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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야옹 Feb 25. 2022

폴댄스와 매운 돈카츠 정식

유유자적 운동

내가 다니는 폴댄스 학원은 낡았다.


폴댄스라는 것이 대중화되어서 학원씩이나 들어설 시기를 생각해 보면, 고작 몇 년이다. 그런데 낡았다. 

워밍업 시간에 사용하는 매트에는 뜯겨 나간 흔적이 가득하다. 지하인데도 벽은 묘하게 빛이 바랬다. 

바닥재는 댄스학원이라기보다는 90년대 사무실에 어울리게 생겼다.

더러운 곳은 없다. 그렇지만 낡았다. 새것 같은 구석은 없다.

그런 부분이 이상하게도 매력 포인트다.


탈의실 위에는 한 글자씩 커다랗게 프린트한 글자를 붙여 놓았다. '탈', '의', '실'.

언제 붙인 것인지는 몰라도, 종이가 누리끼리하다.

공중목욕탕 같은 촌스러움이 묻어난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


배전함에도 종이가 붙어 있다. 

"Don't touch!"

어떤 수강생이 무슨 이유로 배전반을 만졌을까. 빠직 하고 해골이 보이는 만화 같은 상상을 해 본다.




폴댄스라고 하면 늘씬한 여성이 은빛 봉에 매달려 섹시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운동이어야 마땅하겠지만, 나는 그런 근사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연습이 부족한 탓도 있을 거다. 등록한지는 제법 되었는데 몇 번밖에 수강하지 못했다. 직장인의 점심시간을 틈탄 운동은 규칙적이기 어렵다. 언제 누가 갑자기 함께 점심을 먹자며 불러낼지도 모르고, 오전 회의가 길어질 때도 있다. 선생님에게 눈물의 문자를 보내 출석 불가를 알렸던 게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다.


그도 그렇지만 실은 원래 몸을 잘 못 쓴다. 좀 더 정확히는 몸 쓰는 법을 어릴 때 충분히 배워두질 못해, 요령이 없다. 춤 추는 영상을 보고 따라하는 것 같은 일은 전혀 해내지 못한다. 움직임을 보면서 '손은 오른쪽, 발은 왼발이 앞으로' 처럼 패턴을 머리로 먼저 이해하지 못하거든 아예 따라할 수가 없다. 걸그룹 뮤직비디오를 보고서 춤을 익혔다는 사람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인간 같다.


그러다보니 똑같이 배워도 남들보다 진도가 월등히 느리다. 폴댄스 수업에서는 한 수업에 한 가지 동작만 가르치지 않는다. 두세 개, 그리고 그 두세 개를 너무 쉽게 소화하는 사람을 위해 하나 정도를 추가로 가르쳐 준다. 나는 그 중 제일 기본이 되는 동작 하나를 간신히 따라하고는 다음날 근육통으로 고생하는 타입이다.


그런데 그것이 왠지 재미가 있다.




오래된 브라탑과 품이 넓은 티셔츠 하나, 돌핀팬츠를 챙겨 수업으로 향한다.

편하지만 오래 입은 티셔츠는 가슴팍에 보풀이 조금 일었다. 돌핀팬츠는 세 벌에 만원 주고 산 싸구려답게 얼마 입지도 않았는데 엉덩이가 보풀투성이.

자리를 잡고 미리 몸을 조금 푼다. 수업 전에 선생님과 함께 워밍업을 진행하지만, 나 같은 몸치는 겨울엔 몸이 심하게 굳어서 십여 분의 스트레칭으로는 근육이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래저래 팔을 풀고 다리 뒤쪽을 늘리다 보면 어느새 수업 시간이다.


다같이 워밍업으로 시작.


다들 옷차림이 가볍다. 물만 없을 뿐 수영장 같다. 폴댄스를 하려면 팔꿈치 안쪽, 겨드랑이, 오금, 허벅지 안쪽 등으로 몸을 지탱해야 해서 긴 소매나 긴 바지를 입을 수가 없다. 입문반에서는 반팔에 반바지 차림인 사람도 많지만, 초급반만 가도 비키니 여인들이 대부분이다.

