때우는 날들이 있었다. 나는 뭔가 특정 음식이 당긴다는 게 뭔지 모른다. 그냥 배고프면 배고픈 거지 뭐가 특별히 먹고 싶다는 감정이 뭔지 모르겠다. 타지에 오니 이것이 장점이 되는 것 같다. 단점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매우 한정적이다. 피자도 햄버거도 타코도 샐러드도 스시도 고개를 가로젓기만 하니 말이다. 


방금도 셀렉스 좀 보내달라고 엄마와 실랑이를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어제도 학교 편의점에 파는 단백질 보충제를 한 입 먹고 버렸다. 같은 용량에 칼로리가 두 배인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맛도 이상했다. 


당장 먹을 저녁만 있으면 걱정하지 않으려 한다. 오늘 저녁은 한국에서 가져온 컵밥이다. 

이전 06화 너 도피 유학이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