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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연 Jan 23. 2024

도움을 요청하는 것

학기 초 새벽에 학생 지원팀에 전화 건 것 이후로 도움을 청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직접 학생지원센터에 방문하게 되었다.




평소 낮에 옆방 노랫소리가 들리면 외출을 하곤 했는데, 지난 주말부터는 에너지 레벨이 낮아 집에 있기 괴로웠다. 오늘 역시 여유롭게 누워있다가 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쫓겨나듯 나오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헤드폰을 쓴 채로 선크림 바르고 바지를 입으니 소위 '현타'가 왔다. 그러곤 오늘 일정을 끝내고 학생지원센터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리 채팅으로 혹시 오후에 예약을 잡을 있는지 물었는데, 예약 없이 그냥 오면 된다고 안내해 주었다. 행여 대기 시간이 길까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대기 인원이 없어 거의 곧바로 상담사를 만날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맞았다. '어디서부터 말 꺼내야 하지'하는 그 1분만 견디니 편해졌다. 곧바로 공감과 경청의 눈빛을 느꼈다. 파란 눈의 백인 남자면 내 감정과 고통을 이해해 줄 수 없나. 사실 남자 상담사가 나를 데리러 왔을 때, 내심 여자였으면 싶기도 했지만 이 역시 편견이다.


4개월째 괴롭히는 옆방 문제부터 이번주 리사이틀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 인간관계 등 현재 내 머릿속에 부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했다. 평소에 즐거움을 위해 하는 일이 뭔지, 리사이틀 끝나고 뭘 할 건지 물으셨다. 바닷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베프가 그 동네에 살아서 주말에 갈 거라고 했다. 그리고 평소에 베프랑 저녁 먹고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내일 저녁에 당장 해야지.


최근 내가 해야 할 일, 또는 해야 되는 것 같은 일에 매여있단 걸 깨달았다. 리사이틀 준비는 진작 끝났다. 이에 대해 더 생각하는 건, 그저 불안감 때문이다. 앞으로 목요일까지 리사이틀에 대해 더 생각하고 준비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으면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결과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가진 능력이 100이면 80만 보여줘도 성공이라고 생각해야지, 120을 보여주겠다고 노력하면 장기전에서 어렵다. 이번 리사이틀은 학교 입학 이래, 교수님들과 친구들 앞에서 처음 평가받고 선보이는 첫 공연이다. 앞으로 5월 밴드 공연, 9월 졸업 공연도 남아있다. 이번 공연에서 100을 다 보여주면 졸업 공연에선 대체 뭘 더 보여줄 텐가. 그때는 8개월 동안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줘야 된다는 부담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번에 80만 보여주고 다음에 120이 나오는 게 낫지 않을까. 당장 해도 되지 않은 일을 일부러 만들어하고 있었다. 봉사활동, 인턴십 신청 등 당장 리사이틀도 스트레스 받으면서 그다음, 그다음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제 1년 유학 생활도 2/3 남았으니, 뭐라도 더 해야 한다는 아무도 주지 않은 압박감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던 거다.



도움을 요청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위로와 공감을 얻을 수 있다. 공연에 대한 스트레스는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나아졌다. 상담사 역시,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지금 스트레스 받고 있구나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좋아질 거라고 했다. '내가 무슨 아마추어도 아니고 학교에서 하는 공연 가지고 스트레스 받나'하는 생각이 그동안 괴롭혔다. '제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노래로 평가받는 게 아무리 익숙해도 다른 나라에서 영어로 평가받는 건 처음이다.' 등 인정하니 편해졌다. 기숙사 문제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다. 학교 기숙사가 아니라서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기숙사에 전화를 해보겠다고 해주셨다. 기숙사 측에도, 시큐리티에게도, 몇 번을 얘기했으니 할 수 있는 건 다했다고 이제 그냥 참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도움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다.


사실 옆방 대마 문제도, 가만히 있으면 먹을 게 없는데 에너지가 없을 땐 요리를 못해서 힘든 것도, 어떻게 온 유학인데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전부 도착했을 때부터 늘 있던 문제인데 '지금' 이렇게 너무 힘들다며 센터를 찾은 이유는, 결국 사람 때문이다. 사람 문제가 아니었다면, 리사이틀도 이 정도로 스트레스 받지 않았을 거다. 인정하고 나니 편하다.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가슴 아픔은, 기존 문제들을 전부 합쳐서 눈덩이처럼 불려 몇십 배로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공연은 어디 처음부터 잘했던가. 사실 처음부터 노래는 잘했다.  


문제 해결 능력도, 스트레스 대처 능력도, 전부 유학을 통해 배워가는 소중한 능력이다. 단순히 공연 잘하는 능력을 얻자고, 음악만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공연은 한국에서도 많은 기회가 있었다. '그냥 내가 참지 뭐. 포기하지 뭐' 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능력도 생겼다. 기꺼이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걸 오늘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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