그거 참, 민망하겠는걸.

이야, 누가 음흉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나.

둘 다 땡입니다.

폴댄스는 보기에도 힘들다고 하지만, 실제로 봉에 오르면 보기보다 더 힘들다. 매달린지 수백 년은 족히 지난 게 분명한데 동영상으로 확인해 보면 고작 10초가 지났을 뿐이고, 시속 80킬로미터로 회전한 것 같은데 동영상으로 확인해 보면 고장난 회전목마도 그것보다는 스피드가 느껴지겠지 싶다. 뭐야, 내 발 저렇게 못난 모양으로 뻗어 있었다고? 하지만 어지간히 숙달되기 전에는 내 발이 곧게 뻗었는지 안으로 휘었는지, 아니면 봉을 감아쥐었는지 생각하기도 어렵다. 봉 위에서 제정신도 못 차리는 마당에 옆 사람이 티셔츠 차림인지 비키니 차림인지 알 게 뭐람. 바로 옆에서 춤추는 사람이 흥에 겨워 도중에 홀랑 벗더라도 나는 아무것도 모를 거다.




선생님이 오늘의 동작을 시연. 그리고 각자 오늘의 동작을 연습.

이게 내가 폴댄스를 좋아하는 이유다.


옆사람이 잘 하면 비교가 되어 주눅이 든다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지만, 기본적으로 폴댄스 수업에는 진도가 다른 개인이 모여 있다. 좋게 말하면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나쁘게 말하자면 좀 체계가 없이 허술하다. 저렇게 잘 하는 사람이 왜 입문반에 있지 싶은 수강생도 있고, 나처럼 남들에게 안도감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몸치도 있다. 실력도 유연성도 체력도 다른 예닐곱명이 모여서 약간 미심쩍은 준비운동을 고작 10여분 진행하고는, 선생님이 보여준 동작만 보고서는 똑같이 따라하려고 아등바등 30분을 보낸다.

이거 뭐, 옆사람과 비교하는 의미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수강생들이 용을 쓰는 동안 선생님은 폴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동작을 잡아주고 요령을 알려주기도 한다. 헌데 설명을 들어봤자 모르겠을 때도 있고, 바로 직전까지는 멋지게 해냈는데 선생님이 못 보는 바람에 말짱 꽝일 때도 있다. 그런 것을 꼼꼼하게 챙겨주지도 않을 뿐더러 수강생들조차 제각기 중구난방이다. 아니, 한 번은, 옆 사람이 그 날 배운 것과 관계 없이 완전히 다른 기술을 연습하고 있는 게 아닌가.

프리스타일도 이런 프리스타일이 없어요.

심지어는 내 순서가 영영 안 돌아오는 날도 있다. 안 되는 동작에 끙끙거리다 못해 선생님이 이쪽 진도도 봐줄 때가 되었는데, 하고 돌아보니 그녀는 스마트폰 삼매경.


뭐가 그렇게 느슨해!

아니아니, 화내지 말고 들어보세요. 그 느슨함이 바로 폴댄스를 즐기는 포인트라니까요.


잘 짜인 룰도 없고, 커리큘럼도 허술하다. 이 동작을 오늘 배웠으니 다음주에는 뭘 배우겠구나 하고 예상해 두기도 어렵다. 선생님도 어딘지 모르게 느슨하고 수강생들도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러니까 경쟁심도 없고, 조바심도 없고, 긴장도 없다.

오늘 잘 하지 못했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지를 않는다. 오늘 전력을 다하지 않고 농땡이 부린 건 아닌지 감시하는 눈도 없다. 그때그때 컨디션에 맞춰서,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연습하고 싶은 날엔 전심전력으로 연습하고, 그게 아닌 날에는 은근슬쩍 봉에 매달린 채로 눈치껏 잘 안 되는 시늉을 할 뿐이다. 마음에 드는 동작이라면 조금 더 열심히, 이건 나중에 별로 다시 춰보고 싶지 않은 춤인데 싶으면 그냥 운동이 될 정도로만 적당히.


