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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라는 이름

by 이가연


한국에서는 페이가 있는 공연을 하는 걸 원칙으로 하되, 페이가 없다면 그 대신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내가 이 공연을 하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나만의 기준이 있었다. 단순히 무대 경험을 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에 오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었다. 영국 펍에서 노래한 경험은 없으니, 페이가 아니라 맥주 한 병도 주지 않는 펍에서 노래하는 것도 신나고 설렜다. 한국에서 오픈 마이크 공연이라면, 뮤지션으로 입장한 순간부터 물이나 음료를 챙김 받고 리허설을 진행했으며 본 공연이 끝나면 맥주나 먹을 것도 제공받곤 했다. 대부분 오픈 마이크가 진행되는 장소가 손님들이 많지 않아 상업성이 크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즐겁게 가능했다.


영국에서는 사전에 자기소개와 영상을 제출해서 신청받는 것이 아니라, 그날 리스트에 이름을 작성했기에 정말 아무나 무대에 오르는 것이 가능했다. 리허설은 할 수 없었으며 물 한 잔도 달라고 말해야 줬다. 나라가 다르니 이에 맞춰 적응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그제야 한국에서 내가 떠올랐다. 한국이든 영국이든 뮤지션으로서 나의 가치가 변한 것이 아니다. 한국어든 영어든 전혀 다를 바 없이 멘트하고 노래한다. 상업성이 뚜렷이 보이는 장소에서 무료 공연은 하지 않기로 했던 기준이 흔들린 셈이다.


그러나 오픈 마이크에 음악 산업 관계자들이 종종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여기 있는 '가연'은 벌써 펍에서 공연하며 음악 산업에 들어와 있다고 수업 중에 교수님이 말씀하셔서 부끄러우면서도 뿌듯했다. 한국에서는 오픈 마이크에서 관계자를 만난 적이 없지만 여기는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영국에서 라이브 경험을 쌓고, 그 라이브 영상을 인스타와 유튜브에 업로드하는 것은 분명 현재로서는 나에게 이득이다. 꼭 누군가가 내 공연을 봤으면 하는 목적이라기보다, 아직은 낯설고 새로운 이 도시에서 음악 하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도 내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손님이 적어서 벽에 대고 노래하는 기분이 들거나 불친절한 대우를 받는다면 언제든지 그 장소에서는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프로가 된다는 것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가치 있는 일과 가치가 덜한 일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내키지 않는 일은 수락하지 않는다. '다 나한테 좋겠지. 홍보 기회가 되겠지.'라며 한 선택은 상처 조각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그러니 일단 나의 직감이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는다면 '오케이'를 던지기 전에 한 번 멈춰야 한다. 꼭 기준을 적어두고 체크해 가며 일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기준이란 융통성 있게 상황마다 바뀌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동안 일해온 경험이 말해주는 직감은 무시할 수 없다. 이를 간과하면 뒤늦게 선택을 번복하게 된다.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하던 스무 살 시절은 지났다. 뮤지션으로서 나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내가 상처받지 않도록 스스로 보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매니저가 되어야 한다.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이용당한 것일 뿐이었던 수많은 경험을 통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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