아, 이 얼마나 유유자적한가.


세상은 파도타기 하듯 열심과 무심 사이를 왕복한다.

열심히 사는 게 유행하면 너도나도 더 많은 걸 이루려고 다퉈 달려든다. 스펙을 쌓고 공부를 하고, 여행을 하고 견문을 넓히고, 취미를 경쟁적으로 늘리고, 투자를 하고 부업을 찾는다. 일도 하나만 하지 말고 두 개, 세 개 해야 하는데, 취미도 세 개, 네 개는 가져야 한다. 새벽같이 일어나 책도 보고 운동도 하는데 소셜미디어도 운영하고 1인 브랜딩도 해야 한다. 할 일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문득 시계추 움직이듯 유행이 무심을 향해 버린다.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괜찮아'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 봇물을 이룬다. 그런 책들은 표지에 언제나 사람이 누워 있다. 간혹 고양이도 같이 누워 있다. 괜찮단다. 그대로 있으란다. 하지 말란다.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란다. 아, 이게 유행하는 시기에 딱 하나 '하라'는 게 있으니 퇴사다. 퇴사는 하란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란다.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보시라, 유행은 또 바뀌어서 다시 뭔가를 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폴댄스는 허술하다. 그래서 앞에서 이끌어나가는 박자가 없다.

폴댄스를 추는 사람들은 전부 제각각의 박자에 따라간다.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열심히 하고 싶은 날에는 열심히 하고 아닌 날에는 적당히 하는데, 누구도 뭐라 하지 않거니와 누구도 신경 쓰는 티도 내지 않는다. 애초에 누가 눈치나 챘는지조차 모르겠다.

적당히 원하는 리듬을 따르는 스포츠라니 얼마나 유유자적 즐거운가.




그 날은 첫 시간은 정말로 열심히 하고, 둘째 시간에는 기운도 빠지고 동작도 어려워 적당하게 했다. 둘째 시간에 배운 동작을 따라하기엔 내 옷에 문제도 있었다. 살갗이 드러나는 부분으로 폴에 의지해야 했는데 바지 디자인이 방해가 되었다. 적어도 선생님은 그렇게 얘기해 주었다.

역시 폴웨어를 사야 하나. 조금 고민했지만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옷이 새것에다 예쁘기까지 하면 열심히 하고 싶어진다.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생기면 내가 폴댄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사라져 버린다. 적당하고 느슨하게 하고 싶으니까 보풀이 난 바지를 소중히 개켜 학원을 나섰다.

사실 엉덩이가 너무 무거워서 들려 올라가질 않네요, 라고는 늘씬한 선생님께 말 못하지.


아이고 배고파라.

미리 찾아둔 돈카츠 전문점을 향했다.

네, 돈카츠입니다. 칼로리를 불태웠으면 열 배로 채워줘야죠.

메뉴판에 매운 돈카츠 정식이 있었는데, 궁금했지만 매운 게 무서웠다. 이제는 밖에서 매운 걸 함부로 먹었다간 몇 날 며칠을 고생할 만큼 장이 허술해졌다. 원래도 매운 음식을 잘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점점 더 예민해진다.

직원에게 많이 매운지를 묻고는 신라면보다 맵다는 대답을 들었다.

음, 불합격. 최근에 매운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트레이닝이 덜 된 뱃속을 갑자기 놀래키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메뉴를 고르려는데 직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소스를 따로 줄 수도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런 느슨함이 어찌나 고마운지.

음식점 입장에선 한 가지 방법으로만 서빙하는 게 훨씬 편할 텐데, 손님을 위해 규칙을 느슨하게 풀어두다니. 그렇다면 감사히 소스를 따로 받기로 했다.

유유자적한 수업 끝에 빡빡하지 않은 음식점으로 마무리라니, 멋진 하루다.


그리고 그 소스는 정말 말도 안 되게 